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07화
친절한 사람이 두려웠다.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 반드시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 루비카는 사람에게 상처 주기 위해 연마한 듯한 에드가의 말솜씨에 부딪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이사람, 지독하게 고독하구나.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만은 드문드문 마음을 여는 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보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날 놀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루비카는 드레스 속에 숨어 있는 구두로 ‘콱!’ 소리가 나게 그의 발을 밟았다. 마음 같아서는 뾰족한 신발 뒤축으로 그의 구두를 뚫어 주고 싶었으나 괜히 그러다 그가 진짜 발가락을 잃을까 관뒀다.
에드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비명을 눌렀다. 방금까지 제 품에 안겨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던 여인이 이렇게 매서운 공격을 할 줄 몰랐다.
루비카는 에드가의 속도 모르고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당당히 선언했다.
“진지한 분위기에 장난치지 마.”
그는 진지했다. 정말 그녀와 떨어지기 싫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적갈색 눈이 얼마나 영롱한지, 그녀의 밝은 갈색 머리카락은 늦가을을 떠올리게 했고, 우윳빛 피부에서 얼마나 기분 좋은 향기가 나는지 그녀에게 읊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루비카는 그의 진심을 장난으로 알았다. 애가 탔다. 어째서 루비카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짓밟을 수 있는 걸까.
“장난 아니야.”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진실을 말하는 건지 아닌지 가늠해 보는 듯한 그 행동에 속이 상했다. 그러나 그는 어깨를 곧게 펴고 허리를 세웠다. 그녀에게 자신의 당당함과 진실함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그의 친구였던 오만한 태도는 이 순간에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치켜뜬 그의 속눈썹 아래 파란 눈동자가 영혼까지 꿰뚫을 기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것 보라는 듯 한쪽으로 살짝 올라간 눈썹과 오만한 입술, 섬세하고 고아한 턱선은 정말이지…….
‘신이 빚은 게 아니라 그냥 님프의 현신 같네.’
아름다움에 대한 루비카의 놀라운 탐구는 무의식중에 진실을 맞췄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일단 에드가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그의 아름다움에 그만 화난 마음이 녹았기 때문이다. 뭍 여성이 그랬을 거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라 보란 듯이 서서 자신을 응시하는데 이성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루비카도 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에드가를 만나기 전, 그녀와 가장 친했고 또 깊은 우정을 교류했던 아르망과도 손을 잡는 게 고작이었다. 그도 아르망의 눈이 안 보인다는 핑계 덕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와는 손잡는 게 문제가 아니라 벌써 포옹도 하고 키스도 몇 번이나…….
‘안 돼, 떠올리지 마. 얼굴색이 변할 거야.’
그럼 에드가의 입가에 잔인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떠오를 것이다. 루비카는 황급히 한숨을 쉬는 척 시선을 돌렸다.
“알았어.”
“모르잖아.”
에드가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는 루비카가 여전히 자신의 말을 장난으로 치부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그가 치지도 않은 장난으로 그를 용서했다. 이건 억울하다.
“당신이야말로 날 놀리지 마.”
“놀리다니?”
순진무구하게 그를 바라보는 루비카의 얼굴에 그의 머릿속 회로 하나가 뚝 끊어졌다. 바로 그의 콧대 높은 자존심을 담당하는 회로였다. 이제 여과장치가 사라졌다. 입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먼저 키스해 놓고 이렇게 뒤로 빼는 게 어디 있어. 당신, 날 가지고 논 거야?”
루비카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꼭 여름에 피는 싱그러운 장미꽃 같아서 당장 그 뺨에 입맞춤해 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가지고 놀다니.”
그리고 그녀는 깜찍하게도 자신이 한 행동을 부정했다. 에드가는 그녀의 멱살을 붙잡고 왜 키스했냐고, 순진한 남자를 가지고 노는 게 재밌냐고 따지고 싶었다.
“처음 만난 날 내게 했던 말 기억나?”
“4년간만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깔끔하게 이혼하기로 한 거?”
“아무리 상대가 원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해선 안 된다고 했잖아.”
“아.”
루비카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날 그녀는 흥분을 누르지 못하고 에드가의 뺨을 때렸다. 그때 일이 가끔 생각나면 그녀는 폭 넓은 치마 속에 감춰진 발로 몇 번이고 허공을 찼다.
에드가가 따로 언급이 없기에 내심 그가 그 일을 잊어버렸나 보다 하고 안도했는데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을 꺼내는 걸 보니 잊기는커녕 뇌에 각인된 수준 같았다.
“잊어 주면 안 돼?”
“뭐?”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자신은 그 말 덕에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는데 잊어 달라니. 그건 절대 불가능한 말이다.
“지금 그때 한 말을 부정하겠다는 건가?”
목소리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깜깜한 하늘 아래 있었던 자신에게 내린 빛 한 줄기를 그녀가 취소한다면……. 그 뒤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녀가 그에게 그러면 안 된다.
“그건 아니야.”
“그럼 왜 키스했어?”
“뭐?”
에드가가 그녀에게 성큼 다가왔다.
“사랑하지 않으면 스킨십해선 안 된다고 했잖아.”
루비카는 저도 모르게 겁이 나 뒷걸음질했다.
“그 말은 내게 마음이 있어서라고 해석해도 되나?”
루비카는 말문이 막혔다. 그에게 마음이 있냐고?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그건…….”
해명할 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망설이는데 뒷걸음질 치다 보니 어느새 등에 차가운 벽이 닿았다. 도망치려는 순간, 그가 양팔로 퇴로를 차단했다. 쭉 당긴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넘쳤다.
“설마 장난으로 한 거야? 내게는 그런 말을 하고서 재미 삼아, 놀이 삼아 키스한 거야?”
“그건, 그건 아니야.”
날뛰는 심장을 누르며 루비카는 가까스로 에드가에게 말했다. 그때의 감정이 뭐였는지, 자신을 둘러싼 숨 막히는 열기와 흥분의 정체를 루비카는 딱 정의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그녀는 재미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왜 한 거야, 루비카?”
왜 그런 걸까. 첫 키스는 결혼식장에서였다. 신에게 하는 의식으로 맹세로서 했다. 거기에 그녀의 의사는 크게 작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금은 분위기에 취했든 아니든 그녀는 거부할 수 있음에도 그에게 키스하고 말았다.
‘나는 아르망을 사랑하는데…….’
그녀의 사랑은 아주 느리게 그녀를 찾아왔다. 차마 사랑한다는 말조차 못할 정도로 나이 들었을 때였다.
그녀는 혹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게 그에게 폐가 될까 봐 늦은 사랑을 가슴속에 고이 품었다. 남들처럼 젊은 시절의 정열적인 사랑은 아니었으나 마음의 불은 천천히 뜨겁게 지펴졌다.
그런데 왜 스물두 살로 돌아오자마자 이 남자와 이러고 있을까. 설사 그와 결혼했다 해도 냉담하고 차갑게 살아갈 수 있었는데. 귀족의 결혼은 대부분 재산을 지키기 위한 정략으로 남편은 정부를 만들었고, 부인은 기사들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유행이고 미덕이다.
에드가와는 정략 아닌 정략결혼이다. 하지만 실제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지 못했다. 루비카는 그와의 사이에서 싹 트는 감정이 우정 비슷한 것이라고 애써 합리화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이전까지 어떤 남자와도 그렇게 포옹하지 않았고, 그렇게 키스하지 않았다.
에드가가 아닌 다른 남자가 외로움과 고독을 핑계로 그녀에게 애정을 갈구했다면 그녀는 포옹했을까? 키스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였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그가 수많은 여성을 홀릴 만큼 잘생겼기 때문일까? 자신은 그저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미의 찬미자로 그를 사랑할 리 없다고 여겼건만 자신도 흔히 말하는, 얼굴이나 밝히는 속물인 걸까
“루비카.”
에드가가 루비카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맑은 적갈색 눈은 초점을 잃은 채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혼란이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유 없는 그녀의 모습에 방금까지 꼭 대답을 받아 내고 말리라는 결심이 흔들리고 약해졌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렇게 되는 거야. 내가 아무리 아파도 그 사람이 기쁜 표정을 지으면 기쁘고, 내가 아무리 행복하고 편안해도 그 사람이 슬퍼하면 세상이 다 비참해져.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부담스러울까 망설여지는 거……. 그런 게 사랑인거야
언젠가 루비카가 그에게 말했다. 그는 실제로 그랬다. 루비카가 웃으면 기쁘고, 루비카가 슬퍼하면 가슴이 아팠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마영석을 구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는가. 주변의 모든 반대와 압박보다 루비카의 눈물이, 그녀가 자신에게 영원이 마음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에게 더 큰 고통이었다.
이구동성으로 모든 것이 한 단어를 가리키고 있었다.
‘각하는 마님을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돌팔이 의사의 말에도 그는 루비카를 향한 제 마음이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정의내리기 위해 애썼다.
자신도 그럴진대 루비카는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에드가는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싫거나 미운 건 아니지?”
루비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가는 자꾸만 상황을 희망적으로 해석하려는 자신을 비소했다. 원래 그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녀에 한해서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그녀의 눈빛과 몸짓, 모든 것을 제게 관심이 있거나 호감이 있는 것으로 둔갑시켰다.
‘이래서야 눈 좀 마주쳤다고 호감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말하는 자들이랑 다를 게 뭐가 있어.’
무도회에서 춤 한 번 췄다고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쫓아다니거나 언제 다시 춤출 수 없을까 기웃거리던 아가씨들을 떠올리자 우울해졌다.
그는 여태까지 그녀들을 한없이 귀찮게만 생각했다. 그녀들에게 마음이 없는 게 분명한데 왜 희망이라는 걸 못 버리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들을 마음을 잘 알 것 같았다. 심지어 그들을 귀찮게만 여겼던 지난날이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이런 마음이었구나. 상대의 작은 호의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놓지 못하고 모든 희망과 꿈을 쏟아부어 핑크빛 미래를 꿈꾸는 것. 그는 그녀들과 똑같았다.
그녀도 나를 귀찮아하면 어쩌지?
상황을 낙천적으로 해석하는 만큼 겁이 많아졌다. 이래서 비관적으로 해석하는 게 좋다. 그래야 두려움 없이 모든 일에 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녀에 한해서는 낙천적인 해석을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둘 수 없어.’
에드가는 그녀의 퇴로를 차단했던 팔을 풀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싫었던 루비카는 이참에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잽싸게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에드가에게 잡혔다.
“이야기 좀 해. 물어볼 게 있어.”
에드가의 표정이 제법 비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