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01화
“앤이 많이 바쁜 것 같았는데 그만 가서 도와주렴. 나는 마담과 따로 이야기를 할 게 있구나.”
하지만 카나도 있는데 울고 있는 엘리제를 계속 여기에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엘리제 또한 감정을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엘리제에게 계속 자신의 시중을 들길 요구하는 건 너무한 처사 같았다.
“네.”
엘리제는 바로 루비카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애써도 눈물을 멈추지 않는 자신이 여기에 남아 있어 봤자 분위기만 망친다. 돌아가면 앤에게 혼날 것 같지만 엘리제는 혼나 마땅하다고 느꼈다. 시녀로서의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으니.
“참, 카나님. 일을 끝마치신 뒤에…….”
시녀장님을 찾아가라는 말을 하려던 엘리제는 ‘흡.’하고 입을 다물었다. 앤은 분명 그녀에게 루비카 몰래 카나를 불러 달라고 말했다. 실수에 실수를 거듭할 뻔했다.
“저를 찾아 주세요.”
“네, 걱정 말아요.”
대금 처리와 관련된 일인 줄 알고 카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돈 이야기를 공작 부인과 직접 이야기하기는 좀 그랬다. 엘리제는 눈물을 닦고 죄송하다는 말을 한 뒤 규방에서 물러났다.
엘리제가 떠난 뒤 루비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예쁜 옷을 입히고 싶었는데…….”
“본인이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요. 이 천으로 부인께서 입을 산책용 드레스를 만들어요. 산모라고 해서 집에만 있는 건 오히려 몸에 좋지 않답니다.”
엘리제는 디자이너의 본능과 욕구를 자극할 정도로 예쁘긴 했지만 카나의 고객은 아니었다. 그녀는 루비카를 위한 옷을 짓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카나는 바로 루비카에게 천을 권했다.
“이 천은 산책용 보다 무도회 드레스가 더 어울릴 것 같아.”
“저도 할 수만 있다면 무도회 드레스를 미리 짓고 싶어요. 하지만 부인은 임신을 하셨잖아요. 무도회 드레스는 사교계 시즌 즈음에 변한 체형에 맞춰서 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카나는 산책용 드레스에 적당한 다른 천들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루비카의 눈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미련이 남는 듯 로열블루 천을 쓰다듬었다.
“아, 어떻게 하면 엘리제가 예쁜 옷을 입어 줄까?”
엘리제는 지금도 처음에 비해서 상당히 예뻐졌지만 루비카에게는 여전히 부족했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데, 더 예뻐질 수 있는데 마음의 벽에 가로막혀 전진할 수 없었다.
“걔가 딱히 화려한 걸 싫어하는 취향도 아니잖아.”
엘리제는 입으로는 사치가 싫다. 죄악이라고 말하지만 루비카의 예쁜 브로치를 보면 눈을 반짝거렸다. 루비카에게 좀 더 예쁘고 화려한 걸 추천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착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얌전하고 소박하다는 이유로 자꾸 어울리지 않는 쥐색 옷을 입었다. 짧게 자른 앞머리를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으나 일하는데 보기 싫다는 핑계로 머리를 여전히 꽉 땋아 올렸다.
“왜 화려하고 예쁜 옷을 입는 걸 두려워하는 거지? 왜 꾸미는 걸 두려워하는 거지? 그렇게 예쁜데!”
루비카는 반쯤 흥분해 엘리제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어쩔 수 없지요. 저도 그 나이 대는 그랬어요. 그런 분홍색 드레스를 입으면 네가 예쁜 줄 아냐고 누가 말이라도 할까 봐 움츠러들고 괜히 주변 눈치를 보았지요. 특히 엘리제 시녀님처럼 못생겼단 취급을 받았던 소녀는 꾸미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하답니다.”
꾸미지 않으면 변명의 방패를 세울 수 있다. 하지만 한껏 꾸몄는데도 예쁘지 않다는 말을 들으면 그때는 더 세울 방패가 없다. 엘리제는 한참 외모에 관심이 많을 시기에 못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래서 예뻐진 이후에도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워 자신을 방어하고자했다. 간신히 있을 곳이 생겼고,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 사람들 앞에서까지 그녀는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이대로 꾸미지 않고 소박한 드레스를 입고 있다면 또다시 벽에 핀 꽃이 되어도 변명할 여지가 있다.
‘난 꾸미는데 관심 없어. 굳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싶지 않아. 눈에 띄지 않는 거야말로 내가 원하는 거야.’
그렇게 냉정한 체 하며 엘리제는 도망치고 싶은 거겠지. 루비카는 그녀의 마음을 반쯤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기에 엘리제가 아까웠다. 특히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엘리제를 좀먹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엘리제는 충분히 주변으로부터 사랑받고 또 찬양받아 마땅한 아이였다. 예쁜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는 또 얼마나 예쁜가.
“잘 꾸미기만 하면 사교계에서 주목받을 뿐만 아니라 여왕이 되고도 남을 아이인데…….”
“그건 저도 동의해요. 예쁘기도 하지만 다른 아가씨들에게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아가씨라 보는 사람을 한 눈에 매료시키지요.”
“방법이 없을까?”
“네?”
“엘리제의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
카나는 조금 당황했다. 보통 귀족부인들은 자신이 가장 눈에 띄길 바랐다. 옆에 있는 시녀가 관심을 모두 가져가는 걸 바라는 사람은 세상에 아마 없을 거다. 특히 젊은 부인일수록 그랬다. 그들은 사교계에서 찬양자들을 몰고 다니는 경향이 있었다. 결혼을 했으니 외간남자와 내외를 하는 게 당연했으나 그렇다고 갑자기 관심이 쏙 사라지면 섭섭한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시녀가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고 사교계의 꽃이 되길 바라는 건 노부인 정도였다. 그들은 젊고 어린 시녀를 옆에 끼며 손녀딸 보듯이 아끼고 사랑했다. 실제 그들의 시녀는 조카딸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이상해.’
지금 공작 부인의 행동은 젊은 부인보다는 노부인에 가까웠다. 엘리제에게 예쁜 천을 대며 눈을 초롱초롱 빛낼 때나 뭐 하나 쥐여 주지 못해 안달하는 게 그랬다. 엘리제의 행동에 대해서도 ‘아, 그렇구나.’하고 넘어가는 게 보통 사람이었다. 강단이 좀 있는 부인이었다면 네가 변변찮게 입으면 내 체통이 안 산다고 호통 치면 그만이었고, 그렇지 않은 부인은 아마 그녀를 무도회에 데리고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시녀의 마음이나 상처 같은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나. 하지만 엘리제가 혹시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어르고 달래고 안타까운 눈으로 보는 게 꼭 할머니 같았다.
‘워낙 마음씨가 고운 분이잖아. 내 사정을 듣고 전속 디자이너 삼겠다고 하신 것도 그렇고.’
카나는 자신의 비약을 곧 부정했다. 사람에 따라서 지나치게 일찍 철이 드는 경우가 있다. 또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철없이 굴기도 했다.
“제 생각에는 스토마커의 가슴장식이 문제인 것 같아요. 천의 색상 정도야 무도회 핑계로 그럴듯하게 설득할 수 있지만 보석은 아무래도 그분의 마음의 벽을 넘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긴 해요.”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역시 디자이너의 부인으로 몇 년을 산 세월은 어디 가지 않는다. 카나는 엘리제 나이 대의 아가씨들이 화려한 옷을 부담스러워 이유와 그들을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어쩌면 좋지?”
“차라리 이런 자수는 어떨까요?”
카나가 자수집을 꺼내 다양한 백합무늬를 보여 주었다.
“은사로 수놓으면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제법 예쁠 것 같아요.”
루비카는 푸른 천을 다시 한 번 보고 고개를 저었다.
“어울리지 않아.”
게다가 천이 얇은 편이여서 자수를 잘못 놓으면 쭈그러들 것 같았다. 스토마커는 천 아래에 솜으로 만든 심지를 대지만 기본적으로 재질이 자수에 어울리지 않았다.
“네, 그렇긴 해요.”
카나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자수를 권유한 건 차선책이지 로열블루 천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스토마커 장식을 밋밋하게 하는 건 가장 안 좋은 수였다. 천의 색이 강렬해 스토마커 또한 만만치 않게 화려하게 장식해 눌러주는 게 좋았다.
“보석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눈에 띄는 것.”
세상에 그런 수수께끼가 또 있을까. 그래도 루비카는 엘리제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디자인화를 노려보았다. 호리호리한 엘리제와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은 새파란 드레스. 그리고 파란색에 잘 어울리는 은색 장식.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무언가. 바람에 따라 팔랑이고 사람의 시선을 한눈에 잡아 두는.
‘언니!’
순간 환청으로 안젤라의 목소리를 들었다. 루비카의 손으로 처음 아름다움을 찾아 준 사촌 동생. 그 애와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아침, 루비카는 곱게 땋은 머리 위에 머리핀 대신에 매듭을 하나 만들어서 장식했다. 바람결을 따라 펄럭이는 천은 한 눈에 시선을 사로잡았고 까다로운 공주님인 안젤라마저 마음에 들어 했었다.
‘그 매듭!’
그걸 가슴에 장식하면 어떨까? 은색 천을 사용해서 가슴에 달면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반짝이겠지. 어쩌면 보석보다 더 눈부실지도 모른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몸이 절로 움직였다. 루비카는 의자에서 번쩍 일어났다. 그리고 카나의 공구함에서 천 가위를 찾았다. 은색 천은 아쉽게도 없었지만 은사를 섞어 반짝이는 하얀 천이 있었다. 루비카는 매듭을 만들기에 적당할 만큼 천을 널찍널찍하게 잘라냈다. 그리고 잘라진 부분이 드러나지 않게 천을 삼등분해서 접은 다음에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카나가 말릴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안젤라의 머리에 장식한 매듭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크기는 세배 정도 되는 것이 완성되었다.
“부인, 이건?”
“스토마커에 이걸 장식하는 건 어때?”
카나는 조용히 루비카가 만든 매듭을 보았다. 가구의 모서리나 커튼을 묶을 때 종종 이와 비슷한 매듭으로 장식할 때가 있긴 했다. 아주 간혹 소매 장식으로 쓰는 경우는 있었으나 옷의 전면에 그것도 스토마커의 장식에 쓰인 적은 없었다. 무척 파격적인 시도였다. 하지만-
“예쁠 것 같아요.”
루비카가 만든 매듭은 카나가 여태 본 어떤 매듭과도 달랐다.
“그렇지? 아예 은색 천으로 만들면 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일 거야.”
“네, 게다가 이걸로 스토마커를 장식하면 엘리제 시녀님의 장점을 살리면서 체형의 단점을 보완해 줄 것 같아요.”
엘리제는 호리호리하고 긴 체형이 매력적이었다. 대신에 볼륨이 적은 편이었다. 사내처럼 밋밋한 가슴은 엘리제의 고민 중 하나였다. 판판한 스토마커에 아무리 보석 장식을 달아 봤자 볼륨감이 있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입체적인 매듭은 달랐다. 엘리제의 체형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해 줄 수 있었다.
“가장 위쪽에는 큰 것, 그 다음에는 중간 크기, 그 다음에는 작은 것을 달면 밸런스도 좋겠네요.”
“그렇지?”
“아예 디자인을 이렇게 바꿔 보는 게 어떤가요?”
카나는 오랜만에 무척 신이 났다. 사라진 줄 알았던 그녀 안에 열정이 불타올랐다. 그녀는 펜을 꺼내 디자인화 옆에 공간에 새로운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오늘 들고 온 스케치 북의 디자인화는 모두 루비카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다. 엘리제에게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것이 따로 있었다.
“소매 끝에는 가장 작은 매듭과 비슷한 크기를 달아요. 레이스보다는 은사로 자수를 놓은 프릴로 그 부위를 장식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네요.”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루비카는 완성된 드레스를 떠올릴 수 있었다. 화려하기만 할 뿐아니라 고혹적인 드레스였다. 루비카는 당장 그 옷을 입은 엘리제를 보고 싶었다.
“만들자! 내가 어떻게든 엘리제를 설득해 볼게.”
루비카의 눈이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이럴 때는 꼭 눈이 적갈색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과 비슷한 새빨간 루비 같았다. 하지만 방금까지 루비카와 비슷하게 타올랐던 카나는 맞장구를 치지 않고 애매하게 웃었다.
“하지만 너무 파격적이에요.”
“그래도 예쁘니 괜찮지 않을까?”
루비카는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사교계에 대해서는 몰랐다. 그저 어렴풋할 뿐이었다. 루비카는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남작과 준남작 정도가 참석하는 파티에 두세 번 가 봤을 뿐이었다. 그런 파티들은 그야말로 사교의 장이었다. 오직 젊은 남녀의 교제를 위해서만 열렸다. 루비카는 사교계의 가장 밝고 좋은 면만 알았지 진면모는 몰랐다. 그 안에 어떤 음모와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녀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녀는 거친 선원과 악한 군인을 만나 봤다. 하지만 악함은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놀랍게 변모시킬 수 있었다. 사교계의 악마에 대해서 루비카는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 카나는 잘 알고 있었다. 값비싼 드레스와 사교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디자이너들을 고위 귀족의 옷을 맞추기 위해 이 저택, 저 저택 오가며 소문을 들었다. 그녀의 죽은 남편은 종종 그런 소문을 카나에게 알려 주었다.
-파티의 드레스 코드가 바뀐 걸 후작 부인이 몰라서 큰 망신을 당했다더군.
-세상에, 포트만 백작 부인이 무척 미안해했겠어요.
남편이 목소리를 낮춰 카나에게 귀띔했다.
-사실을 무척 기뻐했다네.
-네?
-그 일을 꾸민 게 포트만 백작 부인이었거든.
그리고 디자이너 또한 그런 음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떤 디자이너가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면 그와 관련된 온갖 소문이 의상실을 타고 흘러넘쳤다. 어떤 귀족부인들은 그런 거짓소문을 진지하게 믿고 디자이너와의 거래를 끊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시도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어요. 이 매듭은 무척 예쁘고 엘리제 시녀님에게 어울리지만 결국 천으로 만든 거잖아요? 설사 은사로 만든 천이라 할지라도 값어치로 따지자면 보석을 따라잡을 수 없어요.”
“하지만 이 드레스가 보석을 주렁주렁 단 드레스보다 훨씬 예쁠 거야.”
순진한 루비카의 말에 카나가 고개를 저었다. 루비카는 아직 사교계의 속성에 대해서 모른다. 그저 아름다운 것만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아무리 예쁜 아가씨라도 지참금이 넉넉하지 않으면 외면을 받는다. 예쁘기만 하면 여자의 인생이 백팔십도 바뀐다는 건 남자들의 만들어 낸 환상이다.
“보석이 많이 달리지 않으면 그 드레스가 얼마나 예쁜지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아요. 보석을 달 형편이 되지 못했나 보다 하고 수군거려요. 아무리 좋은 천을 써도, 아름다워도 남루한 드레스가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