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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77화 (7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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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77화

“내 친척들은 어떻게 해서든 당신의 뜻을 꺾으려 할 거야. 당신은……아직 공작 부인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잖아.”

에드가가 그에게서 떨어지려하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이제부터 그는 잔인한 말로 그녀를 설득할 예정이었다. 현실을 하나씩 하나씩 짚을 때마다 무너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앤을 시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거야. 당신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어 어떻게든 그녀가 책임을 지게끔 만들 거야. 그래도 당신이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아마 공격할 수 있는 약점이란 약점을 모두 찾아 공격해댈 거야. 당신이 최근에 들인 시녀도 문제 삼아서 쫓아낼 거고, 지금 아론의 아카데미에 가고 있는 당신 여동생에 대한 신탁도 그만두라고 난리를 칠 것이며 그리고 가장 최악은…….”

에드가는 품안에 있는 루비카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걸 느꼈다. 그는 한숨을 토하고 기어코 다음 말 이었다.

“무기가 제대로 팔리지 않았을 때야. 당신이 하고자하는 것과 상관없이 판매는 부진할 수 있어. 그럼 대륙은 평화롭겠지만 대신 왕국 내 국민들 중 몇 퍼센트는 굶어 죽겠지. 그들은 그 책임을 당신에게 지우려 할 거야. 루비카, 당신은 한순간에 죄인이 되어 국외로 추방당할 수 있어.”

한바탕의 설득이 끝났다. 루비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에드가의 셔츠를 눈물로 적셨다.

이제 그녀는 그를 설득할 말을 더는 찾지 못했다. 세리토스 왕국민은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개발하는 전쟁무기 덕에 살아남고 있었다. 세상의 어떤 나라가 대륙의 끄트머리에 아무런 특산품도 나지 않는 멀고 먼 나라에 밀과 식량을 기꺼이 팔아 주겠는가. 납득해야 한다. 슬프지만 납득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는 건 쉽지 않았다. 그게 일반적으로 ‘옳다’라고 말해지는 길과 다르면 더더욱 그렇다. 아마 본인만 힘들고 끝날 문제였다면 루비카는 에드가의 말과 상관없이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으리라. 하지만 이 결정은 단순히 자신만 힘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에드가는 그녀의 결정으로 그녀가 아끼고 사랑하는 주변사람들이 다치리란 사실을 알려 주었다. 만약 혼자만 아픈 길이었다면, 혼자만 다치고 끝날 길이었다면 루비카는 아무리 설득에도 그 길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까지 다친다면 이야기를 달라진다.

‘그만. 포기해야해. 계속 밀고 나가는 건 아집이야.’

머리로는 납득했지만 마음은 납득하지 못했다. 포기하지 못한 마음은 미련이 되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루비카는 어른스럽게 눈물을 멈추고 에드가에게 알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그녀는 오래전에 인간이 아니라 신이 되었을 것이다.

“루비카.”

한동안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있었던 에드가가 조심스럽게 루비카를 불렀다. 작은 입을 놀려 그를 설득하려 들지 않으려는 걸 보았을 때 루비카는 납득한 듯 했다. 하지만 계속 어깨를 떨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불안했다. 고개를 숙이자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던 머리 가마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걱정되어서 미칠 것 같았다.

에드가는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래도 떨림은 진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지기만 했다. 울고 있는 누군가를 달래 본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가문을 책임질 독자로 강하게 컸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루비카.”

말없이 계속 우는 그녀의 모습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울지 말라느니, 당신 마음은 다 알고 있다는 그 흔한 설득의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바보같이 그녀의 이름만 불렀다.

미안했다. 왜 자신은 클레이모어 인가.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다른 평범한 귀족처럼 영지를 잘 다스리기만 하면 되는 가문이면 얼마 좋았을까. 그는 자신이 누군가가 흘린 피로 누군가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교육 받아왔다. 덕분에 그에게 클레이모어란 긍지를 가지고 지켜나가야 할 가문이었다. 그런데 스물다섯 살이 되어서 만난 이 여인이 그의 여태까지의 가치를 몽땅 흔들어대다 못해 바닥에 처박아 버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게 했다.

“루비카.”

에드가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조심조심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루비카는 두 눈을 꼭 감아 버렸다. 그녀는 차마 에드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지독히도 무섭고 두려웠다. 그가 울고 있는 자신을 보자마자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구냐고 호통이라도 칠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혀를 차는 소리도, 보채는 소리도, 호통 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아 주는 그의 손길만이 느껴졌다. 마치 어째서 그녀가 고집을 피우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루비카는 그가 자신의 뜻을 이해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선뜻 그녀의 선의에 손을 들 수 없는 것이 에드가의 위치이리라.

그쳐야 하는데……, 그쳐야 하는데 눈물이 더욱 쏟아졌다.

차라리 에드가란 사람을 아예 모르는 게 나았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잔인한 전쟁무기나 만들어 내는 잔악무도한 사람이라고 원망하면 되었다. 원망할 곳이 있다는 건 가끔은 마음을 추스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악의와 불행을 그 사람 탓으로 해 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만난 에드가는 시시때때로 그녀를 비꼬고, 높은 작위를 가진 남자답게 거만하였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혜택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고 있었고, 의무를 저버리려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만든 무기는 생명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어떤 나라는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만든 무기를 앞 다투어 사 내전을 일으키고, 서로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얼토당토 않는 명분을 내세워 싸웠다. 하지만 그 무기 덕에 인간은 마물을 쫓아내어 사람이 살 수 있는 농경지를 일궈 낼 수 있었고, 매해 굶어 죽는 사람이 넘쳐 나는 세리토스 왕국민들은 그로 인해 살 수 있었다.

에드가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무실에 틀어박혀 연구를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의 연구 결과에 따라서 한 해의 왕국민의 식탁이 달라진다. 루비카는 에드가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그가 ‘스텔라’를 발명해 낸 것은 분명 선의로부터 시작한 일이겠지. 세리토스 왕국은 바로 옆에 풍족한 황금 평원을 두고도 드래곤 이오스 때문에 건드리지 못한다. 아마도 에드가는, 세리토스 왕국의 국왕은 그 평원을 손에 넣어 더 이상 왕국민들이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그 끔찍한 무기를 개발해 낸 거지.

서러웠다. 모든 게 서러웠다. 그가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 서러웠다. 사람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은 또 왜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가. 그저 착하기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그저 선의만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이 미웠다.

“루비카, 루비카.”

아무리 다정하게 닦아도 루비카는 진정하기는커녕 끊임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에드가는 안타까웠다. 그녀에게 무기의 실효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설득하긴 하였으나 그녀가 한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그저 희귀하고 신비로운 마영석을 구하기 위해 스무 명 가까이나 되는 사람의 목숨을 잃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공작가의 위신을 위해, 오랜 전통이기에, 드래곤의 권역을 침범하면 사람 몇 명 죽는 것쯤은 응당 있는 일이기에 그는 그 일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그 주변의 어느 누구도 그에게 그 전통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다.

“루비카.”

에드가는 의자에 앉아 있는 루비카와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가만히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루비카는 눈을 뜨지 않았다. 꼭 자신을 영혼까지 부정하는 것 같아 서러웠다. 하지만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에드가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루비카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입안에 짭조름한 눈물의 향이 퍼졌다. 안타깝고 미안했다. 그러나 위로 그 이상 그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루비카.”

눈물의 궤적을 따라 입술이 눈꺼풀에서 뺨으로, 턱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어떤 미동도 없었다.

“루비카.”

한숨처럼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더 이상 갈색 속눈썹 아래에서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시린 액체는 떨어지지 않았으나 도톰한 입술은 여지껏 흘린 눈물에 촉촉이 젖어 있었다.

“루비카.”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게 싫다. 그녀가 눈물에 잔뜩 젖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싫다. 그녀의 눈물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부글부글 마음 아래에서 충동이 마그마처럼 들끓었다. 물러서야 했으나 이대로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루비카.”

결국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다. 애타는 듯 간절히 닿은 입술은 그녀를 격렬하게 탐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에 굴곡에 고인 눈물만 훔치고 떨어졌을 뿐이다.

“에드가.”

여태 미동없이 가만히 있던 그녀가 그를 불렀다. 그의 입맞춤에 대한 어떤 비난이나 나무람도 섞이지 않는 목소리였다. 오히려 다정했다. 그리고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이 움직이는 동안 에드가는 억겁의 시간이 지나는 줄 알았다. 방금까지 흘린 눈물로 투명해진 그녀의 눈동자는 꼭 진흙 속의 붉은 루비처럼 빛났다.

“에드가.”

그녀가 다시 그를 불렀다. 에드가는 저도 모르게 루비카의 손을 잡았다. 어쩐지 그녀가 자신 앞에서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루비카는 말갛게 웃었다.

“에드가.”

그리고 힘없이 미소 지었다. 여태 그녀가 짓는 미소는 항상 한낮의 햇살처럼 따사롭고 맑았다. 그러나 이번 미소는 추락해서 떨어지는 종달새의 마지막 날갯짓처럼 처량했다.

“내가 고집을 부렸어. 미안해.”

루비카가 한 발 물러섰다. 그의 입장을 생각해,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위신을 생각해 그녀가 물러섰다. 어떤 고난과 아수라장 속에서도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여태껏 지탱해 주었던 신념을 내려놓았다.

“루비카.”

에드가는 더는 참지 못하고 루비카를 꼭 끌어안았다. 강한 힘으로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안았건만 그녀를 그를 밀치지도 호응해 함께 껴안지도 않았다. 그저 바람에 흩날리는 종이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에드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루비카가 왜 그리 주장했는지 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야 알았다. 그는 몰랐다. 오직 논리와 효율만으로 그녀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에드가는 이제야 자신이 루비카에게 무엇을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있는지 알았다.

“괜찮아.”

루비카가 그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전쟁이 터지고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버리지 못했던 것을, 그녀는 지금 그토록 혐오하고 증오했던 남자를 위해 포기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그가 여태껏 지고 있었던 짐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닐 테지.

“오히려 떼 써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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