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89화
‘젠장.’
에드가는 욕지기를 간신히 삼켰다. 멍청이처럼 굴지 않으려 했다. 간신히 마음의 문을 연 루비카가 달아나지 않도록 어르고 달랠 생각이었다. 그리나 그녀가 그의 간절한 두드림에 살짝이나마 반응해 줬을 때 에드가는 그만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루비카의 입술 안은 지나치게 달콤하였다. 그의 육체는 그녀의 유혹 앞에 완전히 굴복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때 침실에서 가만히 누워 있었던 것처럼 그저 눈을 감은 것뿐이었고, 그에게 약간의 반응을 해 주었을 뿐인데 그는 발광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달콤하고 뜨거운 입술, 그 안을 영원토록 탐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도달하고 싶었다. 그녀를 제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클레이모어 공작가 따위 개나 주라지.
평생 살면서 의무를 저버릴 생각을 한 적이 단연코 없었다. 하지만 루비카와 관련되면 그의 강인한 의지는 한낮 휴지조각처럼 변해 버리고 말았다.
전통? 알게 뭐람. 공격할 테면 공격해 봐.
그녀의 키스만 자신에게 주어진다면 에드가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 진작 그녀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녀가 울게 내버려 둔 자신이 바보 멍청이였다. 에드가는 어깨에 날개가 돋아 천국에 도달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그녀가 두 팔로 그를 밀어 버렸다. 그는 난데없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했다.
“루비카.”
갑자기 왜 이러는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루비카는 그 쪽을 보지도 않고 가까운 의자에 몸을 날리듯 안더니 고개를 파묻었다.
“그만 가.”
에드가는 당황했다. 그녀가 드디어 제게 마음을 연 것 같았는데 이 확연한 거절은 무엇일까. 그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왜?”
“그만, 그만 가요.”
더 말하기 싫은 듯 그녀는 얼굴을 의자에 파묻은 상태에서 왼팔을 휘휘 저었다. 에드가는 제발 루비카에게 얼굴을 보여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간신히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움츠린 어깨를 보았을 때 그건 역효과만 날 것 같았다. 평소와 달리 말 끝에 ‘요’자가 붙은 건 위험신호였다. 그건 그녀가 정말로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나오는 버릇 같은 거였다.
“알았어. 이만 가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그녀 앞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의 어깨가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할 수 있다면 손을 뻗어 그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에드가는 뻗은 손을 치웠다.
‘내가 제일 끔찍해 하는 행동이잖아.’
제멋대로 그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는 다가와 원하지 않는 스킨쉽을 하며 그의 상처를 보듬어 주겠다는 듯이 구는 사람들. 에드가는 그들을 혐오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자신에게 그에게 친구로서, 아니면 사모하는 사람으로 우정으로, 연정으로 그랬다고 변명했다. 에드가는 그들의 그런 변명에 얼마나 차가운 표정을 지었던가.
‘……이제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겠군.’
그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의 틈을 파고 들어 공작가를 제멋대로 주무르려 드는 거라 여겼다. 이제 조금 그게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에드가는 그들처럼 루비카의 심정 따위 무시하고 그녀를 쓰다듬으며 제게 괴로움을 토로하라고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당하는 입장에서 불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루비카, 오늘은 혼자 있지 말고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사람이라도 불러서 쉬어.”
하지만 울고 있는 그녀를 그대로 두고 가기가 영 켕겼다. 에드가는 바보 같은 해결책 하나를 제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곧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차갑고 화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침실 문밖을 나섰다. 깊은 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앤과 칼은 여전히 시종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에드가는 앤에게는 턱 끝으로 침실 문을 가리키고 칼과 함께 그의 집무실로 떠났다.
“마님!”
에드가가 떠나자마자 앤은 침실 문을 활짝 열고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시종은 미처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흘끗 상황을 보았다. 테이블에는 눈물을 닦느라 푹 젖은 듯한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의자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던 루비카는 앤이 부르자 고개를 들었는데 눈물에 젖은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아무래도 부부는 단단히 싸우고 만 모양이었다.
“괜찮으세요?”
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루비카의 얼굴에서 눈물을 마저 닦았다. 아까는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인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뚝 그쳤다.
“따뜻한 물을 준비하고, 강아지라도 데려 올까요?”
앤은 차마 루비카에게 에드가를 설득했냐고 묻지 못했다. 차가운 표정으로 나온 공작의 상태를 봐서 결과는 뻔했다. 앤은 낯선 공작가로 시집와서 한참 남편의 사랑을 찾아야 하는 그녀가 공작가를 위해 남편에게 쓴 소리를 해야 하는 그녀가 가엾고 안쓰러울 뿐이었다. 오늘 하룻밤 그녀의 마음을 달랠 수만 있다면 당직도 불사할 마음이었다.
“괜찮아.”
그러나 루비카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앤도 나 때문에 괜히 고생하지 말고 이만 쉬어. 벌써 자고도 남을 시간이잖아.”
너무 오래 울었기 때문일까.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앤은 두 다리를 동동 굴렀다.
“마님을 이리 두고 제가 어찌 자요.”
“오늘은 이만, 혼자 있고 싶어.”
루비카가 단호히 말했다. 앤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입을 간신히 닫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사람이 필요하지면 줄을 당겨 주세요. 부르시면 바로 달려올게요.”
루비카는 고개를 젓는 대신 끄덕였다. 아마 이조차 거절했다면 앤은 정말 큰일이 난 것처럼 굴며 그녀를 떠나지 않으리라. 앤은 시종을 일러 테이블에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를 가져오라 이르고 루비카의 얼굴을 따뜻한 수건으로 말끔히 닦았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망설인 끝에 침실을 나섰다. 침대에서 문까지 고작 스무 걸음이 안 되는 걸음을 걸으면서 열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마영석과 관련된 갑작스러운 공작의 선언과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이를 말린 공작부부의 부부싸움. 안타까운 마음에 앤은 그만 새카맣게 잊고 말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영석을 찾지 말자는 말을 꺼내고 강하게 주장한 것이 루비카란 사실을.
루비카는 앤이 침실 문을 닫자마자 성큼성큼 걸어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반지를 꺼냈다. 이상한 죄책감 같은 것이 그녀를 감쌌다. 일순간이지만 그녀는 에드가에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응당 느꼈던 두근거림과는 다른 것이었다.
“아르망.”
루비카는 깨지기 쉬운 유리라도 되는 듯 조심조심 반지를 들어 올려 그리운 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그리 이름을 부르면 ‘네’라고 대답할 아르망이 선하다. 하지만 벌써 얼굴을 보지 못한지 한 달째가 되었다. 과거의 아르망을 찾는다고 해도 그녀가 기억하는 아르망과 같은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아르망이 보고 싶었다. 아르망을 보면 두근거렸던 그 심장소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안심하고 싶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건 아르망이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건 아르망이다. 그녀의 사랑이 이리 쉽게 흔들릴 리 없다. 루비카는 누군가의 아름다움에 쉬이 반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소리를 아니었다. 노인이 되어서야 겨우 사랑이란 이런 감정이구나. 하고 알 수 있게 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과거로 돌아온 지 채 석 달이 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리다니…….
그래, 에드가는 잘생겼다. 부자다. 능력도 있다. 처음에는 최악일 정도로 맞지 않았으나 알고 보니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에드가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그녀를 망설이게 했고 죄책감을 가지게 했다. 자신은 돈이나 얼굴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속물이 아니라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항변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최고의 신랑감이라 불러 마지 않을 점 때문에 그에게 마음이 가면 자신이 속물이 아닌가 고민하고 있다니……. 하지만 그를 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이상하게 죄책감이 들었다.
“아르망, 내가 왜 이럴까요?”
할 수만 있다면 루비카는 아르망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이 이상한 마음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 자신보다 훨씬 현명하고 힘들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 준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없다. 그리고 그녀의 복잡하고 기구한 사정을 톡 까놓고 말하고 의논 할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루비카는 반지를 아르망 대신으로 삼았다. 미래와 과거였던 현재를 이어 주는 유일한 매개체가 반지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 생각할 때 탁자를 톡톡 쳤어요.”
그건 아르망의 버릇이었다. 그도 생각이 막히거나 뚜렷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눈앞의 탁자나 땅을 톡톡 쳤다.
“좋아하는 과일도 똑같았지.”
아르망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었으나 그래도 선호하는 것이 있었다. 그를 좋아하게 된 뒤 루비카는 자연스레 아르망의 입맛에 대해서 외우게 되었다. 그에 반해 에드가는 편식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먹을 것을 가렸다. 그래서 루비카는 알고 싶지 않아도 입맛 까다로운 에드가가 무얼 먹을 수 있는지 알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건 아르망이 좋아하는 음식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래서일까. 그런 점이 비슷해서 그랬던 걸까. 에드가가 한순간이나 아르망 같았다. 비록 그녀의 못난 머리와 입 탓으로 제대로 자신의 뜻을 설명하지 못해 약간의 말싸움이 있고 말았으나 그는 그녀의 뜻을 이해했고 이를 이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냈다. 다툼이라는 과정이 중간에 끼어 들어 있었으나 결과는 아르망과 같다. 그래서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아르망이 생각나서 심장이 순간 착란을 일으켜 두근거렸던 것이다. 모두 착각일 뿐이다.
루비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르망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간 것이 아닌데 벌써 기억의 한 모퉁이가 훼손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으나 손모양이 어땠는지, 손목의 주름이 몇 개였는지 이런 것들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 생각이 너무 지나쳤어.”
루비카는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닮았다니 그럴 리가 없다. 에드가는 우아하게 쭉 뻗은 긴 다리와 팔을 가졌으나 아르망은 등이 구부정했고 자주 아팠던 다리를 모양새가 결코 보기 좋지 않았다. 말끔하니 잘생긴 공작과는 달랐다. 비록 의젓한 자세나 절도 있는 행동거지는 비슷할지라도…….
“나도 참, 또 비슷한 점을 찾고 있네.”
루비카는 한참 손바닥 위의 반지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급작스럽게 변해 버린 과거이자 현재인 지금, 그녀의 버팀목은 오직 그 반지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밤새 하루 빨리 아르망을 다시 만나기를 빌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