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04화
그 광경을 떠올리자 마음이 아파오는 동시에 저절로 훈훈해졌다. 루비카는 눈앞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에게는 강하게 맞섰다. 하지만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했다. 그녀의 아이가 울며불며 매달리면 절대 떠날 사람이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루비카를 임신시키고 내뺀 놈에게 고마움마저 느꼈다.
‘아이가 날 진심으로 아빠라고 여기게 만들어야 해.’
그러려면 먼저 루비카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클레이모어 공작가 내에서 그의 아이로 키우자고 설득을 해야 한다. 아이의 미래와 가능성에 대해서 들먹이며 이대로 가진 것 없이 나가면 아이와 함께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일깨워야지. 약속과 다르니 지참금을 돌려 달라는 치졸한 방법까지 서슴지 않을 예정이다. 실제로 그녀가 아랑곳하지 않고 떠난다면 그는…….
‘고생하는 꼴은 못 봐.’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집도 우연을 가장해서든 어떻게 해서든 구해 주고, 몰래 식량을 보낼 것이다. 그녀의 고운 손에 굳은살이 생기는 것만은 막고 싶다.
‘하지만 일단 그녀가 떠나지 않게 하려면 그런 티를 내선 안 돼.’
자신이 굶어 죽는 건 몰라도 아이까지 위험할 지도 모른다면 루비카는 결국 클레이모어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에드가는 아이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부어 줄 것이다.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모두 다하게 해 줘야지. 조금 응석받이로 자랄 수도 있지만 루비카가 있는 한 아이는 삐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결심을 굳혔을 때 해가 서산으로 떨어졌다. 마차는 어느덧 클레이모어 영지에 들어섰다. 조만간 그는 클레이모어 저택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 * *
에드가의 초초한 마음과 달리 루비카는 무척 평온했다. 그녀는 벽난로의 따뜻한 불빛 아래 엘리제와 함께 자수를 놓고 있었다. 먼젓번에 만들었던 것은 벌써 완성되었다. 이번에는 클레이모어 대대로 내려오는 문양집을 찾아 손수건의 네 모서리 끝에 수놓기로 했다.
“벌써 다 하셨네요?”
루비카를 따라 수를 놓던 엘리제가 놀라 물었다. 똑같은 문양집을 보고 있건만 엘리제는 손수건 가장가리에 하나를 겨우 수놓았을 뿐이다.
“요령이 생기면 금방 해.”
루비카는 실의 매듭을 꼬아 마감했다. 감탄하는 엘리제와 달리 그녀는 별 감흥이 없는 눈치였다.
“각하의 머리글자를 수놓으실 거죠?”
완성한 손수건을 그대로 바구니에 넣으려던 루비카의 손이 멈췄다. 엘리제는 다양한 알파벳 도안이 담긴 책자를 내밀었다.
“각하께서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에드가가? 그가 좋아할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에드가는 딱히 과시욕이나 자신을 꾸미는 데 관심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취미는 고상한 편이었고, 칼은 그가 입는 옷과 구두를 완벽하게 딱 맞춰 준비했다. 아마 손수건도 한 이십년 치는 준비해 두고 쓸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 번 쓰면 더럽다고 버릴 것 같아.’
하지만 에드가의 머리글자를 수놓지 않을 거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벽난로의 노란 불빛을 받아 초록색으로 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엘리제의 초롱초롱한 눈빛 때문이었다.
‘하지만 뭐, 처음부터 연습 삼아 시작한 거고.’
루비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수건을 바라봤다. 그래, 연습용인데 괜히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 말자. 그리고 지금은 엘리제의 취향에 대해서 좀 더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언젠가 꼭 이 아이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쁜 드레스를 만들어서 입혀야지.
“네가 보기엔 뭐가 예쁜 것 같니?”
루비카의 말에 엘리제는 도안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머리글자들을 찾아 추천했다. 루비카는 재빨리 그 특징을 외웠다.
‘직선보다 곡선을, 화려하지만 너무 복잡하지 않는 걸 좋아하는 구나.’
이렇듯 취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니 또 로열블루 천이 생각났다.
“마지막 글자는 이게 좋을 것 같아요.”
엘리제가 가리킨 문양을 본 루비카는 확신했다. 카나와 함께 디자인 한 드레스는 엘리제의 취향이었다하지만 지나치게 혁신적이여서 주변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고 카나가 조언했다.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미련이 남았다.
‘어떻게 하면 그 드레스를 주변에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아직은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루비카는 아쉬운 마음을 삼키고 엘리제를 향해 웃었다.
“그래, 네가 추천한 대로 하자꾸나.”
루비카는 순식간에 에드가의 머리글자를 손수건에 수놓았다. 침방의 침모도 이보다 빠르지 못했다. 그리고 손수건에 머리글자를 다 수놓는 순간 놀랍게도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에드가가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애초에 연습용이었다. 에드가의 고매한 취향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녀의 마음 가는 대로 수놓았다. 그에게 내밀어 봤자 핀잔이나 받을 것 같았다. 루비카는 완성한 손수건을 바구니에 넣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흥미로웠던 문양집이 이제는 뻔하게 느껴졌다.
처음 느껴보는 무료함이 그녀를 짓눌렀다. 처음 저택에 왔을 때는 매일매일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녀는 문간의 무늬마저도 유심히 봤다. 하지만 이제 이것도 한계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그녀는 저택을 꾸미는 화병의 개수와 포크의 종류, 정원사의 구두까지 다 외워 버렸다. 처음 음식을 먹었을 때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식재료와 신선한 고기와 생선의 향연.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물론 스티븐의 요리솜씨는 여전했다. 모두 맛있었다. 하지만 처음 접한 음식을 만났을 때의 짜릿함은 이제 더는 느낄 수 없었다.
“심심하다.”
이제 더는 문안을 핑계로 그녀는 찾아와서 귀찮게 구는 친척도 없다. 마영석 건으로 모두와 한바탕 싸울 준비를 했건만 앤의 적절한 오해로 -임신을 했다고 소문이 쫙 나는 바람에- 아무도 그녀에게 따지러 오지 않았다.
“카드놀이라도 할까요?”
엘리제가 눈치를 보며 제의했다. 하지만 루비카는 고개를 저었다. 엘리제와 카드놀이를 하면 그녀가 무조건 이겼다. 엘리제가 훨씬 더 잘하는데도 그랬다. 어차피 승부가 정해진 놀이, 해 봤자 재미가 있을 리 없다.
루비카는 제 발 아래에 누워 있는 개, 라떼의 털을 쓰다듬었다. 관리가 잘된 라떼의 털이 결을 따라 손가락 사이를 스쳐지나갔다. 라떼는 기분이 좋은 지 ‘끙’소리를 내었다. 루비카 역시 기분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따분하다.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뭔가 자극이 필요해.’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미 줄만한 자극은 다 줬다. 마지막 남은 자극은 당사자인 엘리제의 거부로 허무하게 부셔졌다. 허전함과 공허함이 그녀를 내리눌렀다.
‘시간이나 빨리 지났으면 좋겠네. 그럼 왕성에서 에드가가 돌아올 텐데.’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에드가의 귀환을 바란 자신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 속을 알 수 없고 제멋대로에 잘난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남자를 내가 왜?
‘아무리 무료해도 그렇지.’
그래, 무료해서 그런 거다. 그가 있을 때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사건사고가 많았다. 빈정거리는 말이나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대응하기 위해서 그녀는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던가. 그는 그녀를 놀려 먹는 걸 삶의 낙으로 삼는 듯 했다.
‘자꾸 키스나 하자고 졸라 대고, 그런 예쁜 얼굴로 그러는 건 반칙이야!’
세상에 그런 유혹을 당해 낼 여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루비카도 그만 흔들렸다. 다른 때였다면 단호하게 거부했겠지만 그날은 좀 이상했다. 그에게 지나치게 감동하기도 했고, 눈이 마주쳤을 때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에 빗대어도 손색이 없는 그의 푸른 눈이 그날은 꼭 우주 같았다. 테두리는 짙은 네이비블루에 동공에 가까울수록 점점 연한 하늘빛을 띤 홍채에는 은하수처럼 드문드문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밤하늘의 샛별이 저럴까? 누군가의 눈동자를 그리 가까이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아름다운 눈동자. 루비카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무얼 원하는지, 그리 행동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 때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그래.’
루비카는 상상만으로 달아오른 뺨은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녀는 그때 들린 심장소리가 평시 예쁜 것을 볼 때 들렸던 심장소리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때 그런 것은 너무 예쁜 것을 가까이에서 본 감동과 충격,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던, 묘하게 안타까웠던 그의 목소리가 불러낸 분위기라는 마법 때문일 것이다.
“루비카!”
그래, 그는 꼭 그렇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냐, 이건 좀 다급해. 좀 더 부드럽고, 좀 더 귓가 가까이에서 숨소리가 섞여서 안타깝다는 듯이…….’
정확하게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그녀가 눈을 감았다.
‘루비…….’
“루비카!”
상상을 깨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루비카는 짜증을 참으며 다시 정확하게 떠올리려 애썼다.
“루비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곧 차갑지만 강인한 팔이 자신을 껴안는 걸 느꼈다. 남성의 팔이다. 루비카는 당황했다. 클레이모어 저택 내에서 감히 자신을 함부로 껴안는 남자가 있다니. 그녀는 유부녀다. 에드가와 그녀가 서로 진실하든 아니든, 아무나 자신을 막 껴안게 둘 수 없다. 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 자신을 갑작스레 껴안은 자를 밀치려 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에드가?”
자신을 안은 사람은 이 저택에서 그래도 되는 유일한 사람인 그였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왔는지 루비카의 머리 위로 그의 더운 숨이 쏟아졌다. 체온이 낮은 편인 에드가에게는 드문 일이다.
“다행이다.”
에드가가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진한 안도가 묻어나는 손짓에 루비카는 차마 떨어지라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있었어.”
그가 가슴 아프게 웃었다. 그도 이렇게 웃을 때가 있구나. 상처받은 듯이, 서글프고 안타깝게. 루비카는 가슴 한쪽이 찌르르 아파 왔다. 언제나 재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당당하고 강인하던 그가 불쌍하고 가련해 보였다. 꼭 그녀가 짐작할 수조차 없는 상처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 왕성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갑작스럽게 왜?”
침을 꿀꺽 삼킨 루비카는 화제를 전환했다. 그는 위험하다. 지나치게 유혹적이다. 그의 파란 눈에 걸려들어 또다시 자신의 이성이 마비되게 둘 수 없었다.
“그런 편지들이 날아왔는데 나보고 그냥 왕성에 있으라고?”
억양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미처 억누르지 못한 분노가 있었다. 루비카는 그가 가짜 임신 소동으로 화내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니, 아니야.”
겁먹은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에드가가 겁을 집어먹었다. 그녀는 변덕스러운 봄 날씨처럼 기분의 변화가 무쌍했다. 애원하듯 다정하게 루비카의 손을 잡은 그가 고개를 돌려 날카롭게 말했다.
“모두 나가게.”
엘리제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들과 함께 규방에 있던 동물들도 모두 데리고 나갔다. 평소에는 안 가겠다고 떼를 썼을 개들이 이럴 때는 눈치 좋게 굴었다. 아무래도 에드가의 목소리가 동물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으로 들린 듯했다.
“에드가, 갑자기 놀라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대책은 모두 세워 놨다. 주치의도 이미 포섭했다. 루비카는 차분히 대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녀가 벌인 일은 아니었고, 오해로 인해 빚어진 일이다. 앤에게 자초지종을 들으니 그런 오해를 살 만도 했다. 루비카는 그보다 마영석과 관련된 일이 걱정이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녀의 말에 에드가는 차분해지기는커녕 거친 목소리로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