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84화
하지만 자신이 칼을 부르러 간 사이에 루비카가 정원으로 나오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휠체어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를 지켜보는 시간은 1분 1초도 아깝다. 보통 사람이 아니기에, 훤한 대낮에는 그녀를 마주할 수 없기에 그는 이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제발.”
30여분 정도가 흘렀을 때 에드가는 정원 입구를 보고 빌 듯이 중얼거렸다.
“……루비카.”
하지만 1시간이 지나도 루비카는 나오지 않았다. 에드가는 이 현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루비카는 아침도 먹지 않았고 산책도 걸렀다. 그녀는 산책을 하는 종종 고개를 들어 그가 있는 집무실 쪽을 바라보았다. 에드가는 그럴 때마다 황급히 창가에서 멀어지면서도 가슴 한 쪽이 간지러웠다. 그녀가 자신을 의식한다는 사실이 그리 기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지켜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오지 않았다. 이것만큼 확실한 거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에드가는 이만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참을 창가 앞에서 이동하지 못했다. 오늘 루비카는 산책을 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인정한 후에도 그는 매우 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서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칼을 부르지 않았다. 칼을 불러 루비카를 재촉한 다음에 ‘그의 꼴이 보기 싫어서’ 내지는 ‘그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게 기분 나빠서’ 산책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까 심히 두려웠다.
* * *
어느 작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성은 마음이 답답하거나 사랑의 상처를 입었을 때 땀이 나도록 검을 휘두르면서 대련을 하거나, 마차를 타고 훌쩍 마을의 술집에 가서 진탕 술을 마시고 다음날 아침 아픈 머리를 감싸고 진한 커피 한잔을 마시는 등 아픔을 잃을 수단이 많았다. 하지만 여성을 그럴 수 없었다. 기껏해야 정원을 산책하는 것이 다였다.
실의에 빠진 여인에게 산책만큼 좋은 것은 없다. 그러나 루비카는 오늘 산책 나갈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다음 차선을 선택했다. 그건 자수였다. 루비카는 로사에게 부탁해 자수도구 일체를 가지고 왔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었으나 루비카는 능숙하게 바늘에 실을 꿰었다. 그리고 스케치도 없이 자수를 시작했다. 자수는 그녀가 무척 자신 있어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우와.’
루비카의 옆에 있던 엘리제가 흘끗 그녀의 자수를 훔쳐보았다. 순식간에 라벤더를 완성한 루비카는 그 옆에 작은 나비와 벌을 수를 놓기 시작했다. 나이가 믿겨지지 않는 솜씨였다.
‘마님이 올해 스물두 살이라고 하셨지.’
엘리제는 물끄러미 제가 놓은 자수를 보았다. 그녀도 나이에 비해서 자수를 제법 잘 놓는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루비카가 한 자수에 비한다면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솜씨도 솜씨지만 밑그림도 없이 슥슥 수를 놓는 솜씨가 침방에서 20여년은 일한 사람의 솜씨 같았다.
‘정말 대단하시구나.’
엘리제는 존경스러운 눈으로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엘리제의 눈빛에도 아랑곳없이 루비카는 수를 놓고 있었다. 똑같은 속도로 일정하게 움직이는 손놀림은 꼭 장인의 것 같았다. 엘리제는 루비카가 고요한 평정 속에 있다고 느꼈다. 저렇게 수를 놓으려면 보통의 집중으로는 안 되겠지. 엘리제는 루비카를 따라하기 위해 심호흡을 한 뒤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엘리제의 예상과 달리 루비카는 심한 격정 속에 있었다.
‘왜! 왜! 비싼 옷이 싫은 거니.’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자수에 푸는 중이었다. 도저히 아까 전의 엘리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멱살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애꿎은 바늘로 천에 구멍이나 뚫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중이었다.
세상에 보석이 싫은 여자는 없다. 루비카도 보석을 좋아한다. 인생을 길게 살고 난 다음 그녀가 깨달은 게 있다면 체면을 챙길 필요 없다. 줄 때 받아야 한다. 게다가 루비카는 엘리제에게 그 대가를 요구할 생각도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대가는 그저 세상에 둘도 없는 미인으로 탈바꿈한 엘리제를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엘리제는 비싼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싫어했다. 지나친 사치라는 이유였다. 대체 그녀에게 그런 사상을 주입한 사람이 누구일까.
‘망할 세리토스 왕국.’
제 1 용의자는 사치를 배격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한 왕국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 왕족과 귀족의 접시에 드래곤 아이가 올라가는 걸 그대로 두고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마영석을 찾는 관습 따위는 방치했다. 아무리 한입으로 두말하는 게 왕족의 기초소양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나.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현재 수도원에 있는 엘리제의 어머니였다.
‘망할 엘리제의 어…….’
루비카는 차마 다음 단어를 완성시키지 못했다. 남편을 그리 보내고 딸과 아들의 미래를 망치기 싫어 힘든 수도원 생활을 자원한 부인이다. 그분까지 욕할 필요가 없다. 솔직히 이해도 되었다.
수익관리에 대한 실패로 집안이 폭삭 망하고 남편을 하늘로 보내는 지나친 대가를 치른 부인이었다. 자신처럼 되는 걸 막고자 딸에게 사치 말고, 보석을 멀리하라고 조언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제 돈으로 보석을 사는 건 백번을 망설여도 남이 주는 보석은 챙기라고 하셨어야죠. 부인, 왜 딸에게 염치를 가르치셨나요. 돈이 없을수록, 힘 들수록, 염치는 가끔 잊어버려도 된답니다.’
의외로 세상은 착한 사람보다 뻔뻔한 사람에게 기회를 더 줄 때가 많았다. 루비카는 교육을 잘 받고 심성이 고운 엘리제를 안타깝게 여겨야 하는 현실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마님, 각하께서 뵙고자 합니다.”
상념을 방해하는 칼의 목소리가 날아 들어왔다. 거침없이 수를 놓던 루비카의 손이 멈추었다. 그냥 평소대로 노크하고 들어오지 굳이 또 의사를 물어볼 건 뭔가. 여기는 그가 뭐든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그의 구역이 아닌가. 갑자기 왜 눈치를 보는 척하지?
“나중에 보면 안 될까?”
루비카는 그리 말하면서도 별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리 말하든 말든 에드가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쳐들어올 줄 알았다. 여태 줄곧 그러지 않았나. 하지만 뜻밖에도 칼이 그녀의 말을 전한 뒤 문밖에서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그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아, 이런.’
자신이 지나치게 군걸까? 그를 그렇게까지 거부할 생각은 아니었다. 어제는 화가 많이 낫고 아침 내도록 우울하긴 하였으나 이게 기분은 많이 나아졌다. 더는 분수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심술을 부린 모양새가 되었다.
‘조금 지나면 다시 오겠지.’
에드가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거나 타인의 기분을 배려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루비카는 익숙하지 않은 바느질과 시름하며 그를 기다렸으나 만찬 시간이 되도록 그는 다시 오지 않았다.
‘설마 내가 많이 화 난 줄 안 걸까?’
타이밍상 그랬다. 그녀는 아침도 먹지 않았고, 산책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루비카에게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았다.
‘그래. 에드가가 내 심정 따위 신경 쓸 리 없어.’
정말 루비카가 걱정되었다면 그는 열 일 제쳐 두고 그녀에게 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종일 우울하도록 두었다. 그리고 집무실에 콕 처박혀 일이나 했다. 그는 그런 남자다. 이 세상의 모든 것 중 일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게 없다. 어쩌면 그는 본인보다 일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의사를 묻고 그녀가 싫다고 말하자 두 번 다시 묻지 않은 것이 내심 걸렸다. 이제 안달이 나기 시작한 건 그녀가 되었다. 종이 땡 치자마자 루비카는 식당에 내려갔다. 식사시간이 되면 에드가가 와서 함께 가거나 그가 먼저 내려가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늘은 빈 식탁이 그녀를 반겼다.
‘원래 식사를 혼자 했다지.’
어쩌면 앞으로 아침식사 뿐만 아니라 저녁식사까지 홀로 해야 할지도 모른다. 루비카는 너무 심기를 거슬리게 한 게 아닐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서로 사랑하지는 않지만 내내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하는데 그와 좋은 관계로 지냈으면 했다. 에드가는 입이 문제였으나 심성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루비카는 자신이 지나치게 그에게 투정을 부렸다 후회했다.
‘할 수 없지.’
먼저 보기 싫다는 투로 대응한 게 그녀였다. 에드가가 거기에 화가 나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여겼다. 루비카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물을 마셨다.
“마님, 어떻게 할까요? 각하께서 오시면 함께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먼저 줘.”
그가 내려오지 않을 것 같은데 괜히 기다렸다가 배고프고 비참한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무슨 자존심 대결 같은 걸 한 게 바보 같았다. 그녀는 이제부터 실리를 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제 한몸 잘 챙길 것. 그것만큼 세상에 중요한 게 또 없다.
‘하지만 역시 혼자 먹으려니 입맛이 없네.’
그녀가 전채를 깨작거리고 있을 때쯤 쿵쿵 발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에드가가 식당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먼저 와 있는 루비카의 모습에 놀라더니 그녀가 먼저 음식을 먹고 있는 모양새에 표정이 굳어졌다.
‘기다리지도 않았나?’
루비카는 그가 그렇게 비꼴 줄 알았다. 그럼 애매하게 웃으며 아까는 미안하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드가는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별말 하지 않았는데도 식전주와 전채요리가 날아왔다.
그는 무언가를 굳게 결심한 듯 그녀 쪽을 보지 않았다. 괜히 먼저 말 걸기도 민망했다. 원래 사과란 상대 쪽에서 받아줄 듯한 의사를 내비칠 때 가능한 것이다. 루비카는 그를 따라 조용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전채를 먹고 메인 요리를 먹는 내내 에드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루비카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날씨라던가 산책하는 길에 피었던 꽃에 대해서 말이라도 꺼내 볼까 하다가 에드가의 얼굴이 워낙 굳어 있어서 그만두었다.
‘결국 내가 포기하기로 했는데 뭐가 그리 불만인걸까?’
루비카는 이렇게 구는 그가 조금 야속하다 여겨졌다. 하지만 그리 여기는 것조차 지나친 감정이라고 자신을 달랬다. 그녀와 에드가는 애초에 어쩔 수 없이 부부가 되기로 한 사이였고, 그녀는 에드가에게 어떤 애정이 없다. 눈뜨고 잘 때까지 어떻게 하면 공작 저택에서 하루 빨리 도망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도주 자금도 착실히 마련 중이고.’
얼마 전 칼이 안젤라의 신탁을 비롯한 정리 작업이 끝난 그녀 몫의 돈을 자칼 은행 앞으로 계좌를 만들어 넘겼다. 이제 이 돈을 전쟁이 터진 후에도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것만으로는 안심 할 수 없었다. 언젠가 그럴 듯한 명목으로 시간을 내어 자칼 은행과 거래하는 은행에 가 돈을 일부 찾아 가까운 곳에 숨겨둘 심산이었다.
‘아르망도 찾고 싶고.’
아르망에 대해서는 다만 단서가 너무 적어 어찌해야 하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루비카는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까 걱정스러웠다.
“루비카.”
이제는 당연한 듯 식사가 끝난 후 과일이 곁들여진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단 것과 차가운 것을 싫어하는 듯 에드가는 포크를 들어 수많은 과일 중 몇 개 되지 않은 좋아하는 과일 한 조각을 집었다.
“이런 문제에 내가 개입해서 미안하지만, 올해 당신이 쓰는 예산에 대해서 말인데…….”
루비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산 이야기는 다 끝난 것이 아닌가. 이미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마영석을 찾지 않기로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