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96화
게다가 에드가를 보기에 면목이 없다. 그는 얼마나 황당한 표정을 지을까. 그러나 오해를 풀기에는 너무 먼 강을 건너오고 말았다. 지금 여기서 아니라고 말해 봤자 더 큰 소동만 일어날 뿐이다.
“조심해서 돌아가시게.”
정신이 모두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없다. 루비카는 간신히 한줌 남은 정신을 끌어올려 인사를 했다. 모두 나가고 난 후 앤이 황급히 담요를 가지고 와 그녀의 아랫배에 둘렀다.
“마님, 고생하셨어요.”
앤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루비카가 임신했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한 엘리제는 혼란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기가 태어날 거란 소식은 모두를 기쁘게 하고도 남았다.
“앤, 대체 왜 그런 말을 한거야?”
“마님,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죠? 이제 더는 숨기지 말아요. 사실 저는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답니다.”
뭘 처음부터? 애초에 임신하지 않았는데?
“이제 결혼하시고 날짜도 좀 지났으니 이제는 밝혀도 명예에 지장이 없을 거예요. 정말, 각하께서는 섬세함이 부족하다 못해 배려심이 간 밖으로 튀어 나갔나 봐요. 그런 일을 치고 왕성으로 가 버리시다니……. 산모이신 마님께 너무 하세요.”
친척들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한 게 아니었다. 앤은 정말로 루비카가 임신했다고 믿고 있었다. 루비카로서는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힌 상황이었다.
“앤, 잠시 진정하고 잘 들어요.”
루비카는 심호흡을 했다. 흥분한 앤을 달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이 더 틀어지기 전에 바로 잡아야 한다.
“나는 임신하지 않았어.”
“네?”
“정 의심스러우면 주치의를 불러 와.”
앤이 사색이 되었다.
“마님, 그, 그런…….”
“내가 정말 임신했다면 주치의가 자네에게 일러줬겠지.”
공작저택에 있을 때 루비카는 주치의를 두서너 번 만났다. 그때마다 그는 루비카의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앤은 임신 사실에 대해서 주치의가 말하지 않은 건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세상에, 그런, 그런.”
사고를 쳤다. 그것도 제대로 쳤다. 앤은 실성한 것처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마님, 죽을죄를 지었어요.”
틀림없이 임신한 사람만 할 수 있는 행동이라 여겼던 것이 이제와 생각해 보니 누구든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배 위에 쿠션을 올리거나, 달고 신 음식을 많이 먹거나 모두 굳이 임신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아, 수습을 어떻게 하지.”
루비카도 머리가 아팠다. 하녀들이나 시종들 앞, 하다 못해 에드가 앞에서 앤이 루비카가 임신했다고 선언했다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었으리라. 재빠르게 오해라고 밝히고 앤이 사과하면 되었다. 하지만 하필 앤은 친척들이 여럿 모인 곳에서 루비카가 임신했다고 선언했다. 인사하고 나간 친척들은 당장 이 소식을 주변에 알리리라. 그중 대부분은 별채에 기거하고 있었다. 별채에는 많은 친척들이 산다. 삽시간에 루비카가 임신했단 소문이 날 것이다..
“마님, 지금이라도 제가 그분들께 제 착각이었다고, 오해였다고 밝히겠습니다.”
“그건 안 돼!”
만약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당장 이상한 오해를 한 앤을 시녀장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셰니에 부인 같은 친척이 시녀장이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모든 부인이 앤처럼 루비카에게 친절할 리 없다. 앤은 예산을 잡을 때도 루비카에게 조언 정도 하는 걸로 그쳤다. 다른 부인이었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잔소리를 하며 그들의 뜻대로 굴러가게 만들 수도 있었다. 실상 셰니에 부인도 그런 시도를 했다.
“그렇게 되면 앤, 당신이 곤란해져. 일단 주치의를 부르자.”
루비카의 적갈색 눈동자가 긴밀히 움직였다. 다행히 면담실의 문은 닫혀 있었다. 지금 이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앤과 엘리제밖에 없었다.
“주치의를 불러 사정을 말해 당분간 내가 임신한 것처럼 연기를 해 달라고 하자.”
앤은 루비카가 자신을 보호하러 마음먹었다는 걸 눈치챘다. 미안함과 감동이 앤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앤의 회색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졌다.
“죄송합니다. 마님.”
“괜찮아, 앤 어떻게든 수습할 테니까.”두 달 정도 지난 뒤 루비카는 의사와 짜 유산을 한 것처럼 꾸밀 생각이었다. 앤과 엘리제가 자신의 편이니 못할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런 소동을 벌이면 앞으로 임신을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물음표가 자신에게 붙겠지만 루비카로서는 알 바 아니었다.
‘아, 그렇네.’
앤은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금방 루비카의 말뜻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고 말았다.
‘마님께서 빨리 임신하시면 되잖아!’
그럼 훨씬 수월하다. 아이가 일찍 나온 것에 대해 변명할 필요도 없다. 개월을 꽉 채우다 못해 더 머물고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도 많았다. 이 경우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마담 카나를 빨리 불러야겠어.’
앤은 얼마 전 에드가가 보고 호기심을 나타냈던 잠옷을 떠올렸다. 그녀는 루비카와는 영 딴판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 *
-공작, 산맥에서 채굴되는 마석의 양이 점점 줄어 들고 있네.
왕성에서 수도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에드가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고한 국왕의 말을 되씹었다. 머리가 반백이 된 국왕은 에드가가 어린 시절부터 그를 아꼈던 왕이다. 비록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할지라도 국왕은 제 나라와 국민을 위할 줄 아는 이였다.
-5년 뒤에는 마석이 아예 고갈될 수도 있네
국왕은 차마 왕세자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라의 사정을 에드가에게 토로했다. 에드가는 그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버팀목이었다.
“그리되면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겠지.”
그리고 에드가는 저주에 걸렸다. 그는 이제 무릎 위까지 다리가 굳었다. 언제 어느 때 심장까지 저주가 올라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해.”
방법이라면 하나 있었다. 더 풍부한 마석이 매장되어 있는 세리스 산맥 위쪽을 개발하는 것. 그러나 그쪽은 잠들어 있는 드래곤 이베르의 권역이었다. 드래곤의 권속들을 결코 제 주인의 고요한 잠을 방해하는 인간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안 돼.”
두 번째 방법은 세리토스 왕국 바로 옆에 있는 황금 평원을 개발하는 것. 하지만 황금 평원은 사납고 욕심많기 그지 없은 드래곤 이오스의 권역이었다. 그 드래곤은 지독히도 성격이 더럽고 예쁘고 좋은 것을 밝히기로 유명했다. 그는 희귀하고 값비싼 과일이 열리는 평원을 차지해 인간이 그를 탐하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협상 따위로 평원의 귀퉁이를 내줄 드래곤이 아니었다.
“…….”
에드가는 꽉 접힌 미간을 꾹 눌렀다. 그의 삶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왕국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돌파구를 찾아내야 한다. 그가 죽는 건 아무렇지 않았으나 죄 없는 왕국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척박한 땅에서도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세리토스의 왕국민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았다.
“그 방법뿐인가.”
에드가의 눈이 가늘어 졌다.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는 그도 모른다. 하지만 딱 하나, 아래로도 위로도 드래곤 때문에 꽉 막힌 이 상황을 타계할 방법이 있었다.
바로 길목을 막고 있는 드래곤의 죽여 없애는 것.
에드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드래곤처럼 강한 존재를 그가 죽여 없앨 만한 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드래곤은 포악하고 사납지만 구역 생물로 자신이 자리 잡은 둥지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인간에 관심이 없었다. 사나운 드래곤과 직접 싸워 봤자 수많은 사상자를 낼 뿐이다. 그리고 드래곤의 둥지에는 드래곤이 있어야만 날 수 있는 식물과 광물이 있었다. 괜히 드래곤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느니 몰래 몰래 드래곤의 둥지에 들어가 드래곤이 품은 값비싼 물건이나 도둑질하는 게 수지에 맞았다. 그래서 누구도 드래곤과 싸우는 걸 시도하지 않았다.
문제는 드래곤의 자리 잡은 위치였다. 세리토스 왕국은 위로는 추운 북극의 얼음에 막혀 있었고, 동쪽은 잠든 드래곤 이베르, 남쪽은 포악한 드래곤 이오스에 막혔다. 그나마 서쪽의 항로만이 그들의 숨통을 틔웠다. 그러나 이도 거래할 물건이 있을 때 이야기였다. 마석이 더는 채굴되지 않는다면 대체 어느 나라가 저 멀리 구석에 박혀 있는 세리토스 왕국에 밀 따위를 수출할까.
‘드래곤을 쓰러뜨려야 해.’
무모하지만 그 방법 밖에 없다. 에드가는 자신이 엄청난 도전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처음 마물을 해치우는 무기를 만든 클레이모어의 선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가 하는 소리를 들어 주지 않았으며 누구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그와 함께 왕국을 세운 그의 친우인 기사마저도 반신반의하며 원정단을 꾸렸다.
‘황금 평원의 이오스를 쓰러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들어 있는 드래곤 ‘이베르’에 대한 것은 일단 제쳐 두었다. 그 신비로운 드래곤에 대한 정보는 너무 부족했다. 약점도 강점도 잘 모르는 적을 무찌르기 위한 무기를 생각해내는 건 아무리 그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반해 이오스는 현재도 활동하는 드래곤으로 정보가 많았다. 은근히 뽐내는 걸 좋아하는 이오스는 가끔 인간으로 모습을 바꿔 사람들 틈에 나타나 아름다운 여인을 홀려 납치해가는 걸 즐긴다는 소문도 있었다.
‘일단 하늘 위에서 공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오스는 지룡이다. 그래서 하늘을 날지 못한다. 하늘 위에서 폭격을 퍼붓는다면 아무리 이오스라고 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용의 불길이 닿지 못하는 높은 곳까지 떠오를 수 있는 무기를 만든다면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각하, 저택에 도착했습니다.”
고민하는 사이 저택에 도착했다. 아직 하늘 위에 별이 반짝였다. 오늘 국왕과 한 이야기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국왕은 그의 간단한 안부와 신혼생활이 괜찮은지 저주의 단서를 찾았는지 물었다.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 그냥 평범한 여인 같았다고?
-아직은……그렇군요.
-그럼 그 여인과 굳이 결혼 생활을 유지할 필요가 있나?
국왕이 지나가듯 한 말이 못내 신경 쓰였다. 에드가는 아직 알아 가는 와중이니 좀 더 기다려 달라고 말하며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었다.
“뭐? 마영석을 찾는 걸 그만두겠다고?”
친척들이 아침 해가 뜨자마자 루비카를 찾아오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왕성행을 취소하지 않은 데는 이 목적도 있었다. 그는 국왕의 동의를 얻고자 했다. 괜히 지지부진하게 가문 내 싸움을 계속하는 것보다 이게 나았다.
“반발이 심할 텐데…….”
“전하, 차라리 한참 토벌산업중인 페트라 왕국에 신무기 지원을 하는 게 어떤가요? 대신 대가로 토벌된 땅에 대한 수익이나 소유권을 요구하는 겁니다.”
국왕의 눈이 번쩍였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어쨌든 국왕 입장에서 공작가 내부의 복잡한 싸움에 전통의 손을 들어 주는 것보다 당장 지금 내 나라를 보살피는 게 우선이었다. 게다가 공작도 그의 편이니 이보다 좋은 일이 더 있을 리가.
‘내일 회의는 되도록 빨리 끝내고 영지로 돌아가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