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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78화 (78/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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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78화

어른스러움으로 따지자면 에드가가 자신보다 한 수 위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를 먹으면 철이 든다고 한다지만 세상을 살면 그렇지 못한 경우를 오히려 더 많이 봤다. 어떤 노인은 흉악하게도 감자 하나 더 먹겠다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비쩍 마른 아이를 팼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꼭 배려심이 깊고, 지혜롭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이나 생각을 도덕이나 세간의 예의에 대해 말하며 회피하며 그럴듯하게 만드는데 능숙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루비카는 고집을 피우며 꺾이지 않으려는 그녀를 설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던 에드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오히려 그녀를 달랬다. 쓰다듬는 손길과 입술에서 루비카는 위로를 읽었다. 굳은 마음을 꺾을 수 있는 건 다정함뿐이라고 했던가. 루비카는 에드가가 자신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가 포기하려는 게 무엇이었는지 몰랐다면 오히려 더욱 꼿꼿이 포기하려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이해했기에,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위해서 제발 포기해 달라 간청했기에 그녀는 겨우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에드가, 난 괜찮아.”

루비카는 오히려 자신에게 어린애처럼 메달린 에드가를 달랬다. 양보하고 물러선 것은 저인데 꼭 지금은 에드가가 포기하고 싶은 걸 놓기 싫어하는 어린애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금 좀 숨쉬기 힘드니까.”

그리 말하자 숨도 못쉴 정도로 그녀를 껴안고 있던 간신히 떨어졌다. 푸른 눈이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그 눈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루비카는 제 영혼까지 불탈 것 같아 숨을 삼켰다. 에드가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

“마님, 각하. 만찬 시간이옵니다.”

그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의 말이 문틈을 타고 울려퍼졌다. 두 사람은 너무 오랜 시간 규방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덧 창문에는 별이 떠올랐다. 더 기다렸다가는 식탁 위에 다 식은 요리가 올라오겠다 싶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방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심스레 말을 올렸다.

사용인들은 주인 내외의 식사가 끝난 후에 식사를 하는 게 원칙이다. 더 지체했다가는 하인들은 오늘 저녁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미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식사를 거부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루비카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눈물을 말끔히 닦아냈다.

“그만 가자.”

그리고 여전히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눈가는 여전히 붉었으나 감정을 모두 정리한 모습이었다. 에드가는 잠시 망설이다 그녀를 에스코트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여태 사이가 아무리 안 좋고, 티격태격 말싸움을 해도 명목상 부부였기 때문에 그녀는 항상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손을 잡지 않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힘없고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에드가는 벼랑 끝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듯 아연해졌으나 방금 그렇게 그녀의 뜻을 꺾고 왜 제 손을 안 잡아 주냐고 화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민망한 그의 손이 허공에서 떨어졌다. 루비카는 말없이 먼저 규방을 나섰다. 에드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그녀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어두운 표정의 두 사람이 식당에 들어섰다. 하지만 사용인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공작 내외는 분위기가 안 좋다가도 식사 중에 사소한 시비가 붙어서 싸우면 금방 방긋방긋 웃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어서 무거운 분위기를 참다참다못해 에드가가 폭발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식사가 다 끝나갈 때까지 에드가는 폭발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이제 무겁다 못해 푹푹 처질 정도였다. 공작은 인내심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마님과 관련되어서는 인내심이 뚝뚝 끊어지다 못해 없다시피 했다. 요 근래 보기 드물게 인내심을 발휘하는 에드가의 모습에 그들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거지?’

말없이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이는 공작 내외의 모습에 그들은 긴장했다. 비상사태였다. 공작 내외는 자주 목소리를 높였고, 종종 손가락질을 하며 서로 비난했으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건 싸움보다 장난에 가까웠으며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닭살이 돋았다.

그런데 이번은 서로 째려보지도, 비난하지도 않고 서로 없는 사람인 것처럼 조용히 자기만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건 심각하다. 부부싸움 주에서도 가장 강도가 세다.

다들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루비카가 한숨을 쉬었다. 시종들은 루비카가 에드가에게 왜 이러냐고 타박하기를 은근히 기대하였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러지 않았다. 시중 드는 하녀에게 입맛이 없으니 그만 먹겠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가는 그런 그녀를 잡지 않고 제 접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음식을 계속 먹은 건 아니었다. 그의 손은 포크와 나이프를 잡은 채 움직이지 않은 지 오래였다. 공기는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을 숨 막혀 죽을 정도로 죄어왔다. 식사 시중을 드는 이 중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적막 속에서 루비카가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한참 걸어가던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멈췄을 때 에드가는 황급히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놓았다. 그의 얼굴에 서린 초조함에 하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님께서 뭐라도 한마디 하면 각하는 당장 달려가 그녀를 껴안고 누가보든 말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태세였다.

“앤.”

하지만 복도에서 루비카가 부른 것은 에드가가 아니었다. 그녀의 옆을 항상 충실히 지키고 있는 시녀장이었다.

“……마영석 일은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전 년대로 진행했으면 좋겠어.”

“네? 네.”

곧이어 멈췄던 걸음이 총총 옮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과 하녀들은 잠시 서로 눈을 마주쳐졌지만 그들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을 알아들은 칼은 깊이 안도했다 에드가를 보고 멈칫했다.

텅 비어 있었다. 그는 텅 빈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더 이상 루비카가 복도를 걷는 소리도 안 들린 뒤에도 그는 미동없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다들 공작에게 뭐라 말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별안간 일어났다.

“빌어먹을!”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옆에 있던 냅킨을 집어 던지고 성킁성큼 공작 부인의 방을 향해 뛰어갔다.

* * *

루비카는 기계적으로 하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앤은 은근히 목욕을 권했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 그녀가 피로를 풀고 자연스레 언 마음도 녹이지 않을까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비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은 이것도 저것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참 멋스럽게 보였던 패널의 문양을 봐도 아무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모든 게 귀찮고 피곤했다. 간신히 잠옷을 갈아입고 가까운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침대까지 가는 것도 귀찮았다.

“마님,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다리를 주물러 드릴까요?”

눈치 좋은 하녀가 콘솔을 가져와 다리를 받쳐 주었다. 처음 루비카는 이런 극진한 대접에 당황했다. 적응하고 나서도 하녀에게 상냥히 웃으며 종종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루비카는 그런 미소를 지을 힘도 기력도 없었다. 그녀는 텅 비어 있었다. 무엇도 그녀에게 자극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고마운 마음이라는 것도 여유로운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괜찮아.”

루비카는 간신히 대답했다.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앤이 눈짓했다. 하녀들은 즉시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비웠다.

“마님.”

앤이 조심히 그녀를 부르고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루비카는 갑작스런 사과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앤이 무얼 사과하는지 바로 알았다. 앤은 루비카가 실망의 말을 쏟아내길 기다렸다. 하지만 잠시 침묵한 루비카가 꺼낸 말을 뜻밖이었다.

“아니야. 공작가를 생각해서 행동한 건데 내가 어떻게 시녀장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당신에게 뭐라 할 수 있겠어. 오히려 고맙지. 내가 멋대로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지 않을 수 있게 말려줘서.”

말은 그리했으나 루비카는 명백히 실의에 빠진 모습이었다. 앤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차라리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어찌 제 말을 에드가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를 수 있냐고 탓하길 바랐다. 루비카가 자신에게 마음을 닫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로 감당하기로 먹었으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마님,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게요.”

앤의 목소리가 떨렸다. 루비카는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란 지적까지 할 정도의 힘도 나지 않았다. 화를 내는 것도 상대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있을 때였다. 그녀는 이미 그런 모든 것을 버린 지 오래였다.

“아니야. 말려 준 게 오히려 고마운 걸. 다음에도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하면 부탁해.”

만약에 루비카가 앤의 마음을 찢다 못해 빻을 생각이었다면 그녀는 탁월한 선택을 한 거다. 하지만 루비카는 진심이었다. 목소리에는 어떤 빈정거림도 없었다. 앤은 여기에서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하는지, 생각을 다시 물러 달라는 정신나간 소리를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앤, 피곤해. 이만 침대로 가고 싶어.”

피곤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루비카가 말하며 손을 뻗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지 않아서 혼자 쇼파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체력이라면 자신 있었다. 그녀가 오후 일과 중 드레스에 땀이 살짝 스밀 정도로 열심히 정원을 산책을 한 것은 단순히 에드가가 권해서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닥칠 전쟁이란 큰 불행에 대비하기 위해 그녀는 걷고 또 걸었다. 지금은 험한 일을 하는 하녀만큼이나 힘이 넘쳐 났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늘 저녁은 모든 게 피곤하고 무기력했다. 그녀는 앤의 부축을 받아 쇼파에서 간신히 일어나 침대에 누웠다.

“그만 잘게. 불을 꺼 줘.”

눕자마자 눈이 감겼다. 에드가를 기다리고 자시고 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그를 기다려서 무엇 하는가.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데.

“……네.”

앤은 한참 망설이다 침대 옆의 촛불을 껐다. 그리고 조용히 이불을 루비카의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그때 ‘쿠당탕탕’하는 소리가 들렀다. 곧이어 성큼성큼 걸어오는 소리까지.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앤은 이를 꽉 다물었다.

늦다. 너무 늦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루비…….”

방문을 확 열고 루비카의 이름을 부르려 했던 에드가의 입술은 주름지고 투박한 손에 막혔다. 에드가는 그에게 항상 마음씨 좋게 굴던 앤의 엄한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잠드셨어요.”

야속한 말이었다. 그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지금은 새벽 1시는커녕 자정도 되지 않았다. 루비카가 침실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잠들기에는 이른 시각이다.

“잠시 이야기정도는 해도 되겠지.”

“안 돼요.”

앤이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정말 남자들이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안 된다니.”

앤은 더 길게 말하지 않고 어리둥절한 에드가의 팔을 잡아끌고 방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은 다음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에게 눈짓했다. 마영석과 관련된 이야기가 사소하게 밖으로 흘러나갔다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마님을 설득할 때 어떻게 하셨어요?”

에드가는 머뭇거렸다. 제 입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건 꽤 부끄러웠다. 어쨌든 부부사이의 대화가 아닌가. 그보다 침실에 홀로 있는 루비카가 신경 쓰였다. 그가 힐끗 방문을 보자 앤은 침음을 간신히 참았다. 에드가는 그녀를 당장에라도 밀치고 문을 활짝 열고 튀어들어갈 태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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