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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80화 (8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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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80화

긴가민가했더니 맞았다. 그녀의 에디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사랑은커녕 누군가에게 따뜻한 감정을 품을 일도 없어 보였던 그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단순한 독점욕이나 부부이기에 응당 가지는 감정이 아니었다. 상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소중한 그 어떤 것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자세. 그것은 진짜 사랑을 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였다.

“지금은 마님께서 한껏 울게 내버려 두세요. 그렇게 한참 울다 지쳐 잠든 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마님은 무척 외롭다고 느낄 거예요. 지금까지는 저택 내에 저나 엘리제같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못 느끼셨죠. 심지어 저희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어요. 즐겁게 웃고 떠들었어요. 그래서 더 외로울 거예요. 마님은 지금 처음으로 이곳에 자신의 편은 하나도 없이 덩그러니 홀로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실 거예요.”

에드가는 더욱 초조해졌다. 어느새 그의 손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로 축축해졌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진퇴양난이다. 지금 들어가면 루비카가 그의 배려없는 행동에 화를 내고 실망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홀로 두면 다음날 아침 그녀는 외롭고 쓸쓸한 감정에 젖어들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든 말든 들어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밤을 새고 싶었다. 외로움 따위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앤은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내를 달랬다. 그는 사랑의 언어를 어떻게 속삭여야 하고 어떤 때 마음을 밀고 어떤 때 당겨야 하는지 모르는 이였다.

“각하, 그때입니다. 가장 마음이 약해져 있는 그때가 마님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앤의 회색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더없이 진지하게 에드가에게 조언했다.

“내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오세요. 그리고 미안하다고 비세요. 마님은 그래도 이 외로운 곳에 기댈 곳은 각하뿐이라고 느끼실 겁니다.”

“……내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 했다. 에드가는 심장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요새 들어 자주 이랬으나 지금의 고통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네, 그때가 마님의 마음이 가장 열려 있는 때에요.”

“꼭 아침이여야 하나? 밤은…… 저녁때는 힘든 건가?”

앤은 침음했다. 방금 전까지 모든 걸 다 할 것처럼 굴던 에드가가 왜 이런 눈치없는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가 되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마님의 마음이 꽉 닫힐 거예요. 각하, 아침이 되자마자 열 일 제쳐 두고 마님께 가세요.”

에드가가 침묵했다. 이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건 앤이 되었다.

“바쁘다는 그런 소리를 하실 거예요? 네, 각하께서 바쁘신 것은 압니다. 알고 말고요. 하지만 이대로 영원히 마님과 차게 식어 무늬만 부부인 상태로 지내고 싶으시나요? 공과 사를 헷갈려서는 안 된다는 꽉 막힌 소리는 하지 마세요. 각하, 각하는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에요. 가정을 따뜻하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요. 마음의 짐을 모두 마님께 던져 버리고 일이라는 도피처로 도망쳐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른다고 탓하는 소리나 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최대한 차분히 설명하려 하였으나 답답한 마음에 마지막에는 감정이 실려 버리고 말았다. 앤은 그래도 에드가 일이 우선이라는 헛소리를 하면 그가 공작이고 뭐고 간에 그를 바른 길로 끌어내야 하는 친척으로서 멱살이라도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백지장처럼 변한 에드가의 얼굴에 다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지나칠 정도로 그를 탓했건만 그녀의 에디는 아무런 항변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절망했다. 다른 일은 다 가능하였으나 그 일만은 불가능했다. 그는 태어나 살면서 항상 자신이 항상 유능하다 느꼈다. 어려운 일은 없었다. 어딜 가든 그는 1등을 했다. 고난이 닥쳐도 그는 자신이 곧 이를 극복해 낼 것을 알아 힘들지 않았다. 심지어 저주를 받았을 때조차도 그는 괴로웠어도 그가 결국 저주를 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태어나 살면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무능하다 느꼈다.

“앤.”

에드가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를 찾아갈 수 없다면 그는 최악의 수 중 그나마 차악을 선택하기로 했다.

“비켜.”

앤은 에드가가 바로 루비카를 찾아갈 생각임을 알았다.

“안 돼요. 각하,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뭐로 들은 겁니까?”

“비켜.”

침실 문은 무척 두꺼워 안과 밖의 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도 혹시라도 시끄러운 소리가 침실까지 들릴라 그는 이를 꽉 깨어물고 협박하듯 말했다.

앤은 애원하듯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안타까웠다. 왜 에드가는 그녀가 알려 준 최선의 방법을 쓰지 않고 차악을 쓰려 하는 걸까.

“비켜, 앤.”

하지만 그는 공작이고, 그는 시녀장이었다. 앤은 그를 말릴 수는 있어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앤이 물러섰고 에드가가 공작 부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루비카는 자고 있었는지 어두운 방에는 숨소리만 쌕쌕 들릴 뿐이었다. 에드가는 가까운 촛대에 불을 붙이고 그녀가 있는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가 자고 있으면 깨워 이야기를 조금 할 심산이었다. 아직 12시까지 시간은 넉넉했다. 12시까지는 함께 있기로 약속했으니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어두운 촛불 너머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그런 결심은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았다. 울다 지쳐 잠들었는지 베갯머리가 축축했다. 눈가는 벌써 퉁퉁 부어 올라있었다. 그녀는 그런 처량한 모습을 한 채로 쌕쌕 잠들어 있었다.

이야기를 하자고, 내 마음을 들어 달라고 어깨를 흔들어 깨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패기롭게 앤을 밀어젖혀 방에 들어올 때는 언제고 에드가는 잠든 루비카 앞에 우뚝 써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으음.”

심지어 그녀가 몸을 뒤척이자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는 와중에도 뭐가 그리 서러운지 감긴 그녀의 눈썹에 이슬이 한 방울 맺혔다.

그는 도저히 그녀를 깨울 수 없었다. 엄두가 안 났다. 울다 지쳐 간신히 잠든 그녀를 깨우는 건 세상에 둘도 없는 파렴치한 일로 느껴졌다. 그는 한동안 석상처럼 우뚝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촛대를 옆 협탁에 제쳐 두 고개를 숙여 잠든 그녀의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잘 자.”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으나 그러다 그녀가 깰까 그러지 못했다. 그는 세상에 다시없을 패배자가 된 기분을 느끼며 방밖으로 나왔다. 앤은 루비카를 깨우지 않고 나온 그의 모습에 안도하며 내일은 평소보다 늦게 마님을 깨울테니 해가 뜨자마자 부인의 방으로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에드가는 조금 씁쓸히 웃을 뿐이었다.

* * *

잠결에 루비카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걸 느꼈다. 다정하지만 슬픈 시선이었다. 루비카는 이따금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아르망?’

그다. 이상하게 그런 직감이 들었다. 아르망은 현재 그녀 곁에 없고 또 찾을 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자기 앞의 사람이 아르망이라는 걸 알았다. 다정하고 따뜻하지만 슬픈……. 자신이 만난 사람 중 그런 온기와 느낌과 향을 가진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리고 당신이 아르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거짓말할 생각하지 말고 호통치고, 그를 꼭 껴안고 당신은 지금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목놓아 울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가 먼 미래를 기억하듯 그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눈이라도 떠서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오늘 하루는 마음 쓸 곳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피로와 피곤으로 찌든 몸은 눈꺼풀 하나 까닥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루비카는 답답했다. 아르망이 만약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가 바로 그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야속하게 느낄 수도 있었다.

그 사이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가 깊은 한숨을 토했다. 그는 루비카를 한참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이마에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그가 떠났다.

‘안 돼.’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소리에 루비카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 아득해졌다. 나는 비록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걸 먹고 잘 지내고 있지만 당신이 없기에 잘 지내는 건 아니라고, 그저 겉모습만 그런 거라고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이대로 나를 포기하지 마. 곁에 있다면 제발 말을 걸어 줘. 하다못해 힌트라도 줘. 떠나지 마.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마음과 달리 문은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루비카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절망보다 더 깊은 회한이 올라왔다. 서럽게도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데 눈물을 잘도 흘러내렸다.

그녀는 모든 것이 사라진 공허함 속에 파묻혀 잠들어 버렸다. 공허는 그 속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안식 속에 있다고 착각하게끔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무섭게도 실상은 표류하는 뗏목에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누워 있는 것과 똑같았다. 깊은 숙면에도 그녀는 더욱더 피로해지고 피곤했으며 무기력해졌다.

“마님, 마님.”

간신히 눈을 붙였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불렀다. 낭랑한 목소리, 매일 듣던 앤의 중후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님, 그만 일어나실 시각이에요.”

루비카는 딱 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떴다. 가뭄이라도 난 듯 눈가가 건조하고 아팠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 엘리제였다.

“여기, 찜질하세요.”

엘리제가 몸을 일으킨 루비카에게 세숫물 대신에 뜨거운 수건을 내밀었다. 눈을 감고 수건을 올리니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밤사이 얼마나 울었는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눈과 얼굴이 퉁퉁 분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앤은?”

“잠시 각하를 뵈러 집무실에 가신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녀도 에드가를 보러 집무실에 간 적 있다. 집사는 업무와 연구로 바쁜 공작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그녀를 내쫓았다. 그리고 그는 에드가가 좋아한다는 희한한 풀과 그릇을 가지고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지.

‘……앤은 들어갈 수 있는 건가?’

다시금 극심한 피로감이 썰물처럼 몰려왔다. 한숨 자고 나면 몸이 가뿐해져야 하는데 지금은 꼭 큰 병을 앓을 때처럼 피곤하기만 하다.

엘리제는 붓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하녀가 꼼꼼히 찜질을 하는 걸 지켜 본 다음 세숫물을 대령했다. 아직 앤에게서 시녀 일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 와중에 시중을 직접 드는 건 처음이다. 그것도 시녀장 없이 시중을 들려니 여간 긴장되는 게 아니었다.

루비카는 대령한 세숫물에 손을 잠시 담갔다 뺐다. 세수를 하고 옷을 입는 등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으나 영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님, 오늘은 무슨 옷이 좋을까요?”

루비카이 상태가 범상치 않음을 느낀 엘리제가 필사적으로 명랑하게 말을 걸었다. 예쁜 옷 중에 입을 옷을 고르고 거기에 어울릴 만한 액세서리를 선택하는 건 루비카가 무척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귀찮게만 느껴졌다.

결국 루비카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그냥 침실에 있을래.”

오후에 카나를 만나는 것 외에 다른 일정은 없다. 갑작스런 루비카의 말에 엘리제는 당황했다.

“그런, 마님. 하지만 아침 식사를 드시려면…….”

“입맛이 없어. 미안하지만 주방에는 먹지 않겠다고 전해 줄래?”

“어디 아프신가요?”

아프냐고? 루비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프지는 않다. 몸은 멀쩡하다. 그저 지독히 피곤했다.

“혼자 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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