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92화
“제가 한 입 먹으면 마님도 드실 건가요?”
밥투정을 하는 아이를 달랠 때 하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말을 하고 아차 했다. 루비카가 어찌 이런 경우도 없는 소리를 하냐고 자신에게 화를 낼 것 같았다. 하지만 이 특이하신 공작 부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눈을 반짝였다.
“그래 줄래?”
그래 주다니 뭘?
“자, 자. 여기 접시랑 음, 포크랑 칼 가지고 와. 냅킨은?”
루비카는 추진력이 있었다. 그녀는 엘리제가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았다. 하녀들은 당황하면서도 루비카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엘리제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엘리제는 울상이 되었다. 그런데 루비카는 뭐가 그리 기쁜지 생긋 웃으며 어서 옆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였다. 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예의범절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받았던 모든 교육이 엘리제에게 그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엘리제, 응?”
엘리제가 한참을 망설이자 루비카가 재촉하였다. 그래도 요지부동이자 점차 루비카의 안색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가 완전히 실망하자 엘리제는 정신을 차렸다.
루비카가 처음 그녀를 꾸며 주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녀는 엘리제가 셰니에 부인이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운운한 세상의 도덕이나 관념과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서 옳지 않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꾸몄다. 엘리제는 내내 두려웠다. 다 꾸민 자신이 천박한 여인으로 보이지 않을까 무서웠다. 하지만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은 긍지 높고 도도해 보이는 귀족 소녀였고, 이후 친구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중요한 건 마님이야. 마님이 한입이라도 더 밥을 먹게 하는 거야. 도덕이나 예절 같은 건 결국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잖아? 그걸 지키느라 정작 마님을 즐겁게 하지 못한다면 그런 본말전도가 어디 있어?’
크나큰 스트레스 앞에 엘리제의 머릿속이 제멋대로 돌아가 버렸다. 셰니에부인의 교육 덕에 그녀는 얌전히 눈치보는 소녀가 되었지만 나이는 한참 세상의 도덕에 반기를 들고 싶은 10대 후반. 그녀는 덜커덕 의자에 앉아 버리고 말았다.
“제가 먹으면 마님도 먹는 거예요.”
선언하자 루비카의 눈이 기분 좋게 휘었다.
“응, 네가 먹으면 먹을게.”
황급히 루비카가 엘리제에게 오믈렛의 반을 잘라 접시에 건넸다. 그리고 엘리제가 먹는 동작을 따라 자기 몫의 오믈렛을 먹었다. 잔뜩 휘저어 부드럽게 만든 계란과 섞인 농후한 치즈의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맛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없이 맛있다. 식욕이 한없이 솟구쳤다. 루비카는 바쁘게 숟가락을 움직여 오믈렛을 먹었다. 그 모습에 엘리제는 안도했다. 하지만 여전히 앉은 자리가 불편하고 당장 일어나고 싶었다. 마님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시녀라니……. 하녀들 보기에 심히 부끄러웠다.
‘빨리 오믈렛만 먹고 일어나자.’
그때 루비카가 엘리제의 접시에 아스파라거스와 콩을 적당히 구운 요리를 올렸다.
“이거, 한번 먹어 봐. 오믈렛이랑 같이 먹으면 정말 맛있어.”
맛있는 음식을 서로서로 권하건 즐거운 식사에 꼭 필요한 행동 중 하나였다. 게다가 루비카는 태생이 누군가를 돌보고 챙기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표정에 엘리제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
“……마님.”
“제발, 혼자 먹기 너무 아까워서 그래.”
엘리제는 하는 수 없이 루비카가 내민 음식을 받아먹었다. 공작 부인의 식탁에 올라가는 음식이어서 그런가. 확실히 별채에서 먹었던 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정말 맛있네요.”
“그렇지?”
루비카가 뿌듯하니 웃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허기진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히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나눠 먹고 싶었다. 게다가 오늘은 그녀가 아껴 마지않은 소녀가 함께 하고 있었다. 루비카는 직접 우유를 잔에 따랐다. 하녀들이 기겁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걸 엘리제에게 내밀었다.
“내 생각에 너는 우유를 많이 먹어야 해.”
“네?”
주인마님의 식사를 돕기는커녕 보살핌을 받게 된 엘리제가 당황하며 내민 잔을 받았다. 일단 받기는 했는데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처음에 테이블에 앉는 것만 해도 엘리제는 일 년 치 몫의 용기를 다 썼다. 엘리제는 루비카가 거기에서 만족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후 몰아치는 일들은 마치 폭풍과 같았다.
“우유는 피부에 좋아.”
심지어 루비카는 어서 먹으라는 듯 재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게 더 큰 실례인 것 같아 엘리제는 우유를 마셨다. 그러자 루비카의 얼굴에 환한 빛이 번졌다.
“쭉쭉, 다 마셔.”
착하게도 엘리제는 루비카의 요구에 따랐다. 마르고 날씬한 타입의 미인인 엘리제는 키가 루비카의 비해 한참을 컸으나 그녀의 눈에는 그저 어리고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이것도 먹어 봐.”
간신히 우유를 다 마셨는데 이번에는 루비카가 야채를 만 연어 접시를 엘리제의 앞에 당겼다. 아무리 봐도 시중을 드는 건 엘리제가 아니라 루비카 같았다.
“마, 마님이야말로 좀 드세요.”
“네가 먹으면 나도 먹을 게.”
엘리제는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도해도 너무 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은데 루비카는 기쁘고 행복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엘리제는 연어를 먹었다. 귀한 요리인데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엘리제는 좀 더 잘 먹을 필요가 있어.”
루비카는 아예 본격적으로 빵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엘리제 앞에 내어 놓았다.
“마님, 마님도 드셔야지요.”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진 사람이 외치는 구조요청 같은 소리에 루비카가 걱정말라는 듯 냉큼 오믈렛을 한입 먹었다.
“먹고 있어. 그보다 엘리제, 어서 먹어.”
“저, 저는 배불러요.”
그 말에 루비카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래?”
아무리 봐도 식사를 그만둘 분위기였다. 엘리제는 당황해서 접시 위의 빵을 스프에 냉큼 찍어 먹었다.
“생각해 보니 배불러도 빵이 들어갈 자리는 있는 것 같아요. 마님, 빵이 정말 고소해요. 오믈렛이랑 함께 드셔 보세요.”
“그렇지?”
그 말에 루비카가 환히 웃었다. 그리고 냉큼 엘리제의 추천에 따라 적당히 찢은 빵과 오믈렛을 먹고 그녀의 말이 맞다며 칭찬했다.
‘마님은…… 마님은 악마야.’
루비카는 친절했다. 고통에 빠진 엘리제를 구해 줬고 일자리도 마련해 주었으면 이리저리 많은 보살핌을 주었다. 사실 엘리제에게 그녀는 친절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천사였다. 그런데 악마다. 악마 중의 악마다.
엘리제의 집안은 줄어드는 수입에도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아 몰락했다. 수도원에 있는 어머니는 편지로 항상 그녀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를 멀리하고 항상 아끼고 또 아껴 살거라.’ 엘리제는 그 말을 신조로 삼았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청렴히 살고자 했다.
그런데 루비카는 만나고 엘리제는 몇 번이고 그 선을 넘어야만 했다.
‘두, 두 번 다시 꾐에 넘어가지 말아야지.’
달고 행복한 식사에 젖어 있는 루비카와 달리 엘리제는 굳게 결심했다. 모든 도덕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이 닥치고 엘리제는 시녀와 부인의 겸상이 금지된 이유를 알았다. 그건 부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겸상을 한 시녀의 심장과 위장을 배려해 나온 규칙이 틀림없었다. 엘리제는 루비카와 겸상을 하는 건 오늘로 마지막이라고 결심했다. 혹 흔들릴 때를 대비해 정직의 신의 이름까지 걸어 버렸다.
안절부절못하는 엘리제와 달리 루비카는 행복한 식사를 끝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기분이 바닥을 치다 못해 지옥까지 내려갔었는데 오늘은 즐거웠다. 곧 잔뜩 화가 난 친척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그들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지껄이든 웃으며 넘어가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루비카는 드레스룸으로 갔다. 어제 카나를 만날 때까지 만해도 드레스 룸에 쌓여 있는 옷만으로 1년을 입고 남을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오늘은 옷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아니, 옷은 많았다. 다만 입을 옷이 없었다.
“너무 보석을 많이 달거나 화려한 옷은 안 돼.”
다른 때였다면 루비카는 욕먹기 좋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에드가가 그녀의 뜻에 따라 친척들에게 난데없이 뒤통수를 쳤고, 루비카는 방어를 해야 한다. 괜히 드레스로 꼬투리를 잡아 가정부터 단속하라는 소리를 그가 듣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품 있어 보여야 하고, 시골에서 올라온 촌스런 부인이란 소리를 들으면 안 되니 요즘 유행도 어느 정도 따라야 해. 너무 단정한 옷으로 정하면 공작가의 위신을 세울 줄 모른다는 소리를 듣겠지.”
어렵다. 옷을 고르는 건 너무 어렵다. 루비카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입을 옷이 없다고 안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일단 선선대 공작 부인의 옷을 제쳐 두었다. 좋은 날 그녀가 그 옷을 입는다면 과거의 향수를 자극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같은 날 입고 나가면 과거의 공작 부인과 괜한 비교나 당할 수 있었다.
선택권을 별로 없었다. 자수가 많이 들어간 것, 보석이 많이 달린 것을 제쳐 두니 채 열 벌이 남지 않았다. 루비카는 그중에서 옅은 옥빛 드레스를 골랐다.
“이것도 비단이 최고급이여서 흉 볼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그중에 이게 제일 나아요. 어느 정도 흠이 잡히는 건 어쩔 수 없지요.”
“그래. 이걸로 하자.”
가장 어울리는 드레스가 아니라 가장 꼬투리 잡히지 않을 드레스를 고르고 거기에 맞춰서 꾸며야 하니 영 재미가 없었다.
그런 루비카의 눈에 분주히 움직이는 하녀들 뒤에서 얌전히 자신의 다음 할 일을 기다리고 있는 엘리제가 들어왔다.
“엘리제! 너도 드레스를 골라야지.”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엘리제가 당황했다.
“나까지요?”
“내가 면담실로 갈 때 함께 가야 하지 않겠어?”
“그런…….”
“나 혼자 보낼 생각이었어?”
“아니에요.”
루비카의 말에 엘리제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시녀 없이 나타난 귀부인과 시녀를 대동하고 나타난 귀부인은 그 느낌이 달랐다. 공작 부인은 공격하러 온 친척들에게 어느 정도 무게감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럼 드레스를 고르자.”
“그런, 지금 입고 있는 옷으로도 충분합니다.”
다만 엘리제는 자신까지 꾸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시녀가 부인보다 튈 이유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루비카를 꾸며 주고 있던 하녀들이 동시에 경악해서 외쳤다.
“안 돼요!”
엘리제가 입고 있는 옷은 지나치게 수수했다. 엘리제 자신은 괜찮다고 여기겠으나 이래서는 위신이 서지 않는다.
“네?”
모두 안 된다고 하자 엘리제가 당황했다. 잘못 말했다가는 아직 예민한 소녀인 엘리제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다. 하녀들은 외치고 난 다음에 아차 했다.
“나는 화려한 옷을 입고 못 나가니 너라도 예쁜 옷을 입고 나가서 기를 팍 죽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