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90화
* * *
침실을 떠나 집무실에 도착한 에드가의 곁에는 당연한 듯 칼이 있었다. 칼은 루비카와 에드가간의 대화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는 묵직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집사다. 집사는 공작의 충실한 수족일 뿐이다. 수족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간언은 그의 영역이 아니다. 이는 공작가의 가신만 가지는 권리와 의무였다. 칼은 오히려 자신이 지난 이주 간 주제넘은 짓을 저질렀다고 후회했다. 루비카와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에드가도 그도 평소처럼 움직이는 게 지극히 불가능했다. 뭣 때문일까. 그녀가 그의 주인의 저주를 푸는 방법에 대한 단서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
“해가 뜨기 전에 떠날 있도록 마차를 준비해 줘.”
집무실 옆 휴식처에 마련된 소파 겸 침대를 에드가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뜸을 들이다 말했다.
“목적지는 왕성입니까?”
“그래.”
“내일 저녁쯤에는 도착하게끔 조치하겠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국왕 전하를 알현하도록 준비 해 줘.”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국왕이 전서구를 통해 몇 번이고 그가 언제쯤 수도에 올라올 수 있는지 슬쩍 떠보았다. 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심지어 마석마차를 이용해 사신까지 보냈었다. 에드가는 영지 일과 연구가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만나는 날짜를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왕성에 도착한다면 실리주의자인 국왕은 배알도 없이 기뻐하리라.
“스테판 경에게 미리 출발해서 저택 단속을 하라 주문하겠습니다.”
“그래.”
에드가는 건성으로 대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 칼은 공작씩이나 되는 그가 쪽잠을 자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에드가는 항상 잠이 부족했다. 편안한 침대에서 잠이라도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집무실 옆 공간을 대놓고 침실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하는 사람이 극도로 적은 수도 저택이 차라리 나았다. 그곳은 편의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에드가가 낮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도록 수리를 해 두고 한 층을 싹 비웠다. 한꺼번에 교체한 하인과 하녀들은 공작이 예민하니 2층 이상 올라오지 말라는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그곳에서라면 낮 동안이나마 푹신한 침대에서 밀린 잠을 보충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숙면을 위해 라벤더 오일을 마른 꽃에 떨어뜨리려던 집사가 팔을 멈췄다. 3년 전의 사건의 이후로 악몽을 꾸는지 에드가는 시시때때로 불면증을 호소하고 어지간해서는 쉬이 잠드는 일이 없었다. 그랬던 그가 칼의 말에 대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곯아떨어져 자고 있었다. 거의 침대에 눕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언제부터?”
루비카가 온 뒤부터는 시종들도 물러날 시각이 되어서 에드가는 몰래 집무실에 와서 잤다. 그런 모습을 남들에게 들켜 봐야 좋지 않겠다 싶어 칼도 괜히 그의 주변에 있다 주변에 시선을 살까 싶어서 시중을 따로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게 오늘만의 일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 마님과 한바탕 싸움을 하셨으니 피곤할 만도 하실 거야.”
칼은 일단 오늘만의 일로 남기기로 했다. 꽃에 오일을 떨어뜨리려던 동작을 멈추었다. 라벤더는 숙면을 도와주나 이미 숙면에 빠졌다면 굳이 이런 향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방을 나설 때쯤 그의 눈가가 슬쩍 떨리기 시작했다.
오늘만의 일로 남기기로 했으나 이게 오늘만의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확실히 에드가와 루비카는 자주 싸웠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귀여운 부부의 애정행각으로 보일뿐이었으나 칼에겐 달랐다. 그녀의 앞에서 에드가는 골머리를 앓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에드가가 이전보다 좀 더 자주 웃게 되었고, 어떨 때는 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죽지 못해서 사는 듯해 보이던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니, 괜히 속단하지 말자.’
칼은 자신의 과오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고 철이 든 무렵부터는 충실히 모신 선대 공작이 죽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말에 흔들려 그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선대 공작은 불같은 사람이었다. 사랑한다 말하던 그녀와 만날 일이 요원해지자 식사도 거부하고 하루하루 시름시름 앓아갔다. 선대 공작 부인은 영문도 모르고 남편의 상태에 안타까워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뭔가 먹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선대 공작은 화만 냈었다. 칼은 당시 그가 정말 죽는 줄 알았다. 한 번만, 한 번만 만나게 도와만 준다면 모든 미련을 떨치겠다는 말에 흔들려 그는 결국 주선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한 번은 두 번, 세 번이 되었고, 이윽고 한 달이 두 달이, 일 년이 되어 버리더니 공작은 당연하다는 듯 공작 부인이 아들을 만나려 영지를 떠나면 별장에 갈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각하,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에드가도 이제 곧 아카데미를 졸업할 테니 이번이 마지막이네. 이번만……, 이번만 그녀와 만나게 해 줘. 그럼 미련 없이 이 관계를 끝내겠네. 칼, 난 그녀가 없으면 못 살아.”
거절하면 공작은 그날부로 앓아 누웠다. 그리고 사랑을 이룰 수 없는 불행한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 한탄했다.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는 사람은 그녀뿐이라는 소리를 했다. 한평생 공작을 위해 살았던 그는 결국 항상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멸이었다. 그녀를 그토록 사랑한다 말했던 공작은 불륜의 현상이 들키는 순간 공작 부인에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사랑하는 건 공작 부인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칼은 그제서야 자신이 차마 입이 두 개여도 말하기 부끄러운 죄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진실한 사랑을 연결해 주는 종달새도 인도자도 아니었고 더러운 욕정을 이어 주는 공범자였을 뿐이었다.
‘나에게 각하가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자격 같은 건 없어.’
칼은 정신을 차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에드가의 상태나 사랑이나 마음에 대해서 속단할 입장이 아니다. 에드가가 클레이모어 공작이란 뿌리 깊은 의무를 지기 위해 죽지 않고 살아가듯이 그는 속죄하기 위해,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고통받는 그의 저주를 푸는데 미약하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자유롭지 못한 공작의 충실한 손발이 될 것. 그리고 공작이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이 외부에 새어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단속할 것.
칼은 일단 호위대가 머물고 있는 거처로 향했다. 에드가가 이동하는 동안이나 도착 이후에 어떤 불상사가 생겨 그가 낮 동안 걷지 못한다는 사실이 들통날 때를 대비해 항상 호위대장인 스테판을 먼저 보내 점검했다. 호위대장인 스테판은 어떤 때에 그를 호출해도 불만 없이 일을 수행했다. 실력이 좋은데다가 입도 무거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에드가와 칼은 달아나는 루비카를 그대로 놓쳤을 거다. 게다가 아직 루비카가 도망치려 했다는 소리가 일절 새어나가지 않는 걸 보아 입도 무거웠다.
“스테판 경을 찾으러 왔습니다.”
칼이 당직을 서고 있는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기사는 밤늦은 시간 자신들의 대장을 찾으러 온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의 명입니다.”
“경은 현재 평화실에 계십니다.”
평화실은 전서구를 관리하는 곳이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스테판 경이 거기에 있다니 칼은 당황스러웠다.
“동생의 편지가 도착해 답장을 하러 가신 걸로 압니다. 말씀을 전할까요?”
“아닙니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칼은 에드가의 수족으로 공작저 내의 모든 일을 다루지만 신분으로는 호위기사인 그들의 한참 아래였다. 괜히 말을 전해 달라고 하다 무언가 곡해되거나 스테판 경이 기분 나빠할 수 있었다. 그는 공손히 인사한 다음에 평화실에 찾아갔다.
넓은 영지에 사업체를 꾸리고 있는 공작저택에는 다양한 소식이 오기 마련이었다. 최근에 논문 경향이나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 무기의 재료로 쓰일 만한 철의 수급이나 다양한 화학 재료들의 개발. 모두 누가 먼저 정보를 얻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내용이었다. 빠른 이동과 소식을 전하기에 마석마차만한 것이 없었으나 동력으로 쓰이는 마석은 매우 귀한 것으로 함부로 남용할 수 없었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전보도 있었으나 중요한 문서가 어디에서 바꿔치기 되고 어디에서 정보가 새어나갈 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해서 공작저는 많은 전서구들을 키우고 관리했다. 그리고 사용인들은 이 전서구를 통해서 함부로 사적 편지를 보낼 수 없었으나 기사 정도가 아무래도 뭐라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전서구를 전담하는 부서가 기시단 아래에 속해 있었다.
“스테판 경.”
전서구들 사이에서 가장 잘 훈련되고 날쌘 올빼미의 발목에 작은 쪽지를 묶고 있던 스테판이 훽 고개를 돌렸다. 이국적인 갈색 눈이 경계의 눈빛을 띄고 있었다. 기사들은 그들의 주군이나 같은 기사 이외에는 아무리 오래 얼굴을 맞대고 있어도 이름을 부르면 꼭 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굴었다.
“이 깊은 밤에 무슨 일 입니까?”
“동생 분께 편지를 보내려던 참이 아니었습니까? 각하의 명이나 급한 일은 아닙니다. 일을 마치신 후에 말씀을 나눠도 됩니다.”
칼은 사적인 편지를 평시에 끄는 비둘기가 아니라 잘 훈련된 올빼미로 보내냐는 소리로 들리지 않게 유의하며 말했다. 다행히 스테판은 그리 읽지 않았는지 고개를 저었다.
“각하의 명보다 제게 중한 게 있겠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내일 아침 각하께서 수도로 출발하려 합니다. 아마 저녁쯤 도착할 듯합니다.”
“왕성으로 바로 가십니까?”
“아마 그럴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정리하고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유능한 기사였다. 스테판 경은 검술에 능할 뿐만 아니라 예의도 발랐고 눈치도 빨랐다. 칼은 깊은 경의를 표한 다음에 평화실을 나갔다. 스테판은 칼이 나가는 모양을 긴 눈으로 주의 깊게 주시한 다음 올빼미의 발에 묶은 쪽지를 풀어 도로 펄쳤다. 그리고 가슴 주머니에 있던 흑연을 꺼내 황급히 문구를 추가했다.
‘공작이 수도로 이동함.’
추가한 문구 위에 최근 공작 부인이 장미꽃 개발에 투자한 것이 공작가의 사업과 딱히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루비카의 행동이 수상쩍은 데가 많으니 조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소피, 그럼 잘 부탁한다.”
쪽지를 다시 단단히 묵고 스테판이 올빼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올빼미는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감더니 훌쩍 날아올라 밤하늘로 사라졌다. 그 올빼미는 다른 전서구와 달리 오직 그와 그의 동생의 말만 들었다. 다른 이들이 머리라도 쓰다듬으려 치면 사나운 부리로 물어 버리거나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었다. 게다가 이동하는 시간은 한밤이라 어지간한 명사수가 아니고서는 화살로 맞추기도 어려웠다. 스테판은 어떤 걱정도 남기지 않고 휙 몸을 돌려 평화실을 나왔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공작이 가는 곳에 그를 방해하는 모든 위험요소를 제거할 것.
‘그래야 그가 낮 동안은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안 들키지.’
스테판은 이미 에드가의 상태에 대해서 반절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왜 낮에는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지 그 이유만은 몰랐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겠답시고 기껏 쌓은 신뢰를 무너뜨릴 생각은 없었다. 그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행위와 똑같았다.
어차피 인내를 가지고 오래도록 공작의 곁을 지킨다면 결국 알게 될 정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