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86화
“에드가.”
모두 다 나가고 루비카는 비장하게 에드가를 불렀다. 에드가는 무척 기분 좋은 표정으로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희희낙락이다.
“방금 그게 무슨 짓이었어?”
“잘했어.”
“잘했다니.”
동문서답에 결국 루비카의 복장이 터졌다.
“당신 정말 왜 이래? 내가 의견을 철회하니 바로 사람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해? 이렇게 굴 거면 왜 그랬어? 나한테 반대한 건 그냥 날 화나게 하려고 그런 거야?”
“루비카.”
에드가가 소파 옆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는 주전자 안에 따뜻한 물을 잔에 따라 내밀었다.
“일단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어? 당신, 당신은 내가 화내는 게 좋아? 화나는 꼴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마영석을 구하지 않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공작가의 전통이라고, 꼭 지켜야 하는 거라고, 구하지 않으면 친척들이 화낼 거라고 말했잖아.”
에드가는 문 쪽을 힐끔 보았다. 얄궂게도 문이 슬쩍 열려 있었다. 앤일까. 칼일까. 고약하게 엿들을 속셈인 듯했다. 문틈을 통해 루비카가 고래고래 지른 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리라. 에드가는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친척들의 의견 따위 무슨 상관인가. 난 공작이야. 공작으로서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어. 설사 전통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나는 고쳐야 해.”
소리는 방을 울릴 정도로 컸으나 노기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루비카는 너무 분하고 화가나 이를 읽지 못했다.
“왜 이렇게 제멋대로야!”
“이번만큼은 당신도 날 말릴 수 없어.”
“에드……읍!!”
그리고 에드가는 요란하게 그녀를 껴안았다. 한참 소리를 지르던 그녀의 입이 그의 가슴에 폭 안겨 막혔다. 그리고 재빠르게 살짝 열린 문틈을 ‘쾅!’소리가 나게 닫았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과 밖에서 추이를 몰래 관망하고 있던 앤과 칼을 비롯한 하인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밖에서 듣기에 에드가가 루비카를 안은 소리는 한참 화를 내고 있던 루비카의 입을 공작이 키스로 막은 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공작은 문을 완전히 닫기 전 그들을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침실문은 공작 내외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어떤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게 제작되어 있었다. 저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무슨 대화가 오갈지 앤은 두터운 문에 귀라도 대고 싶었다.
“이런, 이를 어쩌나. 마님마저 각하를 설득하지 못하면…….”
“밤은 깊습니다. 앤, 베갯머리송사 앞에 강한 사내는 없습니다.”
“지금 베갯머리송사에 넘어가는 게 생긴 건 각하가 아니라 부인이라구요.”
“네?”
“방금 그 소리 들었죠? 각하께서는 지금 부인을 상대로 미인계를 쓰실 작정이라구요.”
칼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종들이 눈을 재빨리 내리깔았다. 주인 내외의 잠자리 사정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특수한 재질로 장인이 만든 침실문은 평소에 소리가 전혀 새어나오지 않았다. 각하는 일이 바빠 항상 새벽이 되면 침실문밖을 나서서 집무실에 갔으나 매일 밤 마님의 방을 꼬박꼬박 찾아왔다. 그리고 각하가 나설 때 망측하게도 마님은 침대에 누워 있었으나 두 눈은 말똥말똥 뜬 상태였다. 새벽이 되도록 무슨 일을 하 길래 한 잠도 주무시지 않는 걸까. 그리 의문의 형태로 수군거렸지만 다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실 명백하다 알고 있었다. 루비카가 이 공공연한 착각을 알았다면 분하고 원통해서 가슴을 쳤을 것이다.
“각하의 유혹 앞에 마님께서 무너지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군요.”
“앤.”
“그 아름다운 얼굴로 요망하게 눈물이라도 흘리면…….”
“앤, 더 이상 각하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칼이 시뻘개진 얼굴로 앤에게 선언했다. 그 시각 시종들은 다른 생각으로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다. 에드가의 바로 곁에서 그의 옷을 입히고, 목욕 시중을 드는 그들은 에드가의 몸 구석구석모르는 바가 없었다.
‘시녀장님, 부인께서 굴복하신다면 그건 눈물 때문이 아닐 겁니다.’
‘요망하다면 요망하지. 하, 신은 그분께 작위도 주고, 얼굴도 주고 물건마저…….’
더 이상의 생각을 밀어내기 위해 시종이 고개를 저었다. 칼은 그들이 머릿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부부사이이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하나 망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시녀장인 앤은 몰랐다. 아무리 하녀가 주인의 손발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에드가는 그들이 제 몸은 건드리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다. 일부러 예쁜 하녀만 골라서 몸단장을 맡기는 일부 남성 귀족과는 에드가는 달랐다. 그래서 하녀들 내부에는 그와 관련된 일체의 음탕한 소문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에드가를 하늘 위에서 내려온 님프 취급했다. 절반은 맞는 말이었지만, 칼은 이 앞에 더 있었다간 무슨 망측한 소문이 날 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부부사이니 망측한 소문이 아니라 금슬이 좋다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만, 갑시다. 이제 이 일은 저희 손을 떠났습니다.”
“각하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앤의 팔을 잡고 칼은 그녀를 질질 끌고 나왔다.
“어쨌든 두 분이 주무실 시간은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앤은 미련 많은 얼굴로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루비카가 부디 에드가의 눈물에 넘어가지 않기를 빌었다. 비록 아름답지만 차갑고 냉정한 모습을 주로 보여 줬던 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소연한다면 세상 어느 여자가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분명 마음씨 고운 루비카는 꼬시기로 작정한 에드가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만 봐도 그렇다 공작은 그녀를 임신시켰고, 제멋대로 초라한-실상은 돈을 펑펑 썼지만-결혼식을 올렸다.
‘이렇게 잘못 크실 줄은 몰랐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릴 때부터 너무 오냐오냐 했던 것일까. 여성에게는 냉담한 것이 걱정스러웠으나 이 여자 저 여자 꼬시는 난봉꾼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이렇게 마음대로 휘두르는 남자로 클 줄은 몰랐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어린 에드가에게 여자를, 특히 사랑하는 여성을 얼굴만 믿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따끔하게 가르치고 싶었다. 지금이야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루비카가 넘어가 주고 있다지만 언제까지 그 인내심에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런 앤의 생각은 부당한 것이었다. 눈물에 넘어가다 못해 푹 잠겨서 제 모든 것을 바꾸고 바치게 생긴 것은 루비카가 아니라 에드가였다. 다만 그 눈물은 요망한 것이 아니라 진정성이 넘쳐흐르는 것이었고, 루비카는 에드가를 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집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흘렸을 뿐이었다.
“루비카.”
루비카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팔을 축 늘어뜨렸다. 남녀의 힘 차이만큼 불공평한 게 또 있으랴. 에드가가 애달프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화가 난 루비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옅은 숨이 느껴졌다. 하지만 루비카는 결코 달래듯이 그를 껴안는 미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이제 이야기를 좀 나눠도 될까?”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가는 그녀가 흥분이 가라앉아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음을 바로 알았다. 그가 천천히 잠기듯 꽉 안은 손을 풀었다. 그의 가슴을 빈틈없이 채웠던 그녀의 온기가 빠져나가자 한없이 허전하였으나,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적갈색 눈동자와 마주하자 허전함이 느껴질 수도 없을 정도로 가슴이 콱 메어 왔다.
“루비카.”
그의 손을 그녀가 찰싹 쳐냈다. 온연한 거절. 하지만 에드가는 화를 내기보다 처량히 웃기를 선택했다. 사정을 들으면 그녀를 그를 이해해 주리라.
“왜 그런 거야. 왜.”
“당신 뜻에 따르기 위해서야.”
“내 뜻에 따르다니, 나는 분명 납득했잖아. 마영석을 구하라고, 그게 당신의 입장과 위신뿐만 아니라 왕국민을 위하는 거라는 걸 알았어.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렸어. 기껏 구하지 말라는 내 의견에 당신이 반대하기에 이야기를 듣고 내, 내 신념을 버리고 그런 결정을 내렸는데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다니……. 앞으로 내가 당신의 뭘 믿고 의견을 나눠.”
탓하는 말에 에드가는 달콤한 아픔을 느꼈다. 그럼 전에 의견을 나누었던 건 그를 조금이라도 믿고 있었다는 뜻인가.
“자세하게 설명을 못한 점은 사과할게. 하지만 나는 당신이 진심으로 화를 내길 바랐어.”
루비카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얼굴에 담겨져 있던 적의가 사라진 것 같아 에드가는 기쁨을 느꼈다.
“당신은 화내는 연기 같은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의 말이 맞긴 했다. 루비카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화내는 건 물론 가짜로 웃는 연기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녀가 가짜로 웃을 수 있을 때는 내가 정말로 화가 났다고 시위할 때뿐이었다.
“화내는 게 필요했다니. 에드가,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야 당신이 마영석을 구하지 않는 걸 진심으로 반대한다고 여길 테니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알쏭달쏭했다. 그런 반응은 예상했던 터이다. 에드가는 매혹적인 웃음을 흘리며 루비카를 자리에 안내했다. 루비카는 얌전히 그가 안내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이 표정에 약하군.’
에드가는 여전히 루비카의 생각이나 반응을 아직 제대로 읽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다행히 그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녀가 약해지는 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예쁜 꽃과 아름다운 소녀, 예쁜 옷과 보석 앞에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그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면 흐릿한 눈동자로 그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거나 그가 주는 대로 잔을 받아 마셨다. 심지어 그가 권하는 것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음료일지라도 그가 웃으면 넘어가고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아름다운 것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비록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으나 어쨌든 좋아하는 것이다. 싫어하는 것과 관심 없어 하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에드가는 되도록 루비카 앞에 우아하게 보이도록 유의하며 손을 모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법에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루비카는 냉큼 정신을 차리고 냉담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줘.”
계속 화내기보다 설명을 요구하는 게 그녀답다고 해야 할까. 에드가는 이번에야말로 세치 혀를 굴려 루비카의 환심을 사고 마리라 결심했다. 왜 이렇게까지 그녀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지는 여전히 그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루비카, 당신 사실은 마영석을 구하지 않고 싶지?”
진심은 묻자면 그렇다. 루비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