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02화
“아.”
그제야 루비카가 카나의 말을 이해했다.
“게다가 보석을 달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안 좋은 걸 요상한 장식으로 메꾸려했다고 비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이 경우, 드레스가 예뻐서 눈에 띄는 건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와요.”
낭패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감이 많이 떨어지는 엘리제였다. 그녀가 그런 소리를 듣고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쩌지.”
“어쩔 수 없지요. 음, 아무래도 이 드레스는 지금 엘리제 시녀님이 입기에 무리인 것 같네요. 그분이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만한 무난한 것으로 디자인을 다시 해 올게요.”
“그래.”
루비카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카나의 디자인과 자신이 만든 매듭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카나는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밝게 꾸몄다.
“그보다 마님의 드레스는 어떻게 할까요?”
“아? 내 옷? 음, 아까 말했듯이 적당히 만들어 줘. 임부용 드레스를 맞추는 건 아직 이른 것 같아. 그건 배가 부른 다음으로 미룰게.”
카나는 미리 만들어 둬야 좋다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임신을 축하한다는 이유로 뵙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할 텐데…….’
루비카는 클레이모어 저택 별채나 가까운 영지에 기거하고 있는 친척들과는 인사를 나누었으나 아직 사교계나 정치에 영향력이 있는 대귀족들과는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마침 파종이 끝나 농민들을 숨 돌릴 수 있었고, 공작 부인은 임신했다. 이 좋은 기회를 귀족들이 놓칠 리 없다. 루비카는 그들을 만나고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 좀 더 좋은 드레스를 입어야만 했다.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하지만 공작 부인은 임신 사실을 공포한 지 얼마 안 돼 한참 정신없이 바쁠 만했다. 지금 같은 때에 주문에 박차를 가하는 건 좋지 못한 판단이었다. 카나는 엘리제를 위한 새로운 드레스 디자인을 가지고 올 때를 노리기로 했다. 그 때는 예쁘다는 이유로 덜컥 구매한 로열블루뿐만 아니라 루비카에게 더 어울리는 천을 가지고 공작저에 올 생각이었다.
“그럼 다음 주쯤에 드레스가 완성되면 연통하겠습니다.”
카나는 곱게 인사하고 짐을 챙긴 다음 규방 문을 나섰다.
“왈왈.”
카나가 나가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개 서너 마리가 규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산모가 강아지랑 어울려도 괜찮나?’
카나 같은 평민이야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못 되었지만 대귀족의 부인은 다르기 마련이다. 어떤 부인은 가문의 성화에 못 이겨 임신 이후 아이를 무사히 출산할 때까지 침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들었다. 또 어떤 가문은 부인이 어떤 질병에라도 걸릴까 두려워 아예 산속 깊은 별장으로 부인을 보내기도 했다. 그에 비해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무척 자유로운 편이다.
“엘리제 님은 시녀장님과 함께 응접실에 계십니다. 안내해드릴까요?”
기다리고 있던 건 짐승만이 아니었다. 하녀의 말에 카나는 그제야 엘리제가 떠나며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아, 짐이 많은데…….”
“그건 걱정 마세요. 시종이 미리 마차에 옮겨 둘 것입니다.”
시종이 각종 샘플 천과 장식을 가득 넣은 가방을 나르기 시작했다. 공작가는 사용인들의 교육이 무척 잘되어 있었다. 카나는 큰 걱정 없이 하녀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엘리제 님이 시녀장님과 함께 있다고 했으니 역시 비용과 관련된 일인가? 그럼 그냥 가기 전에 시녀장님을 보고 가라고 말하면 되지. 굳이 왜 자신을 찾아 달라고 한 걸까?’
알쏭달쏭했다. 예산의 실제적인 집행은 시녀장인 앤이 맡았다. 앤은 루비카의 앞에서는 사람 좋은 시녀장 그 자체로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루비카가 보석상이 권유하는 무척 값비싼 보석을 주문해도 그 앞에서는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에 상인을 따로 불러 원재료의 값과 시세를 비교하고 구체적인 액수와 지급기한을 정할 때 무서울 정도로 냉철했다. 공작가를 상대로 사기를 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대신 다른 귀족가들은 값비싼 물건을 잔뜩 주문하고 대급지금을 차일피일 미루거나 지급일이 한참 남은 어음을 발행해 주기 일쑤였으나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달랐다. 계약하자마자 재료값 명목으로 돈이 들어왔고 물건을 완성해서 공작저로 보내면 바로 대금이 지급되었다.
“시녀장님, 카나입니다.”
실제 그녀에게 볼일이 있는 건 앤이 아닐까 하는 카나의 짐작은 맞았다. 응접실에서 하녀들과 함께 산처럼 쌓인 선물을 정리하던 앤이 카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어머, 카나님. 볼일은 다 끝나셨나요?”
“네, 아직 임신초기라서 그런지 마님께서 드레스를 많이 주문하시지 않으셨답니다.”
평소의 앤이라면 이쯤에서 호들갑을 떨어야 했다. 루비카를 대신해 산모를 위한 옷을 잔뜩 주문하고 내친김에 카나에게 아이옷까지 잔뜩 주문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런가요?”
그러나 뜻밖에도 앤은 평소와 똑같았다. 그녀는 이제 눈물을 다 그치고 하녀들과 열심히 선물을 분류하고 있는 엘리제에게 명령했다.
“엘리제, 마님께서 규방에 홀로 계시니 먼저 올라가거라.”
“네.”
카나를 먼저 청한 엘리제는 미련 없이 들고 있는 상자를 놓고 응접실을 떠났다. 앤은 그런 엘리제의 뒷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처음에는 불안했는데 이런 일에 융통성 있게 처신할 줄도 알고, 많이 좋아졌어.’
눈물을 흘리며 내려와서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아직 십대후반 밖에 되지 않은 처녀에게 완벽함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불완전하기에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카나님, 이쪽에서 잠시 이야기해요.”
앤이 응접실 근처 조용한 곁방으로 카나를 안내했다.
‘단둘이 이야기 할 정도로 비싼 옷은 주문하시지 않으셨는데…….’
옷의 재료값이나 인건비에 한해서 하나도 속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응접실이 아닌 조용한 곁방에서 따로 이야기 하는 건 부담스럽다.
의자를 권하는 앤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카나는 반짝 긴장해 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몸으로 의자에 앉았다. 이상하게 지은 죄가 없음에도 켕겼다. 뭔가 실수라도 한 게 없는지 기억을 탈탈 털어보았다. 안타깝게도 하나도 짚이는 게 없었다. 아니, 이건 다행인가.
“오늘 마님께서 주문하신 옷은 많지 않으니 대금은 옷이 완성된 뒤에 지급하셔도 괜찮아요.”
지레 겁에 질려 카나는 자진 납세를 했다. 그러자 앤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마담.”
평소와 무척 다른, 낮은 목소리로 앤이 그녀를 불렀다. 카나는 딸꾹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공포스러웠다. 하지도 않은 횡령을 한 것 같은 심정이었다. 시녀장이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은 당장 이 자리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앤은 심각하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에 각하께서 보셨던 그 잠옷 말입니다.”
아, 설마 불경죄인가? 그때는 공작이 그 잠옷을 마음에 들어 했고 분위기가 썩 좋아서 넘어갔었다. 하지만 역시 공작 부인에게 그런 남사스러운 옷을 권하면 안 되는 거였다. 카나가 오들오들 떨며 사죄하려던 그때였다.
“스무 벌 정도 주문할 수 있을까요?”
“네에에에?”
“안 되나요? 그럼 일단 열 벌 할게요. 레이스나 색상 같은 건 좀 다르게 변형을 주어도 좋아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말하면서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체면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야하고, 섹시하게 만들어 주세요.”
카나는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대답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혹, 거절하려는 건가? 앤은 안달이 나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돈은 아끼지 않을게요. 마담이 부르는 대로 지급하겠습니다. 꼭, 꼭 주문을 받아 주세요.”
그리고 다음 목소리를 아주 작았다.
“다만 마님께는 비밀입니다.”
앤은 일단은 오늘 주문한 옷의 대금을 미리 치르는 식으로 재료비를 지급하고 완성된 날 모든 비용을 치르기로 했다. 장부에 제대로 기입했다가 루비카가 먼저 눈치 챌 수도 있었다. 그리고 루비카가 지난번 에드가에게 보인 태도를 보았을 때 그녀는 주문을 취소하고도 남았다. 앤은 완전 범죄를 꿈꾸고 있었다.
“레이스는 금방 찢어질 수 있을 정도로 얇은 최고급 샤르망제로.”
“그, 음. 샤르망제 레이스는 구하기 힘들어서 갑작스럽게 스무 벌은 힘들어요.”
“그럼 열 벌만이라도 가능한가요?”
“……네. 열 벌이라면 가능해요.”
카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누르며 앤의 주문을 받아 적었다.
‘그런데 산모한테 이런 옷을 입혀도 되나?’
불현 듯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카나는 그런 의문을 내뱉지 않았다. 열 벌이나 되는 화려한 잠옷의 대금이 그녀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 * *
클레이모어 공작저에 평화로운 시간이 감돌던 그 순간, 에드가는 지옥에 있었다. 마차가 달리는 내내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만약 그의 두 다리가 멀쩡했다면 그는 진작 마부 따위 치워 버리고 자신이 직접 마석마차를 몰았을 것이다.
‘루비카, 루비카.’
차마 소리 내어 외치지 못하고 그녀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렀다. 마차가 수도에서 막 벗어났을 무렵 그는 분노에 싸여 있었다.
‘임신을 했다니…….’
그리고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자신과 결혼했다. 하지만 에드가는 루비카에게 한 톨의 분노도 느끼지 못했다. 그를 화나게 한 건 그녀를 임신시키고 모른 척한 어떤 남자였다.
‘아르망, 그놈인가?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을 사랑한다고 말하다니. 에드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쥐고 있던 펜대를 부러뜨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놈을 찾아내서 눈앞에서 흠씬 두들겨 패 주고 싶었다. 그런 놈은 루비카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두 번 다시 이 땅을 밟을 수도, 맑은 하늘을 볼 수도 없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는 고문을 미개한 방식이라고 비웃었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그가 아는 모든 잔인한 방법을 다 동원해 아르망이라는 작자에게 그가 한 짓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를 알려 주고 싶었다. 세상에 감히 여인을 임신에까지 이르게 하고 책임지기는커녕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하다니.
‘나와 결혼을 해도 육체관계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한 건 이것 때문이었나. 아, 처음에 결혼 기한을 1년만 하자고 했던 것도…….’
모든 게 아귀가 척척 맞아 떨어졌다. 설사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 자리는 매력이 넘쳐흐른다. 그에게 대시하는 수많은 여자들이 단지 그의 미모에 홀려서만은 아닐 것이라고 에드가는 짐작했다. 그가 아무리 재수 없게 굴어도, 아무리 차가운 말로 상처를 줘도 공작 부인이 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넘쳤다. 하지만 루비카는 완고히 그를 거부했다. 못이기는 척 공작 부인으로서 모든 특권을 누려도 되는 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와의 결혼은 딱 주변 눈을 피할 정도로만 유지하고자 했다. 비록 그가 그녀에게 지참금 명목으로 돈을 챙겨 주기는 했으나 그도 반절을 뚝 떼어 사촌동생을 위해 신탁에 들었다. 5만 골드. 남에게는 무척 크게 느껴질 돈이었으나 그에게는 푼돈에 불과했다. 루비카는 고작 그딴 푼 돈 정도나 받고 이혼녀의 삶을 살고자했다. 그로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선택이었다. 아무리 좋은 미끼를 내밀어도 그녀는 완고하게 굴었다. 오늘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정절을 지키고자 한 거다. 상대는 그럴 필요가 없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내팽개친 쓰레기임에도 불구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울컥하고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곧 입 안에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울화인가.
‘바보 같은 여자.’
정말 바보 같은 여자이다. 처음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모른 척했다면 그는 분명 지금 루비카의 배 속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루비카는 클레이모어의 후계자를 낳은 명실상부한 공작 부인으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그에게 육체적 관계를 가지지 말자는 조건까지 내걸었다.
‘배 속에 아이가 있으면서 대체 왜! 왜!’
지나치게 정의로운 사람은 바보라더니 딱 루비카를 가리키는 말이다. 설마 그가 그녀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생길까 그랬나.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숨쉬기가 곤란해졌다. 루비카의 마음을 짐작 할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의 수가 있을지도 몰라.’
에드가는 마차 안에 준비된 차를 간신히 한 모금 마시고 심호흡했다. 진정해야 한다. 산모인 루비카는 지금 더 혼란하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런 그녀 앞에서 그가 진정하지 못하고 날뛰는 건 꼴불견이다. 그라도 정신을 차리고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최대한 온갖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그에 따라 최선의 대응책을 찾아내 행동해야한다.
‘설마 내 청혼을 받아들일 때 아직 임신한 걸 몰랐나?’
불현듯 떠오른 가능성이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가 왕성으로 떠날 때까지 루비카의 체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가리는 음식도 없었고, 헛구역질을 하는 현장도 발견하지 못했다. 주치의 또한 그녀의 건강상태에 대해서 별말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도 최근에야 임신 사실을 알았을 지도 모른다.
‘그럼 더 큰일이군.’
얼마나 걱정스럽고 얼마나 불안할까. 에드가가 지금 느끼는 고통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지금 그녀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겠지.
‘내가 속았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할 수도 있어.’
거기까지는 괜찮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아니다. 그녀의 불안은 에드가가 잠재울 수 있다. 설사 그녀가 임신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와 결혼할 때 내건 조건으로 그를 속일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그가 알고 있다고 말하면 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바로 그녀의 완고한 성격이다.
‘면목이 없다며 내가 도착하기 전에 저택을 떠날 수도 있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 그녀는 완고할 뿐만 아니라 행동력도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그날, 루비카는 짐을 싸서 도망을 치려했었다. 어쩌면 그 아르망인지 개르망인지 하는 놈을 찾아 가려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놈에 대한 정보를 내게 주는 것도 망설였지.’
그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누굴 사랑하든 말든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지긋지긋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아르망이라는 자에 대한 정보를 어물쩍 넘기는 그녀의 태도에 조금 짜증이 치민 건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