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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79화 (79/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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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79화

“마님은 지금 많이 상심하고 피곤한 상태여요. 지금 억지로 깨워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시는 건 그분의 마음을 더욱 닫는 결과밖에 나지 않아요. 그렇게 밀어붙이시면 안 됩니다.”

앤의 간곡한 설득에 에드가가 정신을 차렸다. ‘그분의 마음을 더욱 닫는 결과밖에 나지 않아요.’라는 말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했다. 여유가 하나도 없어 루비카가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기분 나빠할지, 피곤해할지 그런 걸 고려할 여력이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유일한 조언자를 향해 구조요청을 했다. 평생 살면서 그는 어떤 문제를 풀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대부분 자신이 알아서 해결했다. 하지만 이 문제만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보다 산 날도 많았고, 관계를 맺고 사람을 챙기는 일을 평생해온 시녀장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앤은 이 저택에서 누구보다 루비카의 곁에 가장 충실히 지킨 사람이었다.

‘젠장.’

할 수 있다면 그녀 곁에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은 그였으면 했다. 할 수만 있었다면……그는 그리 했을 것이다. 얼마 안 되는 밤시간 동안만 그녀 곁에 있을 수 있는 건 고통이었다. 루비카를 만난 후 에드가는 지치지도 않고 매일 얼굴을 내미는 해를 향해 너는 쉬지도 않느냐며 욕했다. 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가끔씩 울컥 울컥 솟아오르는 울분과 화에 그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 분노와 울화는 한 사람만 보면, 또 그 한사람이 자신을 향해 웃어 주기만 하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까지 선사했다.

“각하, 마님을 어떤 식으로 설득했는지 제가 알려 주세요.”

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에드가에게 엄숙히 선언했다. 간신히 진정한 그는 루비카와의 대화를 어떠한 왜곡없이 낱낱이 고했다. 기억력만큼은 대륙 최고였기에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 하셨다고요?”

에드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앤의 표정이 묘해졌다. 에드가는 착실히 논리적으로 루비카에게 왜 모험단을 파견해야 하는지, 마영석을 구하는 게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설명했다. 그가 설득한 방식은 정공법으로 따지자면 잘못한 건 없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리 흘러가는 법은 아니었다. 잠잘 곳과 먹을 것이 충분하다고 해서 아이가 잘 자라지만은 않는다. 가끔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이곳 저곳 떠돌며 불안한 상태로 큰 아이가 더 잘 자랄때도 있었다. 옆에서 큰 사랑을 주며 역경을 함께 헤쳐 나가는 사람이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아주 작은 일도 크게 느끼기도 하고 매우 큰일을 사소하게 여겼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마님이 의견을 철회하시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했을 때, 각하는 사과하셨나요?”

기억을 더듬어 봤다. 하지만 아무리 더듬고 더듬어 봐도 루비카에게 사과한 기억이 없었다. 에드가는 그제야 자신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어떤 크나큰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제 내민 손을 잡아 주지 않아서, 그녀가 자신의 시선을 피해서, 그게 맺힐 정도로 가슴이 너무 아프고 야속해서 그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자신이 그녀의 마음에 어떤 생채기를 냈는지.

“……사과하지 않았네.”

앤이 아주 짧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를 탓하지 않았다. 에드가의 나이는 고작해서 25살이었다. 그 나이대란 논리적이고 비판적으로 굴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 뜻대로 흘러가리라 믿기 쉬웠다. 오히려 의외인 건 루비카였다.

‘부족한 예산안 때문에 충동적으로 결정 내린 줄 알았는데.’

루비카의 나이는 고작해야 22살이었다. 실제로는 호호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다 22살로 돌아온 거지만 앤이 그 사실을 알리 없다. 앤은 루비카가 마영석을 구하지 않겠다고 한 선언이 그녀의 신념이나 믿음과 관련되어 있을 줄 몰랐다. 22살은 가족을 이룬다면 이루고, 아이를 낳는다면 낳을 나이지만 누가 뭐라 하든 예쁘게 꾸미는데 한참 관심이 많을 나이였다. 사실 마영석을 찾는 것과 관련된 클레이모어가의 이야기는 학교에서 배워 익힌 자들도 뭐 그런 사치품 하나 구하는데 대규모의 기사와 모험가들을 파견하냐고 말하기 쉬웠다.

클레이모어 가문에서 나고 자라지 않는 이상 그 구습으로 보이는 일에 얽힌 가문의 자존심과 긍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현실적인 문제도 얽혀 있었다. 클레이모어의 친척들 중 많은 수는 전쟁무기 개발과 관련된 사업에 종사해 먹고 살았으나 이는 어느 정도 이상의 공학공부를 마친 똑똑한 이만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클레이모어가 똑똑한 자가 이끄는 가문이라고 하나 모든 이들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 기량이 뛰어나지 않는 이들을 위한 일자리도 필요했다. 마영석을 찾는 건 그런 자들을 위한 일 중 하나였다. 몇몇 친족들은 마영석을 구하기 위한 모험가를 모집하거나 알선하는 수수료를 통해 생계를 꾸렸다. 공작가는 모험단이 찾아온 마영석 중 가장 크고 좋은 것을 선점해 축제 때 공개하고 정원을 꾸몄다. 남은 마영석은 모험단과 이 일을 진행을 맡은 친족들의 몫이었다.

루비카는 마영석으로 인해 먹고 사는 친척들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예산은 부족했다. 마영석은 사치품이었다. 아마 다른 가문이었다면 루비카의 결정은 제법 그럴 듯 했을 것이다. 앤은 루비카가 그저 돈과 합리성만 추구하다 그런 결정을 내린 줄 알았다. 하지만 에드가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건 오판이었다.

‘……그리 여린 마음으로 어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실꼬.’

루비카라는 사람 자체는 여리지 않았다. 판단을 내릴 때는 단호했으며, 마음을 굳히고 의견을 말할때는 상대가 누구라해도 눈치보지 않았다. 에드가만 해도 그렇다. 그가 차가운 눈으로 누군가를 내리깔아 보면 그에게 돌진하다시피 했던 무수히 많은 영애들도 어깨를 움츠리며 사죄의 말을 하였다. 하지만 루비카는 에드가가 어떤 표정을 짓든 옳다고 생각되는 말은 하였다. 그녀는 따스히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제법 할말도 하고 제 뜻을 주장할 줄 아는 강한 사람이었다.

태도가 당당하고 쉽게 물러서지 않는 사람은 마음도 그처럼 단단해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흔히들 고개를 움츠리고 소심하게 눈치를 보는 사람이 여릴것이라 착각하기 쉬웠다. 하지만 앤은 태도는 그러면서 항상 자신의 이득만 추구하는 사람을 여럿 알았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눈치를 보는 자신의 행동을 내세워 소심하고 나약한 자신에게 어쩜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냐고 공격적으로 굴었다. 그런 사람은 전혀 여리지 않았다. 오히려 여린 행동을 무기로 다른 사람을 휘두르려 드는 공격적인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루비카가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고 움직일 때의 원동력은 그녀 자신의 향락이나 행복이 아니었다. 항상 타인 때문이었다.

그녀는 상대편에게 화가 날 때도 지켜보는 눈이 많으면 말을 최대한 아꼈다. 같은 귀족이 아닌 하녀가 하인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그랬다. 최대한 참으며 좋은 말로 이야기 했다. 루비카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감정을 참지 않고 분노한 그대로 화를 낸 건 딱 한번, 셰니에 부인이 별채의 소녀들을 무차별하게 체벌하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뿐이었다.

‘나도 이번은 오판했어.’

루비카는 항상 즐거운 듯 행동하고 주변의 분위기를 밝게 했다. 그래서 앤은 이번일은 그녀가 제 나이 또래처럼 즉흥적이고 생각 없이 굴어서 일어난 일 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에드가의 입을 통해서 루비카가 한 말을 종합해 보니 아니었다. 루비카는 깊이 사고하여 그녀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앤은 뒤늦게 후회했다. 루비카의 엄한 표정에 그녀를 말리는 데만 온 신경을 쓴 게 잘못이었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 입을 다무는 게 아니라 루비카에게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물었어야 했다.

“마님은 각하 때문에 그분의 신념을 포기하셨어요.”

“지금이라도 사과해야겠어.”

뒤늦은 에드가의 반성에 앤이 고개를 저었다. 사과를 하려면 그 자리에서 해야 했다. 하지만 에드가라고 해서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그도 아직 젊고 혈기왕성한 남자에 불과했다. 언제 불타는 감정을 누르고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알려면 많은 경험을 쌓아야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쌓을 때쯤이면 더 이상 불타는 사랑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나이 들기 마련이었다. 그게 삶인 거겠지.

“안 됩니다. 각하, 지금 들어가시면 마님의 마음을 더 닫게 만들 뿐이에요.”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갈 기세였던 에드가가 멈췄다.

“마님은 지금 극도로 피곤하신 상태입니다. 아마 그간 이곳에 오셔서 긴장했던 것이나 마음 졸였던 것이 다 터지셨겠지요.”

공작저로 온 루비카는 겉보기에 첫날부터 적응을 잘했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이었다. 먼 길을 따라 친한 하녀도 친지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대저택의 마님이 되었다. 마음속에 불안이나 긴장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루비카 같은 사람은 먼저 불안이나 불만을 호소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앤은 그래서 그녀에게 더욱 친절히 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앤은 어느ㅍ날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시녀장일 뿐이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루비카라면 나타난 마님에 놀랐을 아랫사람을 생각해 그간의 작은 불만이나 괴로움을 꾹꾹 눌러 담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였던 감정을 꾹 눌러 담았던 둑에 에드가가 구멍을 내었다. 모든 피로와 고통 괴로움을 일시에 터지고 말았다. 그럴 때는 구멍을 막고 그만두라고 호통치는 것보다 막힌 감정을 뚫는 게 나았다. 그러고 나서 보듬으면 더 돈독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러니 나라도 달래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걸 에드가가 알 리가 없다. 그는 애초에 남의 감정이란 걸 신경 쓴 적이 없는 남자였다. 그의 지위와 미모가 주는 가장 큰 권력이었다. 눈치라는 것도 신경을 쓴 적이 있어야 볼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이럴 때는 그냥 두셔야 해요. 각하께서 옆에 계시면 마님은 각하를 신경 쓰느라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리지 못하실 겁니다. 지금은 슬픔을 다 터트리게 두셔야 합니다. 각하, 아픈 사람을 붙들고 자기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배려 없는 행동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에드가는 깊이 탄식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최상의 환경을 제공했다 남몰래 자부하고 있었다. 부와 지위, 그리고 누구보다 그녀를 아끼는 시녀장. 루비카에게 쌓인 괴로움이나 피로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에게 웃어 주는 그녀가 좋았다. 자신의 돈으로 예쁘게 차려 입은 그녀를 보면 뿌듯했다. 적어도 베르너 저택에 있을 때보다 그녀를 훨씬 더 행복하게 해 줬고 앞으로는 더 기쁘게 해 줄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그러나 오만했다. 이전에는 누군가 자신을 가리켜 오만하다고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이 오만하기 짝이 없다고 인정했다.

“어차피 지금 가셔서 이야기하셔도 마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피곤하고 힘드셔서 왜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는지 각하께 화만 날 거예요.”

“……그건 안 돼. 절대 안 돼. 앤, 내가 어떻게 하면 돼지.”

에드가가 축 처지고 애닳은 목소리로 앤에게 애원하다시피 물었다. 앤은 급박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이 찌릿해졌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간절한 에드가의 모습에 일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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