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91화
* * *
마영석과 관련된 결정이 큰 결정이긴 한가보다. 루비카는 침대 위에서 미지근한 세숫물에 채 손을 담그기도 전에 별채에 기거하고 있는 친척으로부터 면담요청이 들어왔단 보고를 받았다.
“에드가는?”
“각하께서는 국왕 전하를 뵈러 수도에 가셨습니다.”
“갑자기?”
“네. 사실 전부터 이미 전하께서 몇 번 부르셨던지라…… 새벽 일찍 떠나셨다고 합니다.”
앤은 무척 지쳐 있는 듯 했다. 저택에 에드가가 남아 있다면 별채의 친척보다 먼저 앤이 그를 붙잡고 한소리를 했을 거다. 에드가가 말없이 떠난 것은 좀 섭섭했지만 루비카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결정의 당사자인 에드가가 분노와 배신감으로 화가 났을 친척을 바로 대하는 것보다 자신이 나서는 게 낫다. 어차피 그녀는 에드가와 한 배를 타기로 했다. 그가 그녀를 위해 벌인 판이다. 화난 친척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오히려 면목이 없다.
“빨리 준비해서 나가야겠다.”
급히 준비하기 위해 루비카가 비누칠도 제대로 하지 않고 손을 씻자 앤이 정색했다.
“늦게 준비하세요.”
“응?”
“정상적인 면담 신청 절차를 밟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쳐들어온 건 그분들이니 똑똑히 예의를 알려 주세요. 실례를 범했으면 푸대접을 받을 각오 정도는 해야지요.”
매서운 말이었다. 앤은 친척들의 당황과 어떻게든 이 일을 말리고자 하는 마음을 이해하기는 하였으나 이와 예절은 별개라고 생각했다. 감히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주인마님이 세숫물에 얼굴을 적시기도 전에 면담을 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다니. 이건 명백한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녀는 제 주인의 머리 위에 한낮 벌레가 올라타는 것만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루비카는 언제나 다정해 보였던 앤에게 이런 매서운 구석이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주변의 하녀들과 시중을 돕기 위해 나온 엘리제의 표정 또한 진지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듯했다. 행동은 에드가가 먼저 시작했으나 애초에 그녀의 결단으로 시작된 일이다. 그녀는 에드가의 행동에 제대로 보조를 맞추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손은 다시 씼어야겠네.”
이번에는 제대로 비누칠을 했다. 아래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척들을 머릿속에 배제하고 여느 때보다 여유롭게 느릿느릿 아침 준비를 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푸대접을 한다고 해도 정도가 지나치면 꼬투리를 잡힐 가능성이 있었다.
“기다리시는 분들에게 간단한 아침이라도 내어드려.”
무척 친절한 배려처럼 보이겠으나 실상은 아침도 먹기 전에 쳐들어온 것에 대한 우아한 비꼼과 항의였다. 루비카의 어머니나 숙모도 종종 썼던 수법이다.
“네, 오늘은 침실에 식사를 나르라고 이르겠습니다.”
식당에 가려면 현관을 지나쳐야 한다. 앤은 이성을 잃은 친척들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만일의 경우를 배제하고 싶었다. 당장 그녀의 결정에 루비카가 반색했다. 세리토스 왕국은 침실에서 잠옷 차림으로 식사를 하는 건 나태하고 방종한 샤르망 왕국 같은 나라의 귀족이나 하는 일이라 여겼다. 설사 귀족이라 할지라도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실내복을 옷을 갖춰 입고 식당에서 정식 식사를 하는 것이 세리토스의 미덕이었다. 정말이지 이 나라는 근면과 성실을 그 무엇보다 최대의 가치로 두었다. 하지만 아침에 식당에서 시종과 하녀의 시선을 받으며 홀로 식사를 하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매일 투닥거려도 에드가와 함께하는 만찬 시간이 훨씬 나았다.
“괜찮을까?”
“오늘은 불청객을 피해서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흉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규칙을 어겨야 한다는 사실에 루비카는 불편했다. 오랜 수도원 생활로 그녀는 규칙을 지켜야 많은 사람이 편하다는 걸 몸소 경험했다. 이제는 그럴 정도로 물자가 부족한 시대가 아니라는 건 머리로 알았지만 역시 마음이 불편했다.
“걱정마세요. 각하는 오래전부터 그런 예의 따위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집무실에서 식사를 하신지 오래입니다. 문제 삼으려는 친척분들이 계시면 각하의 행동에 대해서 먼저 이의를 제기하라고 말씀 올리겠습니다.”
아마 친척들은 그런 소리를 못 할거다. 그럼 에드가는 내 일을 그쪽이 대신 해 주겠냐는 식으로 응수하며 그들이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던지거나 날밤을 새도 할 수 없는 일거리를 줄 것이다. 사실 국왕 전하도 주변 시선을 피해 몰래 몰래 침대에서 아침식사를 즐긴다는 소문이 퍼진 지 오래였다. 나태처럼 달콤한 사치가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고마워. 앤.”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알고 있지만 루비카는 고마웠다. 아마 셰니에 부인 같은 자가 시녀장을 하고 있었다면 이런 배려와 따뜻함을 누리지 못했으리라. 그녀는 윗사람이라고 해서 아랫사람이 가지는 따뜻함과 배려를 당연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참, 엘리.”
“네!”
앤이 하녀들의 옆에서 간단히 수건을 건네는 정도의 일만 하고 있던 엘리제를 불렀다.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그 가여운 아이는 뭐가 그리 걱정인지 녹색 눈을 파르르 떨었다. 혹 수건을 건네는 동작이 잘못되었는지 염려하는 눈치였다.
앤은 잠시 엘리제를 보고 고민했다. 루비카는 친척들에게 푸대접을 해도 되지만 사용인들은 달랐다. 집사는 에드가의 시중을 들기 위해 함께 왕성으로 떠나 버렸다. 하녀만이 친척들을 접대하면 그들은 자신을 길거리 평민과 같은 취급을 했다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애초에 하녀는 그들에게 묻기 전에는 사정을 알릴 수도 없었고 괜히 차갑게 말대꾸를 하면 경을 치고 말 것이다. 어쩌면 하녀들을 밀어 젖히고 공작부부의 사적 공간인 3층으로 쳐들어올지도 몰랐다. 적어도 시녀정도가 되어야 그들이 말을 듣는다. 무릇 귀족이란 이성을 잃는 와중에도 자신을 말리는 자가 하녀인지 시녀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이성은 잃지 말아야 한다. 어쨌든 엘리제와 앤 둘 중 하나가 친척들을 접대하기 위해서 내려가야만 했다.
앤의 최우선 순위는 루비카였다. 친척들의 접대보다 루비카의 시중이 더 중하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내려가는 건 갓 시녀가 된 엘리제여야 했다. 하지만 하녀들이 꾸며 제법 인상은 도도해졌다만 엘리제는 여린 아이였다. 아마 이 아이는 화가 잔뜩 난 친척들 앞에 서면 바로 눈물부터 쏟으리라. 제대로 단장하고 나오긴 하였으나 오늘 입은 드레스는 루비카가 선물한 것이 아니어서 무척 수수했다. 엘리제가 나가면 친척들은 그녀를 얕잡아 보고 기고만장해져 루비카를 대할 것이 분명했다. 새로 온 공작 부인은 시녀들조차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냐고 소리 지르고 이럴 거면 셰니에를 왜 쫓아냈냐고 가르치려 들지도 모른다.
역시 내려가서 친척들의 기선을 제업하는 건 엘리제가 아니라 그녀가 하는 게 타당했다.
“아래에 내려가서 내가 친척분께 사정을 설명하고 식사를 접대할 테니 그동안 마님의 시중을 들어 주겠니?”
“네?”
엘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엄청난 임무를 맡은 것처럼 잔뜩 긴장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딱딱한 말투에 앤이 웃음을 참았다. 앤은 엘리제의 어깨를 툭툭치며 속삭였다.
“그냥 마님께서 긴장하시지 않게 마음 편히 가질 수 있도록 말동무를 해드리고 식사를 잘 하시게 도와드려.”
엘리제는 완벽한 시녀는 아니었다. 하지만 부족한 손이나마 그녀가 있는 게 나았다. 만약 루비카를 보살피는 시녀가 여전히 앤 혼자였다면 그녀는 이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게다가 루비카는 엘리제를 제법 좋아했다. 루비카의 마음을 편안히 하는데는 자신보다 엘리제가 적임자였다.
“최선을 다할게요.”
눈동자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주먹을 꼭 쥐고 엘리제가 말했다. 그녀는 꼭 지옥에서라도 루비카를 웃게 해야 한다는 임무를 맡은 사람처럼 굴었다. 앤은 엘리제의 여린 듯 하지만 의무 앞에서 강해지는 점이 좋았다. 언제가 그녀가 성장하면 제대로 큰일도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님, 그럼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응.”
앤은 걱정을 떨치고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는 루비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떠나며 하녀들에게 항의하러 온 친척들을 대해야 하니 오늘의 단장은 여느 때보다 공들일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몇 번이고 발걸음을 멈추고 침실 쪽을 뒤돌아보았다. 사고는 에드가가 쳤는데 수습은 루비카가 맡아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화가 났다. 왕성으로 도망쳐 버린 에드가에게 실망 비슷한 기분마저 느꼈다. 그녀는 공작이 돌아오자마자 루비카를 대신에 단단히 따지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루비카를 기분 좋게 만들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엘리제는 곧 난관에 부딪쳤다. 그녀는 일단 뭘해야 루비카의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지 몰랐다.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하녀들이 착착 움직여 세수를 다한 루비카의 얼굴에 크림을 바르고 작은 테이블에 따끈따끈한 식사를 날랐다.
“오늘은 식사를 먼저하고 치장을 해요.”
심지어 그런 안내마저도 엘리제가 아니라 나이 많은 하녀가 했다. 루비카의 얼굴이 밝아지자 엘리제는 자신이 타이밍을 놓쳤다고 후회했다.
오믈렛과 신선한 과일과 빵, 베이커, 그리고 우유와 주스. 루비카는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을 보았다. 아침답게 간소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기준으로 테이블 위의 음식은 다섯 명이 먹어도 넘칠 정도로 많고 다양했다.
‘든든히 먹어야지.’
분노에 휩싸인 친척들을 대하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평소보다 많이 먹어야 한다. 하지만 마음과 입맛은 별개의 문제였다. 식당보다 침실이 편안하긴 했으나 혼자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폭신폭신한 오믈렛이나 갓구운 베이컨에는 아예 손이 가지 않았다. 루비카는 일단 흰빵을 살짝 찢어서 우유에 찍어 먹어보았다. 목구멍으로 넘기긴 넘겼으나 영 맛이 없었다. 이래서는 몇 번 먹고 금방 물릴 것이다. 입맛 없어 하는 모습에 주위사람들이 좌불안석이 되니 더욱 입맛이 떨어졌다. 아침 식사는 매번 이런 꼴이었다.
‘에드가라도 부르고 싶다.’
배배꼬인 말을 하는 그라도 반대편에 있는 게 훨씬 나았다. 그냥 혼자 밥을 먹는 거면 어떻게든 견디겠는데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니 더 힘들었다. 든든히 먹을 의지는 한가득이었으나 모든 음식이 입안에서 모래 씹는 듯해 괴로웠다. 루비카는 결국 빵을 놓고 우유 한 잔을 간신히 마셨다. 빈 잔에 우유를 따르며 엘리제는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루비카는 입맛이 없어 보였다. 이쯤에서 식사를 물러야 하나 고민했으나 빵 조금에 우유 한잔이라니 진수성찬을 두고 이러는 건 아닌 듯했다.
그런 루비카의 모습에 엘리제의 속이 탔다.
-그냥 마님께서 긴장하시지 않게 마음 편히 가질 수 있도록 말동무를 해 드리고 식사를 잘 하시게 도와드려.
앤이 떠나면서 한 말이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엘리제는 거기에 최선을 다하겠다. 맡겨만 달라고 대답했다. 확신에 찬 대답에 비해 지금까지의 결과는 영 좋지 않았다. 그녀는 루비카가 세수를 하는 동안 날씨에 관련된 간단한 잡담조차 건네지 못했고, 식사는 엉망이었다. 시중을 처음 드는 그녀는 루비카가 아침에는 대체로 입맛이 없어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제 탓인 듯했다. 엘리제는 만회할 기회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마님, 오믈렛이 맛있어 보여요. 한번 드셔보세요.”
엘리제의 권유에 루비카가 슬쩍 오믈렛을 보았다. 그 안에는 대게 갓 따온 버섯과 야채, 새고기, 값비싼 치즈가 가득가득 들어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 맛을 거의 제대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 자리가 만찬 자리가 아닌 게 아쉬웠고 만찬에는 오믈렛 같은 요리는 올라오지 않는 게 더더욱 아쉬웠다.
“맛있어 보이니?”
“네. 저도 엊그제 먹어 보았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특히 따뜻한 버섯이랑 볶은 양파가 정말 좋아요.”
어떻게든 루비카의 입맛을 회복하고 싶었던 엘리제가 열심히 오믈렛에 대해서 설명했다. 오믈렛은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 공작가에서 자주 올라오는 아침 식사 메뉴 중 하나였다. 엘리제의 입 끝에서 오믈렛은 세상에 다시없을 최상의 요리로 묘사되었다. 루비카는 빵빵하니 부풀어 오른 오믈렛을 바라보다 툭 한마디 던졌다.
“그럼 네가 먹을래?”
“네?”
루비카와 엘리제는 원칙적으로 함께 겸상을 할 수 없었다. 저택의 주인인 부부 내외에게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테이블에 함께 앉거나 음식을 먹을 수 없다. 그리고 시녀인 엘리제는 그녀의 뜻을 받는 사람이지 감히 초대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예의와 상식이 루비카에게 그럼 경우에 어긋나니 사양하라고 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드시게 해야 해.’
엘리제는 궁지에 몰린 쥐였다. 앞뒤가 안 보이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즉, 말실수를 하기에 딱 적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