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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87화 (8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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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87화

“하지만 내가 그런 의견을 내면 공작 부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자가 전통을 깨려 한다고 공작가에 큰 소란이 일어 날 테고…….”

그래서 쫓겨나는 건 바라는 바다. 하지만 이정도 소란이면 그녀가 쫓겨나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곁에서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앤이 시녀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셰니에 부인 건을 보았을 때도 공작가의 막대한 내부 예산에 관여할 수 있는 시녀장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저 다들 셰니에 부인처럼 대놓고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우아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카나도 공작가와 거래하게 되어서 이제 막 의상실이 살아나려고 하고 있고, 엘리제도 시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쫓겨나는 게 그녀뿐이면 얼마든지 일을 저질렀을 거다. 하지만 간신히 재기하게 된 카나와 그녀 덕에 시녀가 될 기회를 잡은 엘리제는? 아직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인맥을 공고히 하지 않았다. 그녀가 쫓겨 난 뒤에 바로 그들을 불쌍히 여겨 거두어 줄 귀부인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난 공작 부인의 측근이라고 비슷하게 테두리 지어져 이상한 편견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렇듯 루비카가 신념을 버리고 한 발 물러선 것은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왕국민의 식량과 관련 있다는 것이었고 그 다음이 주변 사람들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욕먹고 공작 부인자리에서 쫓겨나고자 하였으나 차마 자신 때문에 앤을 비롯한 다른 사람이 욕을 먹는 것만은 견뎌 낼 수가 없었다. 루비카는 이가 자신의 약점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매정해지고자 마음먹자마자 매정해질 수 있다면 애초부터 이러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념은 중요하다. 신념은 그녀가 고통 속에서도 삶을 살 용기를 주었고, 희망을 엿보게 했으며 주변을 사랑하게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신념도 주변 사람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세상에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주변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루비카는 그런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단하다 여겼다. 다만 자신은 그런 그릇까지는 못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구하지 않겠다고 주장한다면?”

에드가의 말에 루비카가 말을 이었다.

“……그야.”

반발이 일어나겠지. 그리고 원인을 찾아 아우성을 치고, 혹 새로 온 공작 부인이 이상한 말을 속살거려서 그리 된 게 아니냐는 소리를 하는 이들도 있겠지.

“아.”

루비카의 눈이 커졌다. 에드가가 그녀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당신.”

어떤 소란이 일어나고 친척들이 반발해도 에드가를 쫓아낼 수는 없었다. 그는 공작가의 주인이다. 정통한 혈통이 그랬고, 그의 뛰어난 두뇌와 능력이 그랬다. 누가 그를 향해 망나니에 제멋대로인 공작이라고 욕할 수는 있어도 그를 쫓아낼 수는 없었다.

“당신이 내 의견에 반발했지만 내가 그걸 싸그리 무시한 나쁜 놈이라고 단단히 소문이 났으면 좋겠군.”

에드가가 즐거운 상상을 하는 듯 책상을 톡톡 쳤다. 이 광경을 목격한 루비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틀림없이 그의 꾀에 그녀가 탐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하면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그녀의 뜻을 이룰 수 있다. 그녀가 그리 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정면돌파해서 모두에게 상처 줄 필요가 있나. 약간의 속임수를 썼다. 비록 그에게 비난이 쏟아지겠지만 그는 그런 비난 따위 깡그리 무시할 작정이었다. 전통 따위 그가 알게 뭔가.

“하지만, 에드가 그건 공작가의 전통이었다고…….”

마영석을 구하지 않게 된 것이 기쁘냐고 묻는다면 루비카는 당연히 기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기쁘기 전에 얼떨떨했다. 에드가는 그녀의 의견에 완벽하게 수긍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방법을 생각해 왔다. 공작 부인인 그녀가 의견을 추진한다면 막대한 반대 의견에 부딪쳐 무산되거나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공작가를 망치러 온 나쁜 여자라는 꼬리표가 붙을 것이다. 그리고 그 꼬리표는 지저분하게 내내 들러붙어 그녀가 무얼 하려고 할 때나, 앤이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내내 귀찮게 굴지도 모른다. 어쩌면 엘리제를 사교계에 소개할 때 저 철없는 시녀가 공작 부인에게 이상한 말과 사상을 주입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드가가 추진하면 이야기는 달랐다. 전통을 깨부수는 이기적이고 철없는 한없이 폭군에 가까운 공작이라는 수식어가 붙겠지만 그가 바라는 바를 결국 이루리라. 안타깝게도 공작가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 수준이 달랐다. 루비카는 이에 대해서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공작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곧 떠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었다. 다만 에드가가 어느 시점에서 에드가의 마음이 바뀌었는지 알지 못하는 게 신경 쓰였다. 이런 대단한 결정을 갑작스레 왜 내린 것일까.

“전통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지.”

“하지만 에드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신은 반대하고 있던 내게 마영석을 구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역설했었어. 난……, 죄 없는 모험가들이 목숨을 잃는 건 싫었지만 당신이 설명한 필요성이라는데 납득해서 물러선 거였고.”

“맞아, 루비카 그건 필요한 일이긴 했어.”

그랬다. 필요한 일이긴 했다. 다만 에드가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루비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지키고자 하는 그녀의 신념을 버리게 할 정도로 필요한 일인가…….

그런 질문을 던지자 대답은 명쾌해졌다. 그동안 그런 의문을 가지지 않은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는 예로부터 내려온 전통이기에, 예로부터 필요한 일이었다기에 별 생각 없이 서류에 도장을 찍고 승인했다. 그의 돈과 재산은 결국 누군가의 피 위에 쌓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별 생각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만든 무기 덕에 수입한 곡식으로 수많은 세리토스 왕국민이 살아남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무기 덕에 대륙 곳곳에서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필요했던 시점은 아주 오래전 과거야. 아직 마석이 얼마나 강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지, 마석의 에너지를 이용한 무기가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지.”

마석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에너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는 비싸게 팔 수 없다.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세리토스 왕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마석이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클레이모어의 무기가 증명하지 않는다면 이를 팔 일은 없으리라. 허나 그것도 위력이 증명되고 나서의 일이다. 처음 세리토스 왕국이 세워지고 클레이모어의 조상이 무기를 개발하였을 때는 이를 알릴 방도도 없었다. 어느 누가 증명도 안 된 마석과 그 무기를 사들일까. 그래서 세리토스와 클레이모어의 선조는 과감히 보물을 노리고 마물의 영역에 뛰어드는 모험단에게 테스트의 명목으로 무기를 지급했다. 그들의 전략은 성공했다. 모험가들은 이전에는 난공불락이라 여겨졌던 마물들을 보란 듯이 무찌르고 그들의 보물을 갈취했다. 보물을 나눠 가지고 한몫 단단히 챙긴 모험가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모험이 성공할 수 있게 만들었던 무기의 위력에 관해서 입 아프도록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의 특성상 물에 빠져서도 입만 둥둥 뜰 수 있다면 자신이 얼마나 대단했고, 그가 들고 있었던 무기는 얼마나 큰 위력으로 마물을 한방에 날려 버렸는지 염불처럼 외리라.

이처럼 뛰어난 홍보가 없다. 덕분에 무기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클레이모어는 공작가를 세우고, 세리토스는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마영석을 구하는 건 그때의 일이 남긴 흔적 중 하나였다.

“이제는 그런 걸 하지 않아도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만든 무기가 우수하다는 건 세상이 다 알아.”

“하지만 실전에서 필요한 테스트는…….”

에드가가 더 말하지 말라는 듯 루비카의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입술에 와 닿는 그의 손가락이 무척이나 보드라웠다.

“여태까지는 실전 테스트를 마영석을 찾는 방식으로 하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방법을 찾지 못한 거야. 이제 그게 당연한 일이 되지 않았으니 다른 방법을 찾겠지. 이참에 아예 남부 지방에 지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군. 사치품인 마영석을 찾는 것보다 인간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지원하는 것이 명분도 그렇고 더 보기 좋을 듯하더군.”

“친척들이 반대할 텐데.”

“그렇지 않아도 국왕 전하의 호출이 있었어. 내일 왕성에 가서 전하와 담판을 지어 칙령을 받아낼 거야.”

설명하는 내내 에드가는 루비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서 황망함과 그에 대한 분노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평소에 창가 너머로 보이는 유순하고 귀여운 눈망울이 되었다.

“에드가…….”

루비카는 다음 말을 잊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여태껏 차갑게 빛난다고 생각했던 에드가의 푸른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아름다워 보였다. 푸른 하늘도 그보다 아름답지 못하리라.

“전하를 설득하는 건 걱정하지 마. 그분은 합리적인 분이니 당신이 말하는 대로 이왕이면 죽는 사람을 최소화하려는 쪽을 우선으로 생각하실 거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격정이 올라와 루비카를 치고 갔다. 온몸이 떨리더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폭발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루비카의 생에서 그렇게 내부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대체 무엇이 폭발했는지도 모른 채 감정이라는 것이 분수처럼 온몸을 적시고 흘러넘쳤다. 루비카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두 팔을 펼쳤다. 그리고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앞의 에드가를 끌어당겨 꼬옥 안았다.

“에드가, 에드가.”

에드가는 갑자기 자신을 껴안은 루비카의 행동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심장이 어떻게 쿵쾅거리고 있는지 인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녀가 자신을 먼저 끌어안다니, 그녀가 제 이름을 이렇게 쉼없이 부르고 있다니. 혹 꿈은 아닌지 볼을 꼬집고 싶을 정도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그 배로 선명해 보이기 시작했다. 루비카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곳은 침실인데 꼭 깊은 계곡 한 가운데에 있는 듯 했다. 어쩜 이 여인과 함께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지 몰랐다. 자신이 이렇게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에드가, 흑.”

그때 그를 부리는 루비카의 목소리에서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순간 에드가는 찬물이라도 맞은 듯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깜짝 놀라 영원히 붙어 있고 싶었던 루비카에게서 제 몸을 떼어 그녀를 살펴보았다. 루비카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에드가는 혹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게 없는지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뭘 또 잘못한 건가?”

루비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그래도 에드가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말 실수를 한 건가? 뭐가 또 당신 기분을 상하게 했나?”

언제나 그녀 앞에서 그나마 세우려 했던 자존심까지 다 집어 던지고 그는 그녀 앞에서 그간의 제 언행이 썩 좋지 않았음을 실토하고 말았다.

“난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게 당신을 언짢게 할 거라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 말아. 그대가…… 그대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항상 내 기분을 맞추려고 하고, 내게서 뭔가를 얻어 가거나 주지 않는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뿐이라 언제나 밀어내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 그래서 잘 모르겠어. 당신을 어떻게 대하면…….”

“그게 아냐. 그게 아냐. 에드가.”

결국 주절주절 자신도 모르게 구차할 정도로 진심을 한껏 내뱉고 있는 에드가의 말을 끓고 루비카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에드가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시선을 슬쩍 피했다.

“기뻐서 그래. 기뻐서……, 기쁘면 가끔 눈물이 나올 때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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