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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00화 (100/212)

# 10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00화

에드가가 정신없이 마차를 달리고 있던 그때 루비카도 제 나름대로 매우 바빴다. 갑작스런 임신 선언으로 일어난 일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 앤과 대책을 세우느라 정신없었다. 다행히 주치의는 자신이 누구에게 충성해야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한두 달 뒤 루비카가 유산한 것처럼 일을 꾸미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언제 유산할지, 그동안 의심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깊이 논의했다.

그래서 에드가에게 자초지종을 밝히는 전서구를 조금 늦게 보냈다. 조련사의 말에 의하면 친척들의 축하 편지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겠지만 그래도 얼마 늦지 않게 도착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루비카는 별 걱정하지 않았다. 임신 소식에 에드가가 깜짝 놀라기야 하겠지만 그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남자였다. 수도에서 열일 제쳐 두고 황급히 영지로 내려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이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 주치의랑 나, 엘리제 정도만 아는 걸로 하자. 엘리제에게도 아무 말 하지 말라고 이야기 해 뒀어.”

“마님, 정말 죄송합니다.”

앤은 자신 때문에 힘든 일을 짊어져야하는 루비카에게 몇 번이고 사죄했다.

“괜찮아, 앤. 대신 입단속 잘해야 해. 솔직히 주치의보다 당신이 더 걱정이야.”

“네.”

오래 공작가에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는 공작가 사람들의 건강 상태를 외부에 흘린 일이 없었다. 입의 무거움을 따지자면 앤이 더 걱정이었다.

임신 소동은 사실 좋은 점도 있었다. 먼저 마영석과 관련된 항의 방문이 싹 줄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식구들은 성격이 고약했고 성격이 고약한 사람들은 대개 눈치가 빨랐다. 누가 제 성질을 받아 줄지 계산한 다음에 패악을 부려야 했기 때문이다. 루비카가 아들이라도 낳으면 그녀의 출신에 상관없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명실상부한 공작 부인이 된다. 물론 가문과 상관없는 귀부인들로 득실득실한 사교계야 그런데 상관하지 않겠지만 클레이모어 친척들은 상관있었다.

“포트만 자작 부인께서 선물을 보냈습니다.”

“질레한 부인께서 보낸 약재가 도착했습니다.”

처치 곤란 수준으로 선물이 쏟아졌다. 그 중 제일 곤란한 선물은 임부복이나 아기를 위한 양말, 수건 등이었다. 산모에게 좋은 약재나 음식은 나눠 먹을 수나 있었지, 무슨 정성인지 문장까지 수놓은 아기 옷은 누군가에게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인께서 피부가 무척 예민하셔서 카나 의상실에서 만든 임부복 이외에는 입기 곤란하십니다. 아기 옷은 각하와 상의 후 마련할 예정이랍니다.”

이 일에 책임을 느끼고 있던 앤이 핑계를 만들어 냈다. 소문은 바람을 타고 갔는지, 새와 쥐가 옮겼는지 선물 목록에서 임부복이 싹 사라졌다. 앤은 루비카 몰래 아기 옷을 챙겨 놓았다. 언제가 쓸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게 그녀의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거사를 위한 준비 물품을 앤은 알고 있었다.

‘각하께서 마음에 들어 했던 그 잠옷.’

아무래도 그걸 주문해야겠다. 앤은 괜히 주변 사람의 의심을 사는 일을 피하는 게 좋겠다는 핑계로 카나를 불렀다. 그러나 정작 앤은 임신 축하 선물을 분류하고 답장을 준비하느라 루비카와 카나와의 대화에 낄 수 없었다.

“엘리제, 마님을 시중 들다가 마담 카나가 돌아갈 때쯤 날 보러 가라고 귀띔해 주겠니?”

“네.”

대신 엘리제에게 부탁했다. 앤은 그녀를 그대로 보낼까하다 다시 불렀다.

“꼭 마님이 보지 않을 때 귀띔을 해야 해.”

엘리제는 도도하고 새초롬한 생김새와 달리 우직하다. 상세히 지시하지 않으면 그녀는 루비카가 보는 앞에서 카나에게 크고 당당한 목소리로 “시녀장님이 잠깐 뵙고 싶다고 합니다.” 라고 외칠 것이다. 루비카가 카나를 왜 따로 불렀냐고 물으면 앤은 참 곤궁해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네.”

어딘가 켕기는 느낌이 들었지만 엘리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앤에게 다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카나와 함께 있는 루비카를 시중하러 갔다.

공작가의 전속 디자이너가 된 카나는 이제 딱딱한 면담실이 아닌 규방에서 루비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루비카는 규방의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그녀를 맞이했다.

“마님, 축하드립니다.”

카나가 제 일처럼 기뻐하며 루비카의 임신을 축하했다. 루비카는 무척 민망했다. 하지만 카나에게 진실을 고백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몸을 조심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산책도 꾸준히 하시는 게 좋아요. 너무 집 안에만 있으면 오히려 우울해진답니다. 이따금 외출도 하시는 게 좋아요.”

이미 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카나는 진심을 다해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아직은 배가 안 불러서 굳이 실내복을 주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네, 당분간은 낙낙한 옷만으로도 충분하실 거예요. 하지만 한두 달 정도만 흐르면 금방 배가 불러올 테니 빨리 주문하시는 게 좋아요.”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루비카는 초기 임산부를 위한 드레스 디자인이 담긴 스케치를 건성건성 넘겼다. 대충 구색을 맞추는 정도로만 주문할 예정이었다. 다행스러운 건 그 디자인은 평소 입던 옷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한두 달 입은 다음에 수선을 하거나 진짜 임산부에게 물려주면 좋을 듯 했다.

“이거랑 이거.”

“네, 네.”

루비카는 대충 무난한 디자인으로 건성건성 골랐다. 카나는 붉은 펜으로 루비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디자인을 표시하고 루비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루비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부인, 끝단의 자수나 레이스는 어떤 걸로 할까요? 목에 두를 장식은 옷 색에 맞추는 게 좋을까요? 레이스를 같은 것으로 쓰는 게 어떨까요?”

“아, 응. 대충 어울릴만한 것으로 해 줘.”

카나는 깜짝 놀랐다. 대충 어울릴만한 것으로 해 달라니. 그건 정말이지 루비카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녀는 옷을 주문할 때 카나리아가 노래하듯 이것저것 참견하고 의견을 냈다. 자그마한 문양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대충 어울릴만한 것’이라니. 정말 루비카답지 않았다.

“그럼 일단 제가 어울릴만한 것으로 추려 볼게요. 참, 천은 무엇으로 할까요?”

카나가 준비해 온 천을 꺼냈다. 카나는 루비카에게 받은 대금으로 조수를 고용하기보다, 다양하고 좋은 수입 천을 샀다. 지금은 제 한 몸 편한 것보다 좋은 재료를 구입해서 사실상 유일한 고객인 루비카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싶었다.

그런데 다른 때였다면 천을 꺼내자마자 감탄을 내지르며 구경했을 루비카가 오늘은 반응이 없다. 심지어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 채였다.

“아? 아.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

“네. 요즘 좀 정신이 없으시지요. 자, 이 천 어떠세요?”

카나가 쨍한 푸른빛의 천을 펼쳤다. 광택이 자르르 흐르는 천은 햇살에 따라 빛을 바꾸었다. 손에 묻어나올 것 같은 파란 빛에 루비카가 감탄을 내질렀다. 역시 이 마님은 예쁜 것에 약했다. 아까 그녀가 여전히 멍했던 것은 자신의 디자인이 눈을 사로잡을 정도로 뛰어나지 못해서다. 카나는 좀 더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기로 다짐했다.

“이런 색은 처음 봐.”

“네, 색소가 무척 비싸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실 분들이나 쓸 수 있었던 색이에요. 그래서 로열블루라고 부른 답니다.”

깊은 바다에서 가장 진하고 아름다운 파랑만 뽑아 만든 듯한 색이었다. 루비카는 천을 들어 올려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지나간 자리마다 짙은 파랑의 잔상이 남았다. 산책용이나 실내용 드레스로 만들기에 아까울 정도로 예뻤다. 이런 아름다운 천으로 만든 드레스는 무도회가 어울린다. 무도회의 불빛 아래에서 움직일 때마다 생동감 있는 푸른색이 흘러넘쳐 많은 사람들의 눈에 각인되겠지. 왕국이 들썩거릴 정도로 그 아름다움에 대해 찬양하고 기억을 더듬어 묘사하는 이가 넘쳐 날 것이다. 그저 클레이모어 저택 내에서만 입고 ‘오늘 마님이 입은 드레스가 참 예뻤지.’ 정도의 말만 듣고 끝내기에는 천이 너무 아까웠다.

“엘리제가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아.”

본심이 툭 튀어나왔다.

“네?”

갑자기 호명되자 엘리제가 당황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실 먼 사막과 바다를 건너 도달한 그 천을 보았을 때 카나는 루비카보다 엘리제를 먼저 떠올렸다. 누가 입어도 아름다울 색이지만 특히 엘리제에게 잘 어울렸다.

“그렇지?”

루비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황하는 엘리제의 어깨에 천을 올렸다. 엘리제의 새하얀 피부와 푸른 천이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꼭 유명한 화가의 그림 속에 그려진 여신이 갓 걸어 나온 듯했다.

“여기에 가슴 장식을 화려하게 잔뜩 다는 게 좋을 것 같아. 격자무늬로 진주를 수놓고 가운데에 빨간 루비로 단추를 다는 게 어떨까?”

엘리제가 기겁했다. 마님이 또 큰일 날 소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 돼요!”

“하지만 그게 네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넌 밋밋한 옷보다 색이 짙고 장식이 많이 들어간 옷이 잘 어울려.”

엘리제도 그걸 알고 있다. 그녀에게도 눈이 있었다. 루비카나 그녀 곁에 있는 유능한 하녀들이 권하는 대로 입고 꾸미면 자신이 봐도 놀랄 정도로 아름다워졌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컸다.

“천도 비싼데 장식까지 그렇게 다는 건 지나쳐요.”

“내가 살게. 사교계 시즌이 되면 나는 무도회에 나가야 돼. 내가 싫다고 거절할 수 있는 자리들이 아닐 거야.”

사실 루비카는 싫다고 거절하기는커녕 열리는 파티마다 족족 참석할 예정이었다. 수도 사교계에서 열리는 무도회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내 시녀인 너도 함께 가야 하는 거 알지?”

“……네.”

“참석하는 무도회마다 네가 같은 드레스를 입으면 내가 웃음거리가 될 거야.”

그건 확실히 그랬다.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 정도 되어서 자기 시녀의 옷차림조차 챙겨 주지 않는다면 세간에 인색한 공작 부인이라는 평을 듣기 쉬웠다. 인색이라니. 절대 피하고 싶은 평가였다.

루비카는 엘리제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도회 드레스를 제 힘으로 맞출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제 곁의 사람을 챙기는 것은 귀족 부인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루비카는 무도회가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엘리제의 아름다움에 주목할 수 있도록 화려한 드레스를 많이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니 네게 드레스를 선물하는 건 날 위한 일이기도 해. 엘리제, 더 이상 거부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말의 내용은 엘리제의 현실을 거칠게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루비카는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그 상냥함에 엘리제의 서슬이 죽었다. 그녀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건 너무 색깔이 화려하고 보석이 많이 달렸어요.”

“돈은 걱정하지 마. 다들 가슴에 이 정도 장식쯤은 달아. 이 디자인화를 봐. 격자 문양으로 진주랑 루비를 많이 달아서 그렇지 알이 그렇게 크지 않잖아? 게다가 단추형식이니 다른데 옮겨 달수도 있어서 경제적이고 좋아.”

루비카는 열성적으로 변론했다. 하지만 엘리제의 얼굴에 빛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화려한 보석이 잔뜩 달린 드레스는 저랑 어울리지 않아요. 저는 얌전한 드레스가 좋아요.”

산을 넘으니 또 산이 나타났다. 루비카는 쥐색 드레스를 입은 엘리제를 바라봤다. 지금도 나쁘지 않다. 어깨가 구부정하고 소심했던 처음의 엘리제에 비하면 허물을 벗은 그녀는 엄청난 변신을 이뤄 냈다. 하지만 엘리제는 그보다 더 예뻐질 수 있다. 루비카는 이제 막 꽃 피기 시작한 그녀를 더욱더 찬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왜 그녀는 자꾸 본인의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드레스가 어울린다고 주장하는 걸까.

할 수 없다. 엘리제가 강경한 만큼 루비카도 강경하게 나가기로 했다.

“엘리제, 왜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안 어울릴 거라 단언하니? 나는 네가 이정도 옷쯤은 입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무척 어울릴 거야. 사람들이 다 널 보고 예쁘다고 칭찬할 거라고 내가 보증할게. 그렇지 않으면 내게 따져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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