# 10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08화
“좋아, 그런데 나 배고파.”
에드가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도저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물어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먹지.”
에드가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칼에게 간단한 식사를 가지고 오라 명령했다. 그리고 루비카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시중은 받지 않아도 되는 음식으로 준비해 오라고 했다.
“네, 알겠습니다.”
칼은 싱글벙글 웃었다. 조금 전 방문을 열었던 칼은 낯 뜨거울 정도로 정열적인 키스를 하는 공작 부부를 보았다. 그는 당황하고 놀라서 일단 문을 닫았었다.
“어머? 봤어.”
“세상에…….”
“각하, 너무너무 멋지시다.”
그때부터 다시 문이 열리는 순간까지 하녀들은 수군거렸다. 칼이 조용히 하라고 눈짓했지만 그들은 칼이 딴 쪽만 보아도 마님을 꽉 안은 공작의 팔에 돋은 힘줄과 내려뜬 속눈썹 아래에 열정으로 빛나던 푸른 눈에 대해서 수군거렸다.
“각하께서 그렇게 박력 있을 줄이야.”
“마님 치맛자락이 땅에 닿지 않았던 거 봤어? 깃털처럼 그분을 들어 올리셨더라.”
사실 칼도 아닌 척하려 했지만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공작의 결혼이 두 사람의 거래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남녀 사이는 알 수 없는 거지. 암, 알 수 없고말고. 서로 싫어서 헐뜯고 미워했던 남녀가 사실은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건 흔한 일 아닌가.’
그는 무척 흐뭇하고 뿌듯했다. 그의 눈에 공작 내외는 잉꼬부부 그 자체였다. 아무렴, 한순간의 실수로도 아이는 생길 수 있지.
칼은 음식 운반대를 직접 몰았다. 콧노래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모든 일이 좋게 흘러갈 것 같았다.
“음식은 이게 단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칼과 달리 앤은 모든 일이 나쁘게만 흘러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더니 큰 소리로 식사가 도착했다 알리고 하녀와 함께 규방에 들어갔다.
“각하, 식사는 이쪽 테이블에 둘까요?”
“그러게.”
에드가는 고개를 끄덕인 뒤 테이블 위에 놓인 자수 바구니를 치우기 위해 직접 들었다. 그때 그의 눈에 작은 손수건 하나가 들어왔다. 모서리에는 그도 익숙한 클레이모어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루비카가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은 후였다. 몰래 넣느라 수를 자세히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제 도둑질 비스름한 짓까지 하게 되다니. 제법 양심에 가책을 받았지만 그 손수건을 도로 넣을 생각은 없었다.
“마님, 각하께 말씀하셨나요?”
하녀가 식사를 나르는 동안 앤이 옷차림을 봐주는 척하며 루비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말했어, 걱정하지 마.’
루비카가 소리 없이 입만 움직여 대답했다. 앤은 다행스러운 한편 신기했다. 에드가에게서 실망의 기운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는 전에 없이 끈끈해 보였다. 앤은 다정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뭐야?”
식사도 나왔겠다, 루비카가 먼저 물었다. 에드가는 말없이 유리컵에 주스를 따라 루비카에게 건넸다. 운은 먼저 뗐으면서 지독하게 뜸을 들인다.
그녀는 눈을 흘기면서도 그가 건넨 잔을 받아 마셨다. 오렌지와 만다린, 자몽을 섞어 간 주스는 달달하면서 기분 좋은 신맛이 났다.
“아르망은 어떤 자였지?”
풉.
루비카는 먹던 주스를 뿜었다. 그가 그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에드가는 반사적으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이런.’
방금 몰래 주머니에 넣은 손수건이다.
그의 당황을 모른 채 루비카는 손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았다.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손수건을 확인하지 못한 채 그냥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갑자기 아르망은 왜?”
조심스러웠다. 그가 뭘 알고 있는지, 그녀가 몰래 간직하던 반지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지 덜컥 겁이 났다.
“……그냥.”
에드가는 우물우물 말을 흐리면서 손수건으로 시선을 옮겼다. 손수건이 주스에 젖어 있든 말든 그녀가 눈치채기 전에 회수해야 했다. 그때 그의 눈에 손수건 가장자리의 머리글자가 들어왔다. 그의 머리글자였다.
하늘을 날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머리글자를 손수건에 수놓았다. 모서리 하나하나 자수가 들어간 게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마무리도 깔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그가 왕성에 있는 동안 이걸 수놓았던 걸까? 수놓으면서 분명 내 생각을 했겠지?
“……그런 거야?”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는 루비카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는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입꼬리가 자꾸 하늘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일단은 손수건을 숨겨 완전범죄를 완성해야 했다. 에드가는 손수건을 슬쩍 빼 의자 뒤로 숨기며 시치미를 뗐다.
“응.”
“정말? 정말 그 사람을 찾아 준다고?”
그제야 그는 자신이 무슨 말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루비카는 그에게 혹시 아르망을 대신 찾아 줄 생각이냐고 물어봤던 것 같다. 하지만 에드가는 절대 찾을 생각이 없다. 설사 아르망을 먼저 찾아도 에드가는 자신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테니 제발 사라져 주면 안 되냐고, 노후는 보장해 주겠다고 빌고 싶었다.
하지만 루비카가 저렇게 기쁜 얼굴로 기대에 차서 말하는데 그게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찾고 싶긴 해.’
대체 무슨 매력을 지녔기에 루비카가 저렇게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권력도, 지위도 다 가진 그가 청혼했을 때 루비카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절하려 했다.
‘설마 나보다 잘생겼나?’
루비카는 얼굴을 밝힌다. 불가능한 소리가 아니다. 세상에 자신보다 잘생긴 사람이 있다니……. 예전에는 잘생긴 얼굴이 싫었는데 지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녀가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니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으면 했다.
“그 사람 머리색이나 눈동자색은 어땠어?”
에드가의 말에 루비카는 당장 말문이 막혔다.
“그건…….”
그녀가 아는 아르망은 머리가 하얬다. 루비카보다 세 살이 많은 아르망은 지금 에드가와 같은 스물다섯 살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실제 머리색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눈동자색은 몰라.”
“눈동자색을 모른다고? 그게 말이 되나?”
“아르망은…… 눈이 안 보였어.”
루비카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에드가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방금 그는 확실히 빈정거리는 어투였다. 화제전환이 필요하다.
“먹어.”
그가 그녀의 접시에 훈제 오리고기를 잘라 올려 주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루비카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그가 준 요리를 받아먹었다.
“이것도.”
고기만 먹는 건 건강에 좋지 않다 싶어 아스파라거스와 완두콩 요리도 덜었다. 그러고 보니 야채의 양이 너무 많다. 체력을 키우려면 역시 고기다. 그는 잘 구운 양고기와 소고기를 잘라 루비카의 접시에 올렸다. 그리고 곁들여 먹기 좋은 구운 파인애플 조각을 고기 위에 덜었다. 순식간에 접시 위에 산처럼 음식이 쌓였다. 루비카는 기가 찼다. 이 사람이 누굴 돼지로 만들 일 있나.
“당신은? 당신은 안 먹어?”
짜증 나서 한 말인데 에드가는 기쁜 듯 웃었다. 아까부터 웃음이 헤프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하지만 저 남자의 속은 원래부터 알 수 없었다.
“……아르망이란 사람의 어떤 부분이 좋았어?”
에드가의 질문에 루비카는 사레들릴 뻔했다.
“그런 걸 왜 물어?”
“꼭 필요한 정보야.”
“그걸 안다고 아르망을 찾을 수 있어?”
에드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는 고개를 높이 치켜들고 오만하게 말했다.
“있어. 내가 똑똑한 거 알지?”
루비카는 항의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에드가가 똑똑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였다. 다만 그걸 본인 입으로 말하는 건 정말이지 얄밉기 짝이 없다.
“그 사람은 언제나 내가 피곤하거나 힘들 때 항상 위로해 주고 달래 줬어. 힘든 일을 할 때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어느 날은 너무 속상해서 울고 있는데 말없이 꽃다발을 만들어 줬지 뭐야.”
“눈도 안 보이는 남자가? 그 꽃다발 참 예뻤겠군.”
에드가는 밥맛이 뚝 떨어졌다. 루비카는 그러거나 말거나 테이블의 화병을 보며 웃었다.
“예쁘지 않았어. 다 길가에 핀 잡초 같은 꽃이었어. 이 화병의 꽃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작고 수수했어. 하지만 그래서 더 감동적인 거야.”
방 가운데 마석 램프의 불빛을 받아 루비카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서 그 사람은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손으로 풀을 하나씩 더듬어서 확인한 다음 땄을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이었다면 한 시간이면 끝났을 일인데 아르망은…… 아르망은 세 시간도 넘게 걸렸겠지. 그 힘든 일을 그냥 내 기분을 달래기 위해, 날 웃게 하기 위해 한 거야. 그 사람은 내 웃음을 볼 수도 없는데.”
루비카의 눈꼬리 끝에 눈물이 방울졌다. 눈물이 빛을 받아 일렁거리며 눈동자의 선과 빛을 왜곡시켰다. 붉게 번쩍였다 다시 또 투명하고 맑게 번쩍거리는 아름다운 광경에 에드가는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랑스럽다.
이 사람을, 루비카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가 대체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아, 미안. 내가 너무 감상적이었네.”
에드가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먼저 이야기를 청했다. 그녀는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어. 괜찮아.”
루비카는 눈물을 닦으려 테이블에 둔 손수건을 찾았으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수놓은 손수건을 찾으려 자수 바구니를 들었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어?’
정성은 들이지 않았으나 꼼꼼히 수놓았던 손수건이 대체 어디로 갔나? 바닥에 떨어진 걸까? 루비카가 손수건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하자 에드가가 다급히 다음 질문을 했다.
“언제 그에게 사랑을 느꼈지?”
머릿속이 하얘져 루비카는 그만 손수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어, 언제 느꼈냐고?”
“그래.”
에드가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루비카는 손가락으로 고인 눈물을 훔치고,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머릿속이 막막했다.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게다가 상대는 방금 전까지 자신과 키스한 사람이었다.
“꼭 이야기해야 해?”
“꼭.”
루비카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언제부터 사랑을 느꼈냐고 물으면……. 글쎄, 처음에는 그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눈이 안 보여도 세상을 원망하기는커녕 자신은 튼튼한 두 다리로 낮밤을 가리지 않고 걸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말했어. 그 모습이 참 멋졌어. 나도 ‘그 사람처럼 지금 당장 힘든 일보다 좋은 일부터 봐야지.’ 그런 생각을 했어.”
상황을 비관적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있는 에드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 눈은 그 사람만 좇고 있었고, 내 귀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쫑긋 세워져 있었어.”
“긍정적인 사람은 세상에 많아.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사람이 뭐가 좋다고…….”
결국 에드가는 루비카의 회상에 훼방을 놓았다.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잖아. 평범한 내가 평범한 사람을 좋아하는 게 뭐가 나빠.”
“당신은 전혀 평범하지 않아.”
“완전 평범하지. 머리색도 그냥 흔한 갈색에, 눈동자색도 별 특색 없는 적갈색에…….”
“세상에서 제일 예쁘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루비카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에드가가 분을 참지 못하고 물 잔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머리색이 무슨 흔한 갈색이야. 당신의 풍성한 머리카락에선 얼마나 기분 좋은 향이 나는지 알아? 그리고 당신 눈동자색이 ‘별 특색 없는 적갈색’이라니. 거울은 본 적 있어? 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게 가끔 세상에 이런 보석이 있을까 싶을 정도인데!”
에드가의 얼굴이 벌게졌다. 마음 같아서는 기분 좋은 촉감의 우윳빛 피부와 도톰한 붉은 입술에 대한 예찬까지 하고 싶었다. 그랬다간 루비카에게 등짝을 맞을 것 같아 그만뒀다.
‘당신, 나한테 반하게 만들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