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95화
여인을 설득할 때는 부인이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해서 읊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질레한이 친척들 사이에서 유력인사가 된 것은 그의 수많은 능력 중 입담이 월등했기 때문이었다. 에드가는 다루기 힘든 사내였으나 이제 막 공작 부인이 된 루비카는 고작해야 스물두 살. 게다가 시골 출신이었다.
“부인의 미덕은 남편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귀부인의 지침서’에 나와 있습니다.”
별로 좋아하는 문구는 아니었으나 루비카는 질레한에게 대항하기 위해 수많은 귀족 여인들의 필독서의 이름을 대었다.
“남편의 뜻에 따르는 것만이 과연 좋은 것일까요? 나쁜 일을 막아야 합니다. 부인, 마영석을 구하려면 지금부터 빨리 모험가들을 보내야 합니다. 이미 계약금을 받고 준비를 하고 있는 모험가들이 있습니다. 갑작스레 계약을 취소하면 그들이 어찌 나올지 모릅니다.”
루비카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아직 마영석을 구하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자세한 사항까지는 알지 못했다. 공작가의 일은 너무 많고 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큰돈이 드는 일은 친척에게 일임하고 부인은 저택에 달린 커튼의 색이 계절에 맞는지 체크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여기 있는 친척들은 모두 마영석을 구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지.’
그리고 일을 맡은 친척들이 오가며 소개료를 받고 돈을 슬쩍슬쩍 하는 것이 당연해서 문제 삼을 건덕 지조차 없는 일로 여겨졌다. 생계가 달린 일이니 필사적이다. 대충 하소연이나 들어 주고 끝낼 수 없었다.
“각하가 오시면 다시 의논하겠네. 질레한 경, 설사 내가 남편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먼저 남편에게 이를 따르지 않겠다고 고해야 할 의무가 있네.”
“부인! 그러실 때가 아닙니다.”
질레한이 일부러 눈에 힘을 주고 루비카를 바라봤다. 루비카는 그가 기 싸움을 하려는 걸 알았다. 도발에 넘어가 같이 눈에 힘을 주는 멍청한 짓 따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그녀가 삶을 살면서 목격한 슬프고 가슴 아픈 장면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이런 연기에 타인을 위해 희생한 고귀한 이들을 이용하게 되어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대신 쓸데없이 사람이 죽는 일을 막을 수 있으니 그분들도 이걸 싫어하지는 않겠지.
먼저 포탄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제 동생을 지키려 몸을 날렸던 아이가 떠올랐다. 그 다음에는 죽어 가는 와중에도 아기에게 젖을 물리려 했던 어미. 네 가족을 위해 기꺼이 군대에 자원했던 가장.
전쟁은 사람의 가장 사악한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반면에 인간의 가장 선한 면모 또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채 10초가 되지 않아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경, 내가 남편의 사랑 외에는 기댈 데가 없는 한미한 가문 출신인 걸 고려해 주게.”
면담실에 북극에서 이는 것 같은 바람이 지나갔다. 이미 주변의 친척들은 세상에 이런 쓰레기가 다 있냐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질레한은 아차 싶었다. 부인이 자신에게 뒷배가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이렇게 이용할 줄은 몰랐다. 아니, 이용이란 건 좀 지나친 생각이다. 자신이 부인을 너무 압박주기는 했다. 확실히 후작가나 백작가처럼 든든한 뒷배가 있는 여인이라면 에드가에게 대들 수 있긴 했으나……, 루비카는 남작가도 아닌 준남작가 출신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드가, 이놈 이런 식으로 하려고 유력가 출신의 부인을 기피한 거냐.’
에드가는 여태 들어오는 혼담을 그냥 다 거절했을 뿐이었지만 질레한은 제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원래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일단 여기서 후퇴해야 하나?
하지만 이렇게 물러나고 내일 또 오기가 영 겸연쩍었다. 어쨌든 공작을 가장 압박할 수 있는 것이 공작 부인인데 루비카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했다. 질레한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루비카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부인, 부인은 이제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명실상부한 공작 부인입니다. 공작가의 전통과 역사를 지켜야 할 의무가…….”
“질레한 경!”
못 참고 소리를 지른 건 앤이였다. 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질레한 경을 쳐다보았다.
“적당히 하시지요.”
경고였다. 질레한은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고 손에는 땀이 고였다. 앤은 클레이모어의 오래된 시녀장으로 결코 입김이 작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영석을 구하는 일은 한시라도 바삐 진행되는 게 좋았다. 빨리 진행되어야 그가 돈을 받는다. 모험자들에게 전액을 지불하기 전 그는 은행에 그 돈을 잠깐 넣어 두고 생기는 이자를 착복했다. 불법도 아니고 횡령도 아니다. 그저 그의 잔머리를 이용해 낸 수익이었고, 그의 아이디어이니 그 정도쯤은 가져도 된다고 여겼다. 오래전에 그는 찝찝한 마음 따위는 버리고 그 정도 돈쯤은 수고비로 받아도 된다고 생각한지 오래였다. 마영석을 구하는 일이 차일피일 미뤄지면 질레한은 큰 손해를 본다. 원래 그의 돈이 아니었으나 그는 그걸 손해라 여겼다. 커피하우스에서 소소하게 열리는 도박이나 내기에 내야 할 돈도 있었고, 그가 따로 투자는 사업대금도 내야 했다. 빨리 마영석을 구하는 일이 추진되어야 그 돈을 낼 수 있다.
‘아무리 클레이모어에서 오래 일한 시녀라고 해도 결국 그냥 시녀에 불과하지 않나. 그동안 예산안을 쥐락펴락하는 시녀장이라 눈치를 봤지만 이제는 아냐.’
돈은 사람에게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해석하게끔 하는 판단력과 무모한 행동력을 준다. 그는 고작 시녀장 따위에 밀려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앤, 나는 공작가의 친척으로서 바른 소리를 해야 할 의무가 있네.”
“더 이상 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세요!”
앤이 면담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쳤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하녀 보듯이 질레한을 볼았다. 그는 문득 억울해졌다. 저 정도의 눈빛을 받을 정도로 그가 못할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아니, 설사 그렇다고 해도.”
“부인께서는 어제 눈물까지 흘리며 각하를 설득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말을 듣지 않은 건 각하였어요. 따지려면 각하께 따지시지 왜 애먼 부인을 데리고 난리입니까.”
질레한이 입을 다물었다. 옆에 있던 다른 친척이 앤이 지나치게 그를 몰아간다 느꼈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앤, 우리는 부인께서 하셔야 할 일에 대해서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따지는 게 알려드리는 건가요?”
다들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정작 공작 부인인 루비카는 아까부터 소파에 앉아서 그냥 슬픈 표정만 짓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들의 주장을 좀 더 밀어붙이려면 공작가에서 오래 일해 함부로 대하기 힘든 시녀장이 아니라 새파랗게 어린 공작 부인이 좀 더 쉽다. 하지만 그 옆에는 집 지키는 개처럼 엘리제가 우뚝 서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키가 큰 엘리제가 선선대 공작 부인의 옷을 입고 서 있는 건 꽤 위협적이었다. 루비카에게 한마디라도 잘못 건네면 돌아가신 마님이 엘리제에게 빙의해 그들의 뺨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았다. 앤은 모든 불만을 눈앞에서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이건 지나친 과보호잖아.’
앤의 말대로 불만을 말하려면 일을 친 에드가를 찾아가는 게 맞긴 했다. 하지만 이 중에 에드가가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는 불만을 말하면 아무 말 없이 그 말을 다 들은 다음에 불만을 말한 친척들의 횡령과 탈세를 비롯한 비리를 모조리 다 알아내어 관청에 신고하거나 이를 빌미로 더한 걸 뜯어내고도 남을 자였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공작 부인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거나 압박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었다.
“부인, 시녀를 물려주시겠습니까?”
질레한이 결국 참지 못하고 큰 패를 꺼냈다.
“그게 무슨 소리지요?”
앤이 정색해서 그에게 반문했으나 그는 이를 무시하고 루비카만 바라보았다.
“집안일이니 따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말이 바깥으로 새어나갈까 두려우니 시녀를 물려주십시오.”
“안 돼요!”
앤이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면서 외쳤다. 루비카는 그동안 가만히 소파에 앉아서 북치는 친척들 옆에서 뿔피리를 불다 못해 징까지 치는 앤을 봤다. 아침에 각오한 것이 허망해질 정도로 앤이 친척들의 공격을 다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앤의 치맛자락 안에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는 맞닥뜨릴 일이라면 일찍 마주치는 게 나았다.
“아니야. 앤, 질레한 경께서는 내게 정당한 요청을 하셨어. 내게 긴밀히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는데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잠시 자리를 비워 줘.”
“마님…….”
앤의 마음이 미어졌다. 그녀 또한 질레한과 다른 친척들의 술수를 짐작하고 남았다. 사실 그들은 아침나절이리 일찍 들이닥친 것은 당황한 것도 있지만 에드가가 공작저를 비운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큰일이라도 해도 정도가 있지.’
앤은 분노를 느꼈다. 루비카는 그들이 이렇게 멋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술수를 보고도 뒤로 물러날 수 없었다.
“저는 못 물러나겠습니다.”
“앤!”
“이게 무슨 무례요.”
앤은 루비카의 말도 듣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그녀는 루비카의 눈밖에 났다. 그럴 바에 그냥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여러분께서 혼자 남은 마님께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데 제가 어찌 자리를 비우겠습니까? 저는 마님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각하께서도 제게 부탁했습니다.”
“앤, 아까부터 보자보자 하니 너무 하는 군. 우리가 부인을 잡아먹기라도 하오? 부인께서는 다 큰 성인이시오. 우리가 대체 뭘 하 길래……이건 너무 과보호요.”
“마님은, 마님은……. 크게 놀라는 일 없이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지금도 산모가 겪기에는 너무 과한 스트레스를 여러분께서 주고 계시다구요.”
억울한 듯 소리치는 앤의 말에 루비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놀란 것은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산……, 지금 뭐라고 했소? 앤? 산, 산모라고?”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숨길 게 뭐가 있나. 어차피 결혼식을 올린 뒤 좀 되었다. 루비카의 배가 아직 안 불러온 걸 보았을 때 개월 수는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출산일이 빨라 속이기 힘 들어도 신이 축복을 받아 아기님이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장성하고 튼튼하다고 입을 놀리면 될 일이었다.
“마님께서는 각하의 아이를 가지고 계시다구요!”
앤이 눈을 꼭 감고 외쳤다. 순식간에 면담실은 패닉에 빠졌다. 그중에서 제일 당황하고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루비카였다.
‘내가 임신했다고?’
루비카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말이 안 되잖아?’
그녀는 에드가와 입맞춤 몇 번 했을 뿐이다. 그런 일로는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앤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 그런. 임신을 하셨다니……. 일단 축하드립니다.”
“아, 아니.”
루비카는 아니라고, 오해라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너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축하드립니다.”
“……산모를 상대로 저희가 너무 지나쳤군요.”
“몰라서 그런 것이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친척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사과하며 눈치를 보았다. 앤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럼 부인께서는 안정을 취해야 하니 모두 나가주세요.”
그 말에 모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루비카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설마 일부러? 하지만 이 순간을 벗어나려고 한 거짓말이라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커. 게다가 이런 거짓말은 나중에 더 힘든 일만 불러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