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06화
“칼, 들어와……”
루비카는 눈을 꼭 감고 까치발을 든 채 에드가의 입술을 제 입으로 막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루비카의 입에 닿았다 떨어졌다. 에드가가 너무 놀라 반걸음 뒤로 물러난 것이다. 루비카가 슬쩍 한쪽 눈을 떠 보니 그는 흥분이 싹 달아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아, 이제 대화가 좀 되겠…….’
그녀는 생각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에드가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휙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아까와는 다른 흥분이 그의 얼굴에 깃들었다. 뒷목에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운 것이 닿았다. 어느새 그의 큰 손이 그녀의 머리를 받친 것이다. 평소에는 차갑기 짝이 없는 그의 손이 이럴 때는 뜨거웠다. 루비카는 뒤늦게 자신이 잠자던 사자의 야성을 깨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가?
그녀는 그저 그의 화를 가라앉힐 정도의 짧은 키스를 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아니, 돌이키려 마음먹으면 그럴 수 있다. 에드가는 신사였다. 신사니까 지금이라도 그녀가 안 된다고 말하면 물러나겠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남자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이런 일에 한해서는 담백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돌이키지 않았다.
그의 눈이, 허리를 꽉 잡은 그의 강인한 손이, 등 뒤로 부드럽게 그녀를 받치고 있는 손이, 그의 붉은 입술이, 그의 향내가 그녀를 취하게 했다.
결코 짧은 키스가 아니겠지. 길고 깊은, 영혼이 송두리째 빨려 들어가는 키스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은 눈을 감는 거였다.
곧 에드가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다. 방금 전과 다른 열정과 에너지가 입술을 통해 느껴졌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곧 그런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열정이 그녀를 꽉 채웠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도, 그도 멈출 수 없었다. 회오리치는 정염에 사로잡힌 두 사람에게는 오직 서로만 보일 뿐이다. 조용히 문이 다시 닫혔다. 에드가는 깊이 그 입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투로 그녀의 안을 탐색했다.
숨쉬기가 곤란해질 때쯤에야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루비카는 가쁜 숨을 내쉬며 부족한 산소를 보충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머리 위에서 더운 숨이 쏟아졌다.
“에드가.”
용기를 내 그를 불렀다.
“응.”아직 열정이 사라지지 않은 그가 대답했다. 루비카를 한 팔로 안은 그는 뭐가 아쉬운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가 승낙의 뜻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당장에라도 다시 키스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할 말이 있어. 내가 하는 말,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들어 줬으면 좋겠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키스해 준 덕분에 지금 그는 그녀가 콩으로 드래곤을 무찌를 수 있다고 말해도 믿을 기세였다.
“나 임신 안 했어.”
“뭐?”
단번에 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뿌듯하고 행복했던 마음을 그녀가 단번에 박살냈다. 하지만 아까처럼 흥분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제 품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다소 가셨기 때문이다.
“진짜야. 앤이 오해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야. 그리고 앤의 사정을 들어 보면 당신도 ‘오해할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납득할 거야.”
“오해라고?”
“주치의를 불러 확인해 봐. 당신에게 이틀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하인이 제일 빠른 전서구를 보냈으니 오늘 아침에 도착할 거라고 그랬어. 친척들의 축하 편지는 한밤중에 도착할 테니 괜찮을 줄 알았지.”
루비카가 차분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에드가를 가득 채웠던 열정이 사라졌다. 그는 사색이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정말인가?”
“응.”
루비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태도를 보았을 때 결코 그를 놀리는 것 같진 않았다. 따지자면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임신을 하지 않았다. 그가 상상했던 최악의 일도 없었고, 아이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그녀를 빼앗겨야 한다는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죄가 없다. 오해로 빚어진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머리는 그리 이해했는데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꼭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저택까지 달려오는 열여덟 시간 내내 그가 얼마나 걱정했고 분노했으며 가슴 아파했는지 아냐고 그녀를 붙잡고 따져 묻고 싶었다. 제 마음을 이리 농락해도 되냐고 화내고 싶었다.
그녀는 잘못한 게 없는데,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에드가?”
그의 변화를 눈치챈 루비카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에드가가 시선을 피했다.
“많이 화났어?”
“내가 왜 화가 나. 다 내가 제멋대로 오해하고 제멋대로 상상한 건데.”
따지자면 억울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에드가가 흥분해서 자기 할 말만 줄줄 늘어놓는 통에 그러지 못한 것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에드가가 왜 이러는지도 알 것 같았다.
“고마워.”
“뭐가?”
여전히 그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으나 루비카는 그의 온 신경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금물이다. 그렇게 웃으면 자존심 센 공작님은 평생 이렇게 고개를 돌린 채 살지도 모른다.
“정말 임신한 건 아니지만……. 나와 아이를 내쫓지 않고 당신 아이로 키우려 한 거.”
“그건 당연한 거야.”
이 사람은 냉정하고 차갑지만 따듯하다. 한 사람이 상반된 평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원래 세상은 무 자르듯 딱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양면을 가졌으니까.
루비카는 이제 에드가의 나쁜 면모조차 싫지 않았다. 클레이모어 공작저에 있는 동안 그녀는 서서히 그를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냉정하고 차가워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보통 아내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면 내쫓지. 아까도 말했듯이 밖에서 그러면 호구 소리 들어.”
솔직히 좀 걱정스러웠다. 집무실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느라 생활 감각 같은 건 떨어질지도 모른다. 제 아이도 아닌데 덜컥 키우겠다고 하는 것부터 보통의 발상이 아니다. 생긴 건 세상의 모든 이득과 편의를 꼭 제 것처럼 주무를 것 같은데…….. 이러다 큰일 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우리 공작님, 어디 가서 사기당하는 거 아냐?”어린 손자를 걱정하는 것 같은 말투가 절로 나오고 말았다. 그 말에 발끈했는지 계속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에드가가 시선을 마주쳤다.
“나야말로 진짜 임신이었다면 당신에게 따지려고 했어. 임신했으면서 육체관계는 왜 거부한 거야? 나한테 자기 아이라고 믿게 만들어야지. 사람이 왜 그리 약게 못 살아?”
“안 했잖아, 임신.”
루비카가 반문했다. 어이가 없다. 하지도 않은 임신을 한 것처럼 치부한 걸로도 모자라 자신을 순진한 사람 취급하다니, 세상에 이리 억울한 일이 다 있을까.
“난 그런 줄 알앗어. 여기 오는 내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당신이 혹시라도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생각에 몰래 저택을 떠날까 봐 마차로 오는 내내 심장이 터져 버리는 줄 알았어.”
역시 그는 화가 났다. 루비카는 자신에게 분노를 퍼붓는 에드가를 올려 보았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화를 내고 있는 그가 별로 무섭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그녀는 전처럼 그가 거북스럽지 않았다. 다들 말리던 그녀의 뜻을 이해해 줬기 때문일까.
“벌린 일이 있는데 어떻게 도망쳐.”
루비카는 에드가가 그녀의 책임감을 이상한 쪽으로만 해석하고 있음을 넌지시 알렸다.
“마영석 때문에 생긴 난리가 임신으로 조금 잠잠해졌는데 내가 사라져 봐. 당신이 얼마나 곤란하겠어.”
루비카의 마지막 말에 에드가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작은 설렘을 주었다. 그는 기대감이 실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진짜 임신했어도 말없이 사라지지 않을 생각이었나?”
“만약 정말 임신했다면……..”
루비카는 상황을 가정하려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아름답고 잘생긴 남자를 보면 쉽게 두근거리긴 했지만 그들과 연애를 하고 싶가거나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적은 전무했다.
루비카는 그저 아름다운 사람의 곁에서 오래오래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또 찬미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연인이란 관계는 사실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연인이 되면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아름다운 이를 관찰할 수 있으나 그 관계가 파경에 이르게 되면 더는 그럴 수 없다. 또, 루비카는 되도록 많은 사람을 즐거이 보고 싶었다. 연인이 생기면 그럴 수가 없다. 에드가만 해도 피로연 대 잘생긴 기사를 좀 훑어봤다고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나.
사실 이성과 이렇게까지 가까운 관계가 된 건 에드가가 처음이었다. 물론 아르망과도 오랫동안 교분을 나누었으나 그와는 우정의 키스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또, 그는 결코 지금 에드가처럼 강인한 팔로 그녀를 꽉 껴안고……..
“그러데 당신, 언제까지 날 안고 있을 거야!”
정신이 없었다. 오해하고 화내는 에드가를 달래느라 그만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오래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루비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글쎄, 쭉?”
에드가는 바로 떨어지는커녕 그녀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겨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는 게 아닌가. 그가 말할 때마다 옅은 숨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났다. 마차에서부터 규방까지 쭉 뛴 데다 잔뜩 흥분했던 그에게서는 짙은 사내의 향기가 났다. 루비카는 심장이 경쾌한 행진곡 박자처럼 귓가에서 빠르게 뛰는 소래를 들었다.
“‘쭉’이라니?”
쉰 소리가 나왔다. 열병에라도 걸린 듯 온몸이 달아올랐다. 이상하게 손가락 끝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루비카와 달리 에드가가 실쭉 웃었다. 아까의 분노와 흥분은 떠나지 않을 거란 그녀의 말에 다 사라졌다. 확답을 해 주지는 않았으나 그거나 이거나. 그는 여유가 넘쳤다. 게다가 그를 말리기 위해 루비카는 직접 그를 붙잡고 입술을 부딪쳤다. 그가 조르지도, 분위기와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는데 루비카가 자신의 의지로 직접 움직였다. 루비카의 이런 행동은 그에게 의미가 컸다. 처음 입술이 닿았을 때는 너무 놀라서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도 잊을 정도였다. 귀족의 체통도 잊어버리고 칼이 들어오든지 말든지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천국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먼저 입맞춤을 하지 않았으리라. 그에게 사랑하지 않으면 스킨십해선 안 된다고 알려 준 사람이 아닌가.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어.”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 단어를 말했다. 푸른 눈 속의 은하수가 폭발하듯 반짝였다. 루비카는 사랑이라도 속삭이는 듯 구는 에드가의 모습에 당황했다. 만약 그녀가 신호하면 그는 언제라도 다시 아까와 같은 정렬적인 키스를 퍼부어 줄 기세였다.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그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놀리려고……..’
그녀는 에드가 때문에 눈물 뽑은 여자들이 꽤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소 과장이 섞여 있긴 하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에드가는 그녀들과 놀아나진 않았으나 실연의 상처를 주긴 했다.
―레오폴드 후작 영애가 클레이모어 공작 때문에 상사병을 앓고 있대.
―지오반니 오페라의 프리마돈나가 공작을 꾀려다 오히려 홀딱 반해서 쫓아다닌다지 뭐야?
왕국에서 손꼽히는 미녀들이 그를 사랑했다. 그런 그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게 이러는 건 역시 놀리는 거다. 그간 그의 부인이고, 또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루비카는 제 나름대로 에드가를 배려했다. 에드가는 아닌 척했으나 그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버거울 정도로 많은 의무와 전통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루비카 또한 앤이 없었다면, 과거의 경험이 없었다면 대체 어떻게 처리했을지 의문인 격무에 부딪쳤다.
또 그의 친척들이란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넘쳐나는 부를 가진 공작가이기에 오히려 지독했다. 그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공작가에 돈을 요구했다.
그는 고독한 자였다. 주변에 사람들이 넘쳐났건만 그는 고독했다. 그 자신도 그걸 아는지 쉬이 누군가에게 곁을 주지 않으려 했다. 무참한 말로 상처 주어 사람을 내쫓는 게 취미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하며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했다.
전쟁이 나고 마음의 안식처를 찾기 전 루비카는 자신이 외롭다고 느꼈다. 에드가의 고독과 조금 달랐지만 루비카는 그때의 자신이 에드가와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다. 삼촌 내외는 살랑살랑 웃으며 다가와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굴다가 작위 대행자가 되자 태도를 싹 바꿨다. 그날 이후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루비카는 세상의 친절을 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