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81화 (81/212)

# 8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81화

전에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귀찮거나 힘들지 않았다. 자신의 눈치를 하녀들이 살피고 무얼 하든 관심이 쏟아지는 건 제법 낯설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타인의 시선 바깥에서 삶을 살았다. 많은 사람에게 주목을 받아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런 걸 딱히 추구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루비카는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면 기쁘기보다 위축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클레이모어 저택에서의 상황이 낯설기는 했어도 싫지는 않았다. 하녀도 그녀도 서로에게 적응했다. 함께 오순도순 모여 드레스나 화장 미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제법 재미있었다. 그녀가 모르는 많은 것을 하녀들이 알려 주기로 했다. 특히 엘리제를 함께 꾸밀 때는 정말이지 즐거웠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게 귀찮았다. 주변이 복작복작한게 싫었다. 특히 식사는 더욱 싫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그녀 혼자 나이프로 고기를 썰고, 포크로 찍어 음식을 삼켜야 했다. 식사란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즐겁게 해야 하는 것인데 그녀는 혼자였다. 그냥 혼자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혼자였다.

도저히 견딜 기분이 아니었다.

“모두 그만 나가 줄래?”

목소리에는 어느새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아침부터 이게 뭐하는 짓인지. 엘리제와 하녀들이 얼마나 당황하겠어. 특히 엘리제는 처음 아침 시중을 들잖아. 봐, 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 그만 어른스럽게 대처해야지.

속으로 그리 자신을 타일렀지만 감정이란 항상 이성을 배반하기 마련이었다.

“그, 음.”

어쩔 줄 몰라 하는 엘리제의 팔을 하녀가 잡고 조용히 눈짓했다. 엘리제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녀들과 함께 침실에서 물러났다. 닫힌 문 사이로 엘리제는 침대 위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루비카를 보았다.

클레이모어 공작이 그렇듯 공작 부인은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이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여인이 모든 것을 다 가졌기에 그것은 극적으로 보였고 부러움을 사기 쉬웠다. 이미 영지내에는 루비카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이를 시샘하는 이도 많았으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건 부러워하는 이였다.

‘아아, 얼마나 행복할까.’

‘결혼 한 방에 인생이 바뀌다니, 정말 부럽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사람들을 루비카를 가리켜 그리 말했다. 하지만 지금 엘리제의 눈에 루비카는 행복해 보이기는커녕 지독히도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 * *

“지금 뭐라는 거예요. 칼!”

“각하는 바쁘십니다.”

앤은 해가 뜨자마자 에드가가 침실로 달려올 줄 알았다. 그러나 한참을 지나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결국 아직 일을 맡기기에는 한없이 마뜩찮은 엘리제에게 대신 시중을 들라 부탁하고 집무실로 뛰어왔다. 그녀는 공작이 무슨 어리석은 소리를 하든 그의 멱살을, 아니 머리채라도 잡아끌고 침실로 데려갈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은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는 칼에게 저지당했다.

‘이 개 같은 놈.’

이건 욕이 아니다. 그만큼 칼이 공작에게 충실하다는 소리다.

‘개 같은 자식.’

이건 욕이다. 누누이 이야기를 하고 자초지종을 상세히 일러 줬건만 말 안 통하는 짐승처럼 다음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모든 걸 까먹고 평소와 똑같이 구는 게 짐승이나 다름없다.

“각하는 지금 열 일 제쳐 두고 마님을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해요.”

“앤.”

칼이 정색했다. 앤은 비록 열쇠가 없었으나 이대로 둔다면 도끼라도 들고 와 문짝을 부술 것 같았다.

“국왕 전하께서 각하께 이틀 뒤에 수도로 올라오라고 연통하셨습니다. 그날 전하께 보여드릴 실험 보고서의 검토를 아직 각하께서 끝내지 못하셨습니다.”

“전하는 각하를 하루 이틀이 멀다고 부르지 않나. 한 번 정도는 대충 해가도 이해해 주실 거요.”

“……전하께서는 공작 각하가 신혼을 충분히 즐기시라고 이주일이나 회의를 요청하는 걸 자제하셨습니다. 밀린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미 충분히 각하를 배려하시고 생각해 주신 전하께 이제 보답을 해야 할 때입니다.”

‘국왕 개자식아, 지금 그 신혼생활이 위기라고!’

앤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목구멍까지 올라온 소리를 삼켰다. 만약 그녀가 그대로 외쳤다면 왕국 모독죄로 끌려갔으리라.

“정말 너무하시는…….”

그때 하녀 하나가 뽀르르 와 앤에게 작은 쪽지를 건넸다. 쪽지를 본 앤의 눈에 힘이 들어왔다. 엘리제는 아직 어설펐으나 제때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구나. 사태는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제대로 처방을 내리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칼, 각하께서 아무리 바쁘셔도 당신은 음료를 전하거나 식사를 전한다는 명목으로 들어갈 수 있지요?”

“지금 당신 앞에서는 안 들어갈 겁니다. 앤, 내가 문을 열자말자 밀치고 쳐들어갈 계획이지요?”

앤을 이를 꽉 깨물었다. 이래서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은 안 좋다. 그녀의 행동방식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

“스테판 경, 이리 와서 제 팔을 좀 꽉 붙잡아 주시죠.”

앤의 말에 하녀는 당황했다. 복도에 스테판 경을 비롯한 호위는 보이지 않았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요. 나와요.”

천장 위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곧 소리 없이 스테판이 내려왔다.

“시녀장님, 저는 그저 각하의 호위일 뿐입니다. 사적인 싸움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습니다.”

“호오, 공작 내외의 일이 어찌 사적인 싸움일 수 있을까요. 스테판 경, 군소리 말고 내 팔을 꽉 잡아요. 아님 제가 집사를 죽사발이 되도록 패 버릴 수 있으니까.”

스테판이 움찔했다. 끼고 싶지는 않지만 괜히 더 큰 소란이 일어나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도도히 얼굴을 든 앤의 팔을 잡았다.

“칼, 스테판이 날 잡고 있을 거예요. 나 같은 아녀자가 어떻게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다 못해 무공을 자랑하는 호위대장을 이길 수 있을까요? 칼, 문을 열고 들어가서 공작 각하께 보고하세요. 마님께서 오늘 아침을 안 드시고 혼자 있고 싶다고 했답니다.”

앤은 확신했다. 그 말을 들은 에드가가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서 루비카의 앞으로 가리란 걸. 그녀는 어제 루비카 앞에서 제 감정을 하나도 추스르지 못한 에드가를 봤다. 그는 결코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지으면 그는 그보다 더 아픈 사내였다.

“꼭 이래야겠습니까?”

칼이 침하게 말했다. 그는 에드가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가슴 아파할 에드가를 보고 싶지 않았다.

“네.”

“그럼 약속합시다. 앤, 각하께 말을 전하겠습니다. 그래도 각하께서 일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신다면 앤 이만하고 물러납시다.”

앤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그녀에게 이건 도박도 아니었다. 에드가는 해야 할 행동은 어차피 한가지였다.

칼은 그런 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칼은 알고 있다. 에드가는 해야 할 행동이 한 가지인 게 아니었다. 할 수 있는 행동이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앤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스테판 경에게 팔이 붙잡히는 건 앤이 아니라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정말 도끼를 들고 와서 문을 박살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랬다간 에드가의 비밀이 천하에 들어날 수도 있었다. 칼은 일단 앤을 진정시키는 걸 최선으로 두기로 했다.

“각하, 잠시 전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노크로 뒤에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암호를 보냈다.

“급한가?”

“……네.”

앤의 험악한 표정에 칼은 날름 급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들어와.”라는 소리가 들렸다. 칼은 주변 눈치를 한번 본 다음에 조심스레 열쇠를 돌려 집무실에 들어가 황급히 문을 닫았다.

앤은 고개를 뻣뻣이 쳐들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이미 승리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문을 열고 뛰어나온 에드가에게 그러기에 내가 뭐라 했냐고 한바탕 탓할 작정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앤은 점점 초초해졌다. 그녀의 예상대로라면 에드가는 ‘마님이 식사를 하지 않으신답니다.’ 이 한마디가 들리자마자 다들 그녀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고 뭐했냐고 역성을 내며 뛰쳐나와야 했다. 점점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삐걱.’

기대하고 고대하던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에드가가 아니었다. 곤란한 표정은 칼이었다. 안에서 무슨 경을 치렀는지 그는 문을 닫고 잠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칼, 각하께서 뭐라고 하셨지요? 곧 준비하고 나오시겠답니까?”

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칼은 이런 말을 전해야 하는 자신에게 매우 울적해졌다. 안에서는 에드가에게 깨지고 이제는 앤에게 깨지게 생겼다.

“지금은 전하께 보고 드리는 문서가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뭐라고요!”

“그리고 마님이 식사를 못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빨리 가서 옆을 지키라고……. 앤!”

무지막지한 힘이 스테판의 팔을 뿌리쳤다. 근력에 있어서는 누군가에게 져 본 적이 없는 스테판은 깜짝 놀랐다. 방심한 틈을 노린 것도 아니었다. 앤은 그대로 황소처럼 문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꼼꼼한 집사는 제가 할 일을 절대 잊지 않았다.

“지금 마님의 곁을 지켜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각하라구요!”

이 개자식야!

앤은 차마 터트릴 수 없는 외침 대신 발이 부셔져라 문을 찼다.

“자기 아이를 낳아 줄 부인에게 그따위로 굴다니!”

이건 일종의 어필이었다. 앤을 에드가가 루비카를 임신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날 이때까지 공작의 체면과 마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입술을 꾹 눌러왔다. 그런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지 않나.

‘각하! 저는 각하가 시집도 안 간 정숙한 귀족 처녀를 임신시켜 집에 들어앉힌 강아지짓을 한 걸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패를 내밀었는데도 문은 꿈쩍도 안했다. 칼도 가만히 있었다. 더 화가 났다. 제가 부인이 임신했단 비밀을 알고 있는데 그게 소문이 나 부인의 명예가 떨어지는 게 두렵지도 않는 건가? 세상에 개자식도 이런 개자식이 다 있나.

보다 못한 하녀가 그녀를 말렸다.

“고정하세요. 시녀장님.”

그래도 분이 안 풀렸다. 그녀는 문 앞에서 한참을 씩씩 거렸다. 이제 에디는 더 이상 그녀의 귀여운 에디가 아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본연의 귀여움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자연의 섭리였다. 그런데 남자라는 족속들을 왜 당연하다는 듯이 거기에 개자식다움을 더하는 거지? 그것도 자연의 섭리인가?

‘개자식.’

에드가는 이제 그녀의 귀여운 에디도 대단하신 공작 각하도, 개 같은 새끼도 아닌 그냥 개자식.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