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88화
그녀의 말에 그제서야 그가 루비카를 바로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기쁨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기쁠 때 두 눈동자가 꼭 어둠속에서 달빛을 받은 루비처럼 초롱초롱 빛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의 입가에는 초승달처럼 동그스름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려 나가 그는 나지막히 신음을 흘렸다. 그녀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를 찾아 행동했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음에도 미움을 산다면 그럼 앞으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에드가는 루비카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눈앞에 막막하고, 그냥 한마디로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정답이었다. 그가 최선을 다한만큼 루비카는 최대치의 기쁨을 느꼈다. 에드가는 자신이 그녀를 그리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마저 느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내 말을, 내 뜻을 이해해 줘서.”
말하려는 데 다시 눈물이 나오려 했다. 비록 기쁨의 눈물이라 해도 그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에드가는 황급히 소매 가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나 어쩐지 루비카는 멈추려해도 눈물이 자꾸 나왔다. 긴장이 탁 풀려 버린 걸까.
“미안, 멈춰야 하는데…….”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계속 나왔다. 하지만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되고 숨쉬기가 한결 쉬워졌다. 루비카는 이제야 자신이 공작저에 있는 내내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억지로 그칠 필요 없어.”
에드가는 애써 눈물을 멈추려 노력하고 있는 루비카에게 말했다. 그리고 달래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에드가는 진작 이랬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지금 루비카는 자신이 그녀를 이해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고 있으나 만찬 이전에는 전혀 다른 이유로 눈물을 흘렸다. 아직 그녀는 그 눈물을 의미를 모르고 있으나 에드가는 알았다. 그건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은 자의 눈물이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설득하고 진심을 전해도 누구도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 외눈박이의 나라에서 두눈박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멀쩡한 눈 하나를 없애는 수밖에 없다. 에드가는 그때 자신의 뜻을 관철하면 루비카가 영영 마음을 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쩌면 그녀는 하루하루 시든 꽃처럼 생기를 잃어갈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은 싫었다. 그런 일만은 일어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바뀌고자 하였다. 그녀가 바뀌는 것보다 자신이 바뀌는 것이 더 쉬운 일이고 주변을 좀 더 설득할 수 있었다.
그녀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그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도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그의 뺨을 때리고 상대가 원한다고 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말을 들었을 때, 구원 받았다. 그녀는 그를 거부했으나 그를 깊은 늪에서 끌어올려 주었다. 모두 그가 이상하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그가 이상하지 않다고 말했으며 지극히 정상이라고 했다.
주변에 그를 찬양하는 사람이 넘쳤으나 그는 쭉 거부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처럼 겉으로 울지는 않았으나 그 대신 견고한 벽을 쌓았다. 그리고 여리고 사람을 잘 믿는 그녀는 차마 벽을 쌓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 것이다.
에드가는 그 사실이 싫었다. 그는 그녀를 만나서 그동안 그를 무겁게 짓눌렀던 짐 하나를 떨쳐 낼 수 있었다.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보자 세상은 전혀 다른 빛을 내기 시작했다. 전에는 여유 없이 분노에 차서 받아들였던 일을 이제는 가벼이 넘길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게 한 그녀에게 오히려 자신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했다니. 세상에 이런 빚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빚을 지고 살고 싶지 않다. 세상에 가지지 못할 게 없고 이루지 못할 게 없는 클레이모어 공작인 그가 빚이라니, 그는 그의 삶에 그런 단어를 결코 남기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비카에게 빚이라니, 절대 싫었다. 그래서 빚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이 세상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가 이해하는 입장에 서자. 그래서 세상을 바꿔 나가자. 설사 어떤 힘든 일을 닥치더라도 그녀 앞에 빚을 지는 것보다 나았다. 오늘 에드가는 집무실에서 무섭게 일을 처리하며 그런 결심을 했다.
“자. 눈물을 그치는 건 힘들 것 같고, 수분이라도 보충해야 해.”
에드가가 다정히 말하며 루비카에게 다시 따듯한 물이 가득 담긴 잔을 내밀었다. 루비카는 홀짝이면서 잔을 받아 마셨다. 그녀가 물 한 잔을 다 비웠을 때 에드가가 시계를 흘끗 보았다. 벌써 1시였다. 이전에 루비카는 이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랐는데 지금은 훌쩍 가 버린 시간에 야속함마저 느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당신이 가면 시종들이 당신이 날 울렸다고 생각할 텐데…….”
말하고 난 뒤 아차했다. 자칫하면 계속 있어 달라는 뜻으로 비췰 수 있었다. 그녀의 당황을 눈치챈 건지 모른 척한 건지 에드가가 웃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리고 그는 손수건에 물을 뿌리더니 루비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오늘은 울고 싶은 만큼 실컷 울어. 누가 설명해 달라고 해도 설명할 필요 없어. 혼자 있기 싫으면 앤을 부르거나, 당신이 새로 들인 그…… 시녀를 부르거나. 내키는 대로 해.”
그리 행동하면 주변에서 그녀가 단단히 상심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에드가의 의도였다. 그가 떠난 뒤 눈물 짓고 있는 루비카를 목격한 시종을 비롯한 하녀들이 낼 소문을 자명하다. 공작 부인이 공작의 뜻을 돌리려 눈물까지 지으며 말렸는데도 그가 듣지 않았다는 소문. 그런 소문이 나면 어느 누가 마영석과 관련된 그의 결정에 대해서 그녀에게 생채기를 낼 수 있을까. 그는 그녀를 앞으로 벌어질 싸움에서 철저하게 안전한 곳에 있게 하고자 의도했다. 곧 루비카는 그의 뜻을 눈치챘다.
“에드가,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에드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 때문이 아니야.”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내가 꺼낸 거고…….”
“동의한 건 내 의지야. 그리고 그걸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당신보다 내가 나서는 게 효율적이야.”
“하지만…….”
“루비카, 당신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데 함께 하려는 사람이 주위에서 물어뜯기고 있으면 그 뜻을 굽히지 않을 수 있겠어?”
에드가의 말에 루비카는 입을 닫았다. 마영석과 관련되어 곤란에 처한 게 자신만이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나 그녀의 결정으로 앤과, 엘리제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물러났다.
“이번 일은 내 아집이 되어야 해.”
루비카는 눈물로 얼룩진 눈으로 새삼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우아하고 예의바르지만 절도 있는 자세. 퇴폐적일 정도로 검은 머릿결, 섬세한 턱 선과 여인처럼 붉은 입술, 그리고 보고 있노라면 뼈 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운 푸른 눈. 에드가는 에드가였다. 그는 언제나와 같았다. 언제나와 같은 빈틈없는 미인. 하지만 다정해 보였다. 전에는 얼음으로 만든 듯 차가운 사람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그의 푸른 눈동자가 더 이상 시려보이지 않았다. 바뀐 건 그일까. 그녀일까.
‘아.’
심장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진동은 그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뛸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루비카는 당황했다. 그러나 무언가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에드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쉬고, 누가 왜 그리 우냐고 물으면 나 때문이라고 해.”
마지막 말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에드가는 자신 때문에 그녀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자못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잘자라는 말을 덧붙인 그는 바로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다가 왔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쥐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녀의 깊고 어두운 적갈색 눈동자와 화창한 하늘처럼 맑은 푸른 눈동자가 부딪쳤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뺨과 눈가에 쏟아졌다. 여느때처럼 풋풋하면서 남자다운 느낌이 잔뜩 나는 향이 루비카를 감쌌다. 알 수 없는 뜨겁고 강렬한 기운이 두 사람을 감쌌다. 루비카는 발끝에서 시작된 열이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걸 느꼈다.
매일 밤 그는 침실을 떠나기 전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건 의식과도 같은 거였다. 그러나 어제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오늘은 어제와 전혀 다른 긴장이 감돌았다.
‘……눈을 내리 깔아야 해.’
시선을 돌리면 그가 얕은 한숨 후에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출 것이다. 항상 그래왔다. 그러나 지금 루비카는 이상하게 눈을 내리 깔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에드가의 푸른 눈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의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품은 신비한 바다 같았고, 우주 같았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만졌다.
싫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전에는 당황스럽고 거북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루비카는 포근한 기분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뜨거웠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뺨이 불에라도 덴 듯했고, 자신을 꽉 안은 에드가의 팔에서 느껴지는 강인함이 지나치게 잘 느껴졌다. 꼭 세상이 그로만 이루어진 듯했다. 반면에 자신은 어디에 있는 건지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적갈색 눈과 푸른 눈이 얽히기 시작했다. 눈이 얽히듯 그녀는 에드가에게 얽혀 자신이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쿵,쿵,쿵.’
심장이 다른 때와 다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건 아름다운 것을 볼 때 뛰는 것과 달랐다. 그러나 아르망을 볼 때와도 다르게 뛰었다. 루비카는 이 감정이, 이 느낌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에드가의 푸른 눈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척에서 멈추었다. 포근했던 아까와는 다른 긴장 섞인 열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흘러넘쳤다. 그녀가 한 발 물러선다면 에드가는 지체 없이 뺨을 쓰다듬는 손길도 거두고 일렁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그만두리라.
루비카는 그래야 한다고 느꼈다. 물러서야 한다고, 에드가에게 ‘그만’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몸이 그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에드가의 숨결과 시선 속에서 사로잡힌 물고기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루비카.”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감기에 걸린 것처럼 어지러웠다. 왜 이러는 걸까. 자신이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아무리 추론하려해도 뇌는 해답을 찾지 못했다. 마음의 공백은 몸이 채우기 마련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듯이 루비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것은 본능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 지.
하지만 에드가는 알았다.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신호를 보낸 건지.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처럼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다. 갑작스럽게 했던 처음의 키스와 달랐다. 에드가의 입술이 먼저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달래듯이, 겁먹지 말라는 듯이. 자신이 그녀의 모든 것을 보호하겠다는 듯이 그가 그녀를 꽉 안았다. 그녀가 자신을 허락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멍청이처럼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소중한 순간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를 다루고 싶었다.
서로의 심장소리가 천천히 섞이고 보드랍고 몰캉한 것이 루비카의 입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은 항상 차가웠으나 혀는 뜨거웠다. 그것은 루비카의 안을 정신없이 탐하기 시작했다.
‘흡.’
에드가의 두 손이 그녀의 허리를 꽉 안았다. 저절로 까치발이 서졌고 허리가 뒤로 젖혀졌다. 곧이어 격정적인 키스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