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94화
“전에……, 이거 말고 다른 것들이었지만 거기에 쓰인 루비가 공작 부인이 할 만한 게 아니니 그냥 똑같은 걸로 만들라고 했었거든.”
백작 영애니 남작 수준이니 운운한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이야기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새삼 떠올리니 화났다. 그는 그게 어머니의 유품인지 모르고 꺼낸 말이라고 해도 정도가 지나쳤다. 설사 그게 그냥 평소에 쓰던 물건이라 해도 세월이 흐르고 추억이 담긴 것을 그냥 똑같이 만들기만 하면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무척 소중해서 그냥 옆에 간직하고 싶었어. 모두 모른 척해 줄래?”
하녀와 엘리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카는 한시름 놓고 반지를 바라봤다. 오늘따라 아르망이 지독히도 그리웠다. 매일 진수성찬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그와 함께 감자나 호호 불며 먹었던 그때가 더 행복했었다.
“마님, 이제 화장만 하시면 되어요. 오늘은 무슨 향수가 좋을까요?”
하녀가 먼저 활기차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모두 반지 같은 건 언제 봤냐는 듯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피에르 공방에서 새로 나온 향수, 그게 좋아.”
루비카가 반지를 서랍에 다시 넣으며 활기차게 대답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사정을 알게 된 이상 하녀들이 반지를 먼저 발견하고 치우거나 누군가에게 고하는 건 아닌지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어쩌면 적당한 상자를 마련해 열쇠를 채우고 보관하게 될지도 몰랐다.
* * *
“공작 부인께서는 아직이오?”
질레한이 반쯤 식은 커피를 내려다보며 질문 했다. 벌써 열 번째다. 앤은 미소 하나 없이 답했다.
“오늘 마님께서 면담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을 하지 못해서 미처 준비를 하지 못했답니다. 다 여러분을 격식 있게 모시기 위해 그러시는 것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질레한의 볼이 씰룩거렸다. 준비? 고작 얼굴 좀 내밀고 이야기 나누는데 준비할 게 뭐가 있나. 분이나 좀 바르는데 시간이 이렇게 소비하는데 짜증이 났다. 분명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공작 부인은 그를 비롯한 다른 사람을 놀리는 게 틀림없었다.
‘순해 보이기 짝이 없는 여자가 할 때는 하나 보군.’
가문 내 유력인사 중 하나인 질레한은 루비카가 공작 부인이 되자마자 그녀와 인사를 나눴다. 루비카에 대한 그의 인상은 ‘평범하다’였다. 딱 시골에서 갓 올라온 한미한 가문 출신이 가질 법한 언행을 했다. 촌스럽지는 않았으나 선선대 공작 부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옷을 아무렇지 않게 입고 말을 나누는 걸 들었을 때 큰 욕심이 없어 보였다.
-그분 만만치 않아요.
공작 부인을 상대로 쓸데없는 물건을 팔려다 실패한 이가 그리 말했으나 질레한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수는 얼치기들이나 속을 만큼 너무 얕았기 때문이다. 이후 세사르에게 투자를 결정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그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괜히 가르치려 드는 사람보다 솔직한 태도로 하소연하는 게 더 잘 먹히는 타입인가 보군.’
순진해 보인다는 평가는 그 때에도 버리지 않았다. 솔직함과 절실함에 무너져 그리 큰돈을 쓰는 건 순진하지 않고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셰니에를 쫓아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도 셰니에를 싫어했다. 또, 별채를 구석구석 수리하고 그중 사정이 안 좋은 엘리제 솔라나를 자신의 시녀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옳거니 했다.
‘좋은 공작 부인 소리를 듣고 싶어 안달 난 상태구만!’
그래서 공작의 잘못된 결정에 항의하러 왔을 때 그는 루비카가 그들을 공손히 접대할 줄 알았다. 친척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별채까지 수리한 여자다. 버팀목이 없는 부인은 소문이나 체면에 신경 쓰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정작 도착하니 푸대접이었다. 이건 자신이 그들보다 훨씬 높은 신분이며 누구를 면담하지 말지는 그녀의 결정에 따른 일임을 완곡히 알린 것이다.
‘벌써 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나.’
질레한은 아까부터 차가운 표정으로 음식을 나르고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앤을 힐끗 바라봤다. 앤은 일개 시녀가 아니라 클레이모어 가문의 한 사람으로 함부로 대하기 어려웠다. 그와 함께 온 친척들도 내미는 아침식사를 군말 없이 먹고 면담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갑작스레 오시는 바람에 대접할 것이 별로 없군요.”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접시 위는 정말 허전할 정도로 별 것 없었다. 공작가의 특성상 언제 어느 때에 손님이 오더라도 풍성히 대접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게 보통이었다. 아까부터 앤은 대놓고 푸대접이었다. 그녀의 기세에 눌려 처음에는 불같이 화를 냈던 이들도 수그러들었다.
‘곤란하군.’
에드가가 식탁에서 한 깜짝 발언은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것으로 금방 별채에까지 소문이 났다. 별채에는 마영석을 찾는 일과 관련되어 이득을 보거나 소득을 올리는 자들도 살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말을 밤새 몰아 질레한에게로 와 소식을 전했다. 침대에서 자고 있던 질레한은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공작저로 튀어 왔다.
‘이 일에 달린 입이 얼마인데…….’
그리고 그 입에는 질레한도 속해 있었다. 그는 모험단이 이동하는 내내 먹는 식량 같은 필수품을 제공하는 일을 주선했다. 그 일은 그의 일 년 치 수입의 대부분이라 해도 좋았다. 올해는 게다가 에드가가 결혼하고 맞이하는 첫해이니 정말 희귀하고 대단한 마영석을 구하기 위해서 모험단을 대대적으로 조직하는 게 어떻겠냐는 소리를 할 참이었다. 좋은 핑계거리가 있으니 한탕 단단히 챙길 예정이었다.
‘그런데 한탕은커녕 쪽박을 차게 생겼으니…….’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이 드디어 기다리던 소리를 들려줬다. 모두 안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레한도 선뜻 일어나 기다렸다. 잠시 후 딸깍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먼저 들어온 소녀의 모습에 질레한의 눈이 커졌다.
새파란 드레스는 그의 눈에도 익었다. 대대로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부인은 아름다웠다. 선선대 공작 부인은 그중에서도 미모로는 순위를 다툴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그 파란 드레스를 입고 나온 소녀의 앞에서는 그녀의 모습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키가 크고 날씬한 소녀를 감싼 드레스의 새파란 색감은 고개를 살짝 든 소녀의 도도한 분위기에 신비로움을 덧붙였다. 거기에 소녀가 걸을 때마다 반짝이는 보석은 그녀를 어딘가 부유한 왕국의 공주님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풍성한 금발머리와 대조적으로 짧게 자른 앞머리는 동글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소녀는 응당 그 나이 대 애들이 어른을 만날 때 하는 꾸밈없는 미소나 쑥스러운 표정대신 도도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경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꼭 다른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보기 위해 태어난 듯 했다. 오히려 그 차가운 태도에 경탄하고 아름다운 여신이라 찬미하고 싶을 정도였다.
언제 이렇게 예쁜 아이를 시녀로 들인 거지?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기억에 없었다. 분명 얼마 전에 엘리제 로안 드 솔라나를 시녀로 들였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질레한은 그 불쌍한 소녀에 대해서 잘 안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클레이모어 공작저에 딸을 부탁하라고 조언한 게 다름 아닌 그였다. 그러나 굳이 그이상의 일은 하지 않았다. 공작저에 적응을 잘못한 듯 엘리제는 볼 때마다 불안한 눈동자를 하고 말라갔으나 객식구 생활을 하려면 그 정도 힘든 것쯤은 감수해야지 싶어서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딱 하나 걱정되는 건 있었다.
‘못생겨서 시집가기 힘 들겠군.’
그래서 솔라나 부인에게 딸의 미래를 위해서도 낭비하지 말고 지참금을 꽉 쥐고 있으라고 했다. 솔라나 부인은 질레한의 말을 받아들여 딸에게도 사치하지 말라고 종종 말하며 아끼고 또 아껴 지참금을 모으고 있다고 들었다. 루비카가 솔라나 양을 시녀로 들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질레한은 내심 기쁘고 안도했다. 엘리제는 돈도 없고, 예쁘지도 않았다. 앞으로 좋은 남자 만나기는 글렀다고 여겼다. 차라리 공작 부인의 시녀같은 자리를 잡아 평생 먹고 살 걱정 없이 사는 게 안정적이고 또 좋았다.
하지만 루비카를 공작 부인의 의자에 안내한 뒤 물러나는 소녀에게 하는 앤의 말에 질레한은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엘리제, 마님을 안내하느라 수고했구나.”
이어지는 앤의 말에 질레한은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솔라나라고? 쟤가…… 쟤가 엘리제 솔라나라고?’
그는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리고 뒤에 선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주눅 들고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의 시선을 살폈던 엘리제는 더는 없다. 그녀는 무척 도도한 표정으로 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른 자세로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키가 다른 아이들보다 큰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커서 압도적인 느낌을 낼지 몰랐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지독히도……
‘이거 완전 예쁘잖아.’
완벽했다. 얼굴도, 머리도, 자세도 완벽했다. 너무 놀라 공작 부인인 루비카에게 항의하러 왔다는 것조차 잊었다. 그건 다른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제는 시녀가 되기로 결정된 뒤 쭉 본관에 있었다. 그러나 채 일주일이 되지 않는 기간이었다. 그 짧은 새에 미운 오리 새끼 같았던 그녀가 이처럼 근사한 백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엘리제의 변화에 너무 놀라 그들은 그만 아무 소리도 못하고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각하께서 내린 결정에 모두 너무 놀라 아침바람부터 달려오느라 고생했네. 나도 정말이지 깜짝 놀라 어제는 어떻게 잠을 잤는지…….”
그 타이밍을 루비카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이 공격적으로 굴기 전에 말을 먼저 꺼냈다. 그리고 한숨을 한번 쉬고 눈가를 어루만졌다. 자신이 잠을 하나도 자지 못했다는 어필이었다.
“때문에 여러분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제대로 대접하지 못해 미안하네.”
묘하게 탓하는 어조이다. 하지만 사과하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저희야말로 갑작스레 찾아와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부인, 이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차례 항의가 이어지고 루비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각하께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중이네.”
그리고 잠시 침묵이 면담실에 내려왔다. 부인도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말했다니 뭐라 더 할 말이 없다. 결정을 내린 공작은 이미 이 자리에 없다. 처음의 흥분은 많이 가라앉았다. 다들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공작 부인은 죄가 없다. 그런데 이 자리에 앉아서 항의를 듣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아침댓바람부터 쫓아와서 아침 식사도 거나하게 얻어먹었다. 진짜 내려오는데 시간이 걸린 것은 푸대접이 아니라 본인도 잠을 설쳐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부인께서 저희와 뜻이 같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뜻이 같지 않다. 루비카는 최대한 그들을 따돌려 에드가의 결정이 번복될 수 없는 순간이 오길 기다릴 심산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옅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들 그 미소를 동의의 뜻으로 받아 들였다.
“그럼 다들 너무 동요하지 말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길 바라네.”
이만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다들 눈치를 보며 일어섰지만 질레한은 가만히 있었다. 모험가를 모집하려면 시기가 중요하다. 봄 한철을 놓치면 그들은 아마 다른 곳과 계약을 해 버릴 것이다. 하루 빨리 예산이 집행되어야 한다. 질레한은 고집 세고 다루기 힘든 에드가를 제쳐 두고 루비카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부인, 원래 마영석과 관련된 예산은 각하께서 다루시는 내역이 아닙니다. 각하의 결정은 명백한 월권입니다.”
질레한의 지적에 다들 반색했다. 루비카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각하께서 이제 마영석은 본인 소관으로 하시기로 했네.”
“하지만 본디 정원을 꾸미는 일과 관련된 부인의 고유한 권리입니다. 부인, 예산의 집행권은 여전히 부인에게 있습니다.”
올 것이 왔다. 루비카는 이 중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한탄했다.
“하지만 각하의 의견을 내가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
“부군께서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는 것이 현명한 부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