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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76화 (76/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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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76화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막대한 재산은 전쟁과 피 위에서 쌓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피로 쌓은 돈 덕분에 왕국민들이 굶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루비카도 그의 덕을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어릴 시절부터 먹었던 밀의 절반 이상이 외국에서 난 것이었다. 클레이모어가 없었다면 그녀는 채 열 살이 되기 전에 굶어 죽었을 것이다.

루비카는 반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제법 딱딱한 표정이었다. 그는 아마 자신을 대책 없이 깨끗이 살자는 소리나 하는 벽창호쯤으로 보겠지. 하지만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좀 더 그를 설득하고 싶었다. 자신은 모르지만 그라면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여전히 있었다. 그리고 이깟 눈치 없고 꽉 막힌 사람 취급당하는 것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공작가에서 개발한 무기가 없으면 수많은 왕국민이 굶어 죽는다는 건 알고 있어. 당신에게 전쟁 무기를 개발하지 말라는 소리까지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사람이 죽는 걸 최소화할 수는 없을까? 마영석을 구하지 않으면 최소는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살고 최대는 이삼백 명을 살릴 수 있잖아. 나는, 나는 당신만큼 똑똑하지 않지만…… 좋은 방법을 찾아 낼 수 있게 도울 게. 머리를 모으면 분명 방법이 나올 거야. 그리고 당신이라면 분명 좋은 방법을 찾아 낼 거라고 믿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지독히 피곤한 목소리였다. 그의 푸른 눈이 한없이 차가워졌다. 루비카는 더는 그 차가운 눈에서 이따금 느꼈던 햇살 같은 따스함이나 봄처럼 포근한 느낌을 찾을 수 없었다.

“……에드가.”

“마영석을 찾는 건 우리 가문은 오래된 전통이야. 그 일에 자긍심을 느끼고 있는 친척들이 많아.”

“하지만…….”

“그리고 다른 방법이라고 했지? 안정성이나 효용을 검증하는 거라면 물론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마영석을 찾으러 가는 전통이 시작된 건 드래곤의 권속과 싸우는 방식이 가져다주는 홍보효과 때문이야. 루비카, 이 전통과 관련된 역사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어?”

루비카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가정만 잘 꾸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나라에서 한 사람의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은 제한적이었다. 사실 피후견인에게 성별을 가리지 않고 고전과 역사까지 가르치는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특수한 편이었다. 보통은 어느 정도 기초 소양정도만 배우고 말았다. 그것도 글은 <귀부인의 지침서>정도만 읽을 수 있고, 제 이름만 제대로 사인할 줄 알면 됐다고 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역사 같은 것보다 가족의 옷에 수놓을 자수나 농번기나 드문 축제일에 가족을 즐겁게 할 피아노를 잘 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겼다.

오히려 루비카는 무역상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의 일을 돕느라 셈을 비롯해 각종 수입물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워 들어 명망 높은 귀족 집안의 영애보다 다양한 지식을 쌓을 기회가 많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것도 잡다한 지식에 불과했다. 클레이모어가의 시초에 대해서는 귀족도감에 실린 간단한 사실과 왕국의 전설에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만 알고 있지 구체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몰랐다.

“처음부터 클레이모어에서 만든 무기가 잘 팔렸다고 생각해? 어느 미친 나라가 대륙의 끄트머리에 있는 발명가가 만들어 낸 검증도 안 된 무기를 구입해? 지금이야 마석의 에너지가 대단하다는 걸 알지 그 때는 그냥 시커먼 돌덩어리에 불과했어.”

폭풍같이 말을 내뱉은 에드가는 아까 루비카가 따라 놓은 먹다 만 음료를 다시 들이켰다. 쓰다. 다 식어 빠져서 그가 싫어하는 계피향이 더 짙어졌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자 루비카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어느새 촉촉해진 눈가에 에드가는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그냥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나약해지면 안 된다. 만약 그녀를 말리지 못하면 그는 들개 같은 친척들이 그녀를 물어뜯는 걸 봐야 했다. 절대 두 눈 뜨고 그 꼴은 못 본다. 상처를 줘도 내가 주는 게 낫지 애먼 사람이 끼어드는 건 사양이다.

“초대 클레이모어는 무기를 완성한 뒤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서 마물을 처치해 봤자 비싼 값에 팔 수 없다고 판단했지. 그는 국왕과 힘을 합쳐 기사단을 이끌고 드래곤의 권역에 쳐들어갔어. 다들 미친 짓이라고, 모두 죽어 나올 거라고 말했지만 어차피 무기를 팔지 못하면 겨우내 굶어 죽을 예정이었던 그들은 용감했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나? 당시 손꼽히는 대 기사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악명 높은 오크 대장을 쓰러뜨리고 수많은 농민을 물여 죽여 골치였던 그리핀을 몇 마리나 고꾸라뜨렸네. 지금이야 그런 마물쯤은 아무도 겁내지 않지만 당시에는 군사제국이었던 르타 제국도 제대로 상대하려면 몇 사단을 끌고 가야 했던 그 마물을, 클레이모어는 채 50명이 되지 않는 왕의 기사단을 끌고 단번에 쓰러뜨렸지.”

에드가가 자랄 때부터 들었던 무용담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친척들도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었다. 그들은 그 무용담을 사랑했고 또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의 조상은 단순히 설계나 하던 샌님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기꺼이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 일화는 수많은 클레이모어의 가슴에 각인되어 넘어뜨릴 수 없는 긍지와 자존심을 남겼다. 천년을 조금 넘게 내려와 단단해진 자존심이었다. 누군가가 그 단단한 자존심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그들은 미쳐 날뛰는 한 마리의 개가 되고도 남았다.

“그 일이 소문 나 초대 클레이모어께서 만든 무기는 엄청난 가격으로 불티나게 팔렸어. 다들 밤을 새서 공장을 돌려도 물량이 부족할 정도였다고 하지. 그 무기를 만든 덕에 밀을 사들일 수 있었고 그해 세리토스 왕국에선 처음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어.

만약 초대 클레이모어가 쓰러뜨린 마물이 드래곤의 권속이 아니라 그저 그런 마물이었다면 그 정도의 파급력은 나오지 않았을 거야.”

루비카는 눈을 깔았다. 에드가가 자신의 편을 들어 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의 입장도 이해는 되었다. 그래도 설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찾으려 머리를 쥐어짜도 찾을 수 없었다. 루비카는 이만 물러서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리 명령하는 머리와 달리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집이야. 그만…… 물러나야 해.’

하지만 납득했다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떨리는 입술을 꽉 다물고 있던 루비카가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에드가의 푸른 눈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에게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만 어른스럽게 굴어야 한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많다. 자신만 해도 평생 깨끗하게 살아왔냐면 그러지 못했다. 에드가는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지금은 초대 클레이모어가 살고 있었던 때가 아니잖아. 마석의 에너지나 클레이모어에서 만들어 낸 무기가 얼마나 뛰어난지 이제는 굳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다고.’

아무리 마음을 달래려고 해도 그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꼭 목숨을 걸어야만 하나? 좀 더 안전하게 하는 방법은 없는 건가?’

결국 루비카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감정이라는 건 쉬이 제어되는 게 아니었다. 어른스럽다는 것, 나이답게 군다는 게 뭔지 가끔은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아무리해도 납득할 수 없는데 그냥 물러서는 게 어른스러운 걸까?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이 방울방울 뚝뚝 떨어졌다. 납득해야 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마영석을 구하기 위해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고, 잃지 않아도 될 가족을 잃게 된 사람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긋지긋하다. 사람이 죽는 건 정말 많이 봐 왔다. 정말 많이 봐서 지긋지긋하다. 더는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 더는 누군가 소중한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

‘마석만 아니었어도…….’

항상 마석이 문제였다. 그걸 손에 넣는 나라와 개인은 큰 부를 얻을 수 있다. 스텔라로 인해 전쟁이 크게 번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드래곤은 대게 자원이 풍부한 곳을 권역으로 삼기 마련이었다. 이베르는 세리토스 왕국보다 더 순수하고 강한 힘을 내재한 마석이 있다고 알려진 산맥에 자리 잡았고, 이오스는 심는 족족 몇 배에 달하는 수확을 낼 수 있고 수많은 희귀식물이 자라고 있는 황금평원에 자리를 잡았다. 인간은 넘치는 자원을 가진 그들의 땅을 탐내었으나 대항할 힘이 없어 그저 침만 삼킬 뿐이었다.

그러나 스텔라가 나타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졌다. 인간은 드래곤의 권속은 물론 드래곤과 직접 싸울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 드래곤은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으나 인간은 달랐다. 드래곤의 땅을 손에 넣는 순간 대륙의 판도가 바뀐다. 길고 지루한 전쟁. 젊고 가난한 사람이 목숨을 잃어가는 동안 귀족을 비롯한 이들은 마석과 풍요로운 자원으로 배를 불렸다.

그 비극과 마영석을 구하기 위해 가야 하는 모험가의 모습이 겹쳐졌다.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역시 불쑥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정말 필요한 희생일까.’

나라를 위해 세상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그리 알고는 있지만 정작 배를 불리는 건 그리 목숨을 건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을 사지로 내몬 사람들이었다. 평생 먹고 살 보상금?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그런 돈보다 그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이 더 소중하리라.

“루비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루비카를 에드가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루비카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가녀린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그에게는 그저 말을 들어주지 않아 화난 것 같은 아이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나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루비카.”

아까의 엄한 기운은 다 사라진 채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루비카는 무슨 대꾸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잘못 대답해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수 없다면 아마도 엉엉 울고 말겠지. 도저히 그런 짓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루비카.”

에드가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아까보다 좀 더 가까운 곳이었다. 곧이어 큰 손이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달래는 듯한 손동작에 오히려 서러움이 터졌다. 고약한 꼴이 보이기 싫어 손마디가 새하얘지도록 손을 꼭 쥐었으나 소용없었다. 곧 에드가의 손이 루비카의 얼굴을 감싸고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의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그녀의 눈이 들어왔다. 가슴을 쥐고 싶을 만큼 심장이 아파왔다.

“우리 가문은 역사가 오래된 만큼 전통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해. 마영석을 구하는 건 초대 클레이모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일 중의 하나야. 당신이 그걸 깨려하면 다들 엄청나게 반발을 할 거야. 루비카, 나는……그대가 그런 거센 비난을 받게 두고 볼 수 없어.”

“하지만…….”

루비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자신이 얼마나 답답하고 어리석게 보일지는 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까지 설득하고 싶었다. 그의 눈에 아주 약간이나마 실린 온기와 망설임에 모든 걸 걸고 싶었다.

“비난 받아도 좋으니까 시도라도 하게 해 줄 수 없어? 당신은 그냥 가만히 있거나 모른 척해도 돼. 그냥 내게……한번 설득이라도 할 기회를 줘.”

“루비카!”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으스러지듯 그녀를 껴안았다. 가슴이 아팠다. 그녀의 뜻이 옳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말려야 하는 자신이 비참했다. 하지만 그녀가 불구덩이로 스스로 걸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안 돼. 제발……, 하지 마. 해 봤자 당신은 상처만 입을 테고 변하는 건 없을 거야.”

숨 막히는 와중 루비카의 귀에 그의 말이 꽂혔다. 이상하게 그녀를 위하고 달래는 말인데 비수라도 맞은 듯 가슴이 아팠다. 여태 들었던 그 어떤 날카로운 말보다 다정한 그의 말이 그녀를 더욱 아프게 했다.

“……에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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