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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99화 (99/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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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99화

부정하기 힘들다. 아무리 아니라고, 내가 사랑에 빠졌을 리 없다고 읊조려도 소용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고 자신이 한 행동을 곱씹어 보니 그는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요.”

그것도 자신을 사랑할리 없는 여인에게.

“빌어먹을.”

입에서 절로 욕지기가 올라왔다.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그도 모른다.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되었는지,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지 그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물러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고통을 겪을 리 없었겠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처할 일이 없었겠지. 할 수 있다면 시간을 돌려 그녀를 만나기 전, 그녀를 알기 전으로 돌리고 싶다.

“제기랄.”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이제 그녀를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지금도 그는 이렇게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운 와중에,

“루비카.”

그녀가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녀를 봐야 이 혼란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 * *

수도 저택의 하녀들은 영지와 달리 오래 고용된 자들이 아니었다. 1, 2년 정도 일한 다음에 소개장을 들고 더 많은 돈을 주는 다른 귀족의 저택으로 옮기는 일이 잦았다. 덕택에 오히려 영지보다 하녀들을 다루기 쉬웠다. 그들은 공작이 예민해 그가 있는 동안은 3층은 얼씬도 말라는 말을 충실히 지켰다. 덕택에 칼은 수도에서는 영지보다 좀 더 편안하고 여유로울 수 있었다. 영지에서는 혹 다른 하녀가 올지 몰라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 공작의 상태를 점검하고 그를 집무실의 휠체어에 앉혔다. 그러나 수도에서는 그럴 필요 없었다. 그는 내리 이틀을 해가 뜰 때쯤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이 아침을 준비하는 것과 비슷한 시간에 공작의 시중을 들었다. 여유로운 그에 비해 공작은 하루하루 초조해 보였다.

“국왕이 회의를 하루만 더 연장하자고 하더군.”

어젯밤 에드가는 저택에 돌아와 거칠게 소매 단추를 풀며 내뱉었다. 그는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다. 당초 예상에 수도에는 이틀 정도만 머물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마영석 건을 에드가의 뜻대로 밀어 주는 대가로 이것저것 다양한 요구를 해대기 시작했다. 에드가는 애가 탔다. 당장에라도 영지에 내려가고 싶었다. 그의 친척들은 고약하다. 그리고 자신이 전통 깊은 클레이모어의 일가라는 사실을 내세우길 좋아했다. 루비카의 고운 마음에 어떤 식으로 생채기를 낼지 몰랐다. 루비카는 자신이 시작한 일이니 감당하겠다고 말했으나 역시 걱정스러웠다. 그는 내려가서 빨리 그녀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려면 국왕의 칙서가 필요했는데 그 늙은 너구리는 에드가를 마음껏 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작, 이 건은 어떻게 생각하나? 국무대신이 상하수도 개선안을 내놓았는데 내가 눈이 침침해서인지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

뻔뻔하게 서류를 내민 국왕에게 에드가는 서류 뭉치를 집어 던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반백인 국왕의 시력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보다 좋았다. 그는 에드가에게 단순히 서류상의 계산을 체크해 달라고 종이를 내민 게 아니었다. 훨씬 더 좋은 개선안을 내놓을 때까지는 갖은 핑계를 대고 그를 수도에 붙잡을 속셈이었다.

“칼, 내일 내로 이 건은 모두 처리할 테니 준비해 놔.”

“걱정 마십시오.”

칼은 지난밤 과거 하수도의 지도와 상태, 최근 수도관이 어떤 식으로 증설되었는지, 인구의 증감과 관련된 서류를 미리 다 찾아 공작의 서재에 준비해 두었다. 아침에 즐기는 10분의 여유를 위해 저녁을 1시간쯤은 희생하는 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는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나 잠깐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긴 다음에 공작의 방으로 갈 생각이었다.

“집사님! 집사님!”

그런 그의 여유를 노크 소리가 다 깼다. 칼은 침대 위에서 간신히 일어났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한참 잘 시간에 누가 그를 이리 괴롭히나. 그는 짜증을 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문을 열었다.

“집사님!”

문밖에 있는 자는 전서구를 관리하는 하인이었다. 순간 잠이 달아났다. 야밤에 무슨 급서가 날아왔기에 이리 호들갑인가.

“무슨 일입니까?”

“영지에서, 영지에서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편지요?”

시일을 계산해 보았을 때 지금 도착하는 편지는 공작이 영지 저택을 떠난 당일날 부치지 않고서야 도착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것도 무척 빠르고 훈련이 잘된 전서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대체 무슨 일이?”

“게다가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입니다. 여러 곳에서 동시에 왔어요.”

마영석을 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항의인가. 마님께서 잘 방어를 하셔서 이쪽에 화를 내기로 결정했나 보군.

칼은 밀려오는 잠에 하품을 했다. 별일 아닌 것으로 자신을 부른 하인이 야속했다.

“아침에 정리해서 각하께 올리겠네. 뭐, 그리 급한 일이라고.”

“매발톱 때문에 편지 한 장이 찢어져서 본의 아니게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집사님,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인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이었다. 야밤에 사람을 깨울 정도로 보통 일이 아니라면 촉각을 다툴 정도로 큰 일이 대부분일 텐데 하인은 즐거워서, 너무너무 즐겁고 기뻐서 이 기쁨을 누군가에게 나누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처럼 보였다.

“보통일이 아니라니?”

“마님께서 임신하셨습니다! 잔뜩 온 건 모두 축하편지입니다.”

그 말에 칼은 잠옷 차림으로 튀어나 갔다.

“자네 편지를 가지고 오게!”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미 다 가지고 왔습니다.”

하인이 내미는 편지를 급히 잠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창문을 확인해 보니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소식을 전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전하는 게 나았다. 해가 뜬 뒤에는 그의 주인이 무언가 결정을 내리려면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 많았다.

“각하, 각하!”

칼은 손목에 피가 나도록 공작의 방문을 열었다. 곧 진하게 잠이 묻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급, 급한 일입니다. 마님과 관련된 일입니다.”

벌컥, 번개 같은 속도로 문이 열렸다. 잠기운이 싹 달아난 에드가가 칼에게 호통쳤다.

“루비카가? 루비카가 어디 잘못되기라도 했는가?”

짧은 시간 온갖 불행한 망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떠나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나중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그녀 곁을 떠나는 게 아니었다.

“각하. 마님께서 어딘가 잘못된 건 아닙니다. 다만 마님이, 마님이…….”

칼이 차마 제 입으로 말을 잊지 못했다. 루비카가 어딘가 잘못된 건 아니라는 말에 에드가는 안도했다. 동시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어딘가 다친 것도 아픈 것도 아닌데 이 야밤에 대체 그를 왜 불렀나.

“무슨 일인가. 말을 똑바로 하게.”

덜덜 떠는 손으로 칼이 하인에게 전달 받은 편지 뭉치를 에드가에게 내밀었다. 에드가는 눈살을 지푸렸다. 핑크색, 노란색, 하늘색 알록달록한 편지는 긴급한 내용보다 무언가를 축하하는 카드에 가까웠다.

“보십시오.”

칼의 재촉에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손으로 에드가가 편지를 펼쳤다. 이윽고 드러난 단 한 문장에 에드가는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루비카는 정말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을 선보였다.

「각하, 공작 부인의 임신을 축하드립니다.」

“임신, 임신이라니…….”

결단코 그는 루비카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질 만한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양심을 걸고 맹세해도 좋았다. 첫날밤 그녀를 곁에 두고 타오르는 욕망과 싸우며 밤을 지새웠다. 그거 터럭하나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 그녀가 임신이라니.

“각하, 경하드리옵니다.”

슬금, 차마 3층으로 올라오지는 못하고 눈치를 보며 계단에 있었던 하인이 한마디 했다.

“꺼져!”

칼과 에드가가 동시에 소리쳤다. 하인이 깜짝 놀라 도도도 계단 아래로 도망쳤다.

“칼, 당장 마차를 준비해. 영지로 내려간다.”

“국왕 전하와의 회의는 어찌하겠습니까.”

“취소한다. 당장 전갈을 보내.”

에드가는 잠옷을 벗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해가 뜨기 전 그는 마차 안의 좌석에 앉아야 했다.

“알겠습니다. 각하, 조속히 준비하겠습니다.”

대충 바지와 셔츠만 챙겨 입고 에드가는 급히 아래로 내려가 마석마차에 탔다. 어느새 칼이 마차 안에 그가 쟈켓과 넥타이를 준비해 두었다.

“마부, 당장 출발해!”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외쳤다. 마부가 마차를 출발하는 순간, 먼동이 텄다. 에드가는 저려 오는 발을 끌어 간신히 마차안의 의자에 앉아 숨을 거칠게 쉬었다.

‘임신이라니.’

그의 아이가 아니다. 그의 아이였으면 좋겠지만……그의 아이일 리 없다. 분명 다른 사람의 아이이다.

‘루비카.’

그래서였나. 그래서 그리 망설였나. 그래서 그가 아무리 그녀를 유혹해도 매몰차게 그에게서 등을 돌렸나.

‘아르망, 그 새끼.’

결혼 전 조사에 따르면 루비카는 따로 만나는 사람이 없었다. 짐작 가는 곳은 그녀가 말한 사랑한다는 아르망이란 그 자뿐이었다. 어떤 놈일까. 어떤 놈이 길래 제 아이를 가진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갔는데 연락 한 장 없는 걸까. 그가 아르망이라면, 그가 아르망이라면 절대 이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다.

‘찾아내서 죽일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루비카가 그를 미워할 수도 있다. 그를 떠날 수도 있다.

‘……어쩌지.’

가장 두려운 생각이 덜컥 들었다.

-에드가, 미안해요.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지고 당신 곁에 있을 수 없어요.

그녀가 그를 떠나는 광경. 상상만으로 심장이 저릿했다. 가장 두려운 건 그녀가 염치가 없다는 이유로 편지 한 장만 남기고 그의 얼굴도 보지 않고 저택을 떠나는 거다. 루비카의 고고한 자존심과 신념을 생각했을 때 그녀는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

“마부! 빨리, 좀 더 빨리 마차를 달려.”

“네, 각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영지로 달리는 내내 에드가는 심장이 저릿저릿했다. 그는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 소식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지 못했다. 한 장도 아니고 여러 장의 축하편지가 왔다는 건 그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다.

정확히 네 시간 뒤, 모든 것이 오해임을 밝히는 루비카의 편지를 발목에 묶은 전서구가 도착했으나 그는 이를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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