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05화
하지만 그녀의 말에 에드가는 차분해지기는커녕 거친 목소리로 반문했다.
“걱정하지 말라니! 어떻게, 어떻게 내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어!”
머리끝까지 화가 오른 에드가가 외쳤다. 차분해지자고, 자신보다 루비카가 더 무섭고 불안할 거라고,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고 그토록 다짐했건만 다 소용없었다. 루비카는 때때로 지나칠 정도로 그의 마음을 건드렸다.
“아니, 대책은 다 마련해 놓았으니까.”
“대책?”
에드가의 머릿속이 표백된 것처럼 하얘졌다. 그의 머릿속에 이성을 잡고 있던 끈 하나가 툭 끊겼다.
“대책이라니? 설마 이 추운 계절에 혼자서 저택을 떠나겠다는 건 아니겠지?”
혼자 저택을 떠나다니, 그건 무슨 소리인가? 게다가 추운 계절? 물론 저녁엔 날씨가 다소 쌀쌀해지기는 하나 지금은 약동하는 봄이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그 꼴은 못 봐.”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니 설득도 할 수 없다. 루비카는 일단 그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에드가, 들어 봐.”
하지만 에드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상태가 아니었다.
“못 가!”
그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그녀의 말을 딱 잘랐다.
“이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못 가.”
루비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얘기를 왜 이렇게 비약하는지 알 수가 없어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 모습은 에드가의 눈에 꼭 토끼 같았다. 이 귀여운 여자를, 그것도 제 아니를 바깥에서 고생하게 둘 수 없다.
“내가 책임져.”
“……뭘?”
야속하게도 그녀는 끝까지 그를 배제했다. 그가 아무것도 책임질 게 없다는 투였다. 아내와 아이를 보호하고 지키는 건 남편의 의무다. 휴 신의 사제 앞에서 맹세했다. 당시 루비카는 거짓말을 용서해 달라는 손동작을 했으나 그는 아니었다. 그는 맹세했다.
“네 남편은 나잖아.”
불쑥불쑥 분노가 치미는 걸 참으며 그가 읊조리듯 말했다. 사나운 맹수가 화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루비카는 덜컥 겁이 났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우리는 일종의 계약 관계이지 않느냐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그렇지.”
그러나 그 대답도 정답은 아니었는지 그의 눈에 기어코 핏발이 섰다.
“아르망, 그 새낀가? 그 자식 지금 어디 있어?”
“아르망?” 아르망의 이름이 대체 왜 나오는 거야?“
“지금 감싸는 거야?”
이글거리는 눈으로 에드가가 루비카를 녹일 듯 노려보았다.
“그놈은 좋은 놈이 아니야.”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당신, 그 사람을 만난 적 있어?”
루비카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르망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하지? 혹시 에드가는 아르망을 알고 있는 걸까?
“그걸 꼭 만나 봐야 아나?”
하지만 아쉽게도 에드가가 비아냥거리며 한 말은 전혀 딴 소리였다. 실낱 같은 기대가 사라졌다. 그리고 조금 화가 났다. 아까부터 자꾸 딴 소리를 해대며 화내고 비아냥거리는 그가 마웠다. 이렇게 싸울 거면 조금 전의 따분한 시간으로 돌아가는 게 나았다.
“아르망은 좋은 사람이야. 그가 얼마나 친절하고 착한지 당신은 몰라. 내 앞에서 아르망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부글부글,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던 화에 에드가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친절하고 착하다고? 루비카, 당신은 속고 있는 거야. 양심이 있고, 책임이 뭔지 아는 놈이라면 자기 아이를 임신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걸 두 눈 뜨고 보고 있지 않겠지.”
루비카는 그제야 그가 왜 이러는지 깨달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그녀의 편지를 읽지 못한 것이다. 축하 편지는 꼭두새벽에 도착하고 그녀의 편지는 아침 해가 뜨자마자 도착할 거라고, 전서구를 담당하는 하인이 호언장담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중간에서 일이 꼬여 버렸나 보다.
“그런 놈 좋아하지 마! 당신 마음을 받을 가치도 없는 놈이야.”
에드가는 자신이 루비카의 오빠나 아버지라도 된 듯 아르망을 비난했다. 루비카는 한편으로 의아했다. 그녀는 에드가와 어떤 육체적 관계도 맺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임신했단 소식이 그의 귀에 들어갔다. 보통 아내가 부정하게 임신했다고 생각한 남편은 이를 그냥 두지 않는다. 아내를 쫓아내면 다행이고 관청에 고발하거나 조용히 자결을 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에드가는 아르망에게 험한 말을 쏟아내고 화를 내긴 했지만 그녀를 비난하진 않았다.
“에드가, 뭔가 큰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오해라니? 무슨 오해?”
“나는 아르망에게 제대로 고백조차 못했어. 그리고……”
곧이어 설명하려던 루비카는 입을 다물었다. 에드가가 뒤통수에 번개라도 맞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그녀의 어깨를 양 손으로 쥐고 되물었다. 시선은 아직 부를 기미가 전혀 없는 배를 향했다. 루비카는 곧 자신이 에드가의 오해를 불식하기는커녕 더 불태웠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가정을 하고 있는 거다.
“에드…….”
“내 애야.”
에드가가 단호히 루비카의 말을 잘랐다. 그의 푸른 눈이 기이할 정도로 불타고 있었다. 에드가가 이렇게 흥분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는 보통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서 점잔을 빼며 그녀가 하는 행동을 비꼬거나, 놀려 먹었다. 함께 있으면 발끈하고 화내는 사람은 주로 그녀였다. 에드가는 항상 냉정을 잃지 않았다. 식사를 할 때도 루비카는 종종 그를 흘끗 훔쳐보았으나 에드가는 아름다운 속눈썹을 내리깔고 그림처럼 나이프질을 할 뿐이었다. 냉정과 우아함, 이성 뭐 그런 것들의 정수만 모아 만든 것 같았던 에드가가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당신 애라니…….”
“당신은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야. 공작 부인이 임신한 아이는 공작인 내 아이인 게 당연하지 않나?”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세상에 뭐 이런 바보 같은 소리가 다 있나.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이지.”
루비카의 마음을 읽은 듯 에드가가 덧붙였다. 언뜻 듣기에는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그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가득 떨리고 있었다.
“난 당신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 아니, 그건 권리야. 당신 뱃속의 애는 내 아이야. 그 애는 사내아이면 공작가의 후계자가 될 거고 여자애면 공작 영애가 될 거야.”
“아니, 에드가”
루비카가 다급하게 그의 말을 막았다. 빨리 사실을 알려서 그의 말도 안 되는 상상과 폭주를 막아야 했다.
“그러니 당신 맘대로 책임감을 느끼고 저택을 떠난다거나 그런 짓을 하면 가만 안 둬. 대륙 끝까지 쫓아갈 거야. 책임져야 할 사람은 나야. 임신한 당신이 아니야. 그러니 대책을 세웠다든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마. 모두, 모두 내가 해야 하는 일이고 내 의무야!”
에드가는 그녀를 상대로 선전포고하듯 말했다. 말의 내용은 즉, 임신한 상태로 저택을 떠나 고생하는 꼴은 못 보니 다 알아서 처리하고 책임지겠다는 거였다.
달콤하다면 달콤한 말이었으나 루비카는 오히려 오싹함을 느꼈다. 에드가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히, 감히 당신에게 그런, 그런.”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에드가가 침음했다. 이때다. 루비카는 빨리 오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입을 오므렸다.
“……짓을 한, 명예도 모르고 책임도 모르는 추잡스러운 놈들은 내가 잡아내서 평생 고통스럽게 살게 해 주지.”
에드가의 입에 위험한 미소가 걸렸다. 등 뒤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루비카는 그만 오해라고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평민이면 내가 집행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형벌로 죄를 묻겠어.”
그 잔인한 형벌을 자세히 읊는 건 임산부인 루비카 앞에서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에 에드가는 더 이상 말을 삼갔다.
“귀족이어도 걱정하지 마. 음독이든 암살이든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할 테이. 이왕이면 평생 침 흘리며 살게 만들어 줄 거야. 당신을……,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한 놈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꼴은 내 두 눈 뜨고 못 봐. 두고두고 후회하게 해 줄 거야.”
휙, 에드가가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부를 모양이었다. 루비카는 깜짝 놀라 그의 팔목을 잡았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그를 말려야 한다.
“에드가, 오해……”“칼!”그의 우렁찬 목소리는 방문을 뚫고 대기하고 있던 엘리제에게까지 들렸다.
“네.”
“칼을 불러!”
큰일 났다. 일이 이 지경에까지 다다르면 엘리제는 물론 앤이 얼마나 겁을 먹을까. 더 늦기 전에 에드가의 오해를 풀어야 했다.
“에드가, 제발. 오해야.”
“오해? 무슨 오해?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른 걸 오해란 말로 감쌀 생각하지 마. 당신은 너무 물러. 그런 놈들까지 변호하지 마.”
하지만 에드가는 너무 흥분했다. 이제는 오해라는 그녀의 말조차 듣지 않았다.
“나 임신 안 했어.”
“그런 말로 순간을 모면한 다음에 저택에서 도망치려고? 그 아이는 내 아이야. 내 아이를 임신한 당신이 혼자 책임지겠다며 사라지는 건 안 돼.”
큰일 났다. 그는 제대로 분노했고, 제대로 흥분했다. 진실을 말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의 똑똑함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는 루비카가 상상도 못했을 술수를 부리고 있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에게 자신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루비카, 걱정하지 마. 그 애는 내가 남부럽지 않게 키울 거야. 아니, 클레이모어의 아이가 남을 부러워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제는 또 뭘 생각하는지 눈이 희망에 차 있다. 그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그게 뭐야, 자기 자식도 아닌 아이를 키우겠다니. 당신…… 당신, 호구야 뭐야?”
이제 루비카마저 말려들고 말았다. 자신이 임신했다는 전제하에 말을 해 버렸다는 걸 깨달은 순간, 에드가가 해사하게 웃었다. 언제가 차가웠던 그가 꼭 따사로운 햇살처럼 웃었다.
쿵-.
루비카는 갑작스레 들린 심장 소리에 깜짝 놀랐다.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아르망.’
먼 과거이자 먼 미래, 빨래터에서 아르망이 그녀에게 웃었던 것처럼 그가 웃었다.
“뭐긴 뭐야. 당신 남편이지.”
루비카는 현기증을 느꼈다. 호구도 그에겐 과찬이었다. 그는 꼭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어떻게 아르망과 그가 비슷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걸까. 아르망과 그는 전혀 다르다. 같은 햇살이라고 해도 아르망이 따뜻한 봄 햇살이라면 에드가는 작열하는 여름의 용암 같은 햇살이었다. 루비카는 그 강렬하고도 뜨거운 햇살에 녹아 버릴 것 같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집사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만면에 화색이 돈 에드가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인가?”
“네, 각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급했다. 루비카는 그를 말리기 위해 팔을 잡아끌었다. 할 말이 있다는 몸짓이었으나 에드가는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 오해를 낳았다. 루비카는 임신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말에 에드가가 더 흥분했다는 걸 알았다. 흥분한 그는 그녀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가 제멋대로 기사단을 움직이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그 방법밖에 없나.’
제일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흥분해서 제 말을 하나도 듣지 않는 에드가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그 방법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