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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75화 (7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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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75화

“에드가, 나는…….”

루비카는 심호흡을 했다. 에드가가 자신에게 호의로 그런 제안을 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 또한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괜한 비난 같은 거 받아 봤자 마음도 힘들고 괴로울 뿐이다. 그녀가 당초 계획한 사치스럽다거나 분수를 모르는 공작 부인이라는 소문은 아마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은 곳에서 은은히 퍼질 것이다. 이런 평은 집요하고 끈질기지만 아예 무시하고 살고자하면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마영석 건은 달랐다. 그녀의 결정이 알려지면 클레이모어의 영향력 아래 있는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겠지. 아마 근본도 없는 여자가 가문을 망치려 한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물론 루비카는 그래서 자신을 쫓아내 주면 오히려 감사했다. 다만 그렇다고 자신을 보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삿대질을 하는 사람을 보는 게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에드가가 제시한 길은 분명 쉬운 길이었다. 루비카는 마음만 먹는다면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갈 수 없었다. 루비카의 양심이 완벽히 깨끗하거나 성인 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긴 삶을 살면서 때로는 무언가를 포기할 줄도 알았고, 때로는 모른 척 눈 감을 줄도 알았다. 살기 위해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보면 심판하기 보다는 그 자가 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하려 노력했고 아주 가끔은 공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루비카는 결코 투명할 정도로 맑고 결백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마영석을 구한다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백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적당히 회색으로 물든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물러설 수 없는 선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었다.

마영석을 구하겠다고 결정하면 그 때문에 대규모의 모험단이 잠자고 있는 드래곤 이베르의 권역을 침범하게 된다. 매년 통계를 보았을 때 가장 희생이 적었던 때는 20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심할 때는 300명이 죽었다. 루비카는 도저히 이를 못 본 척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아무리 마영석이 아름답다고 해도 사람의 생명보다 중하지 않았다.

“마영석을 구하지 않고 싶어. 그럼 예산 문제는 해결될 거고 또…….”

“루비카!”

그가 그녀의 말을 급히 잘랐다. 이렇게까지 굽히고 들어갔는데 그가 원하는 걸 하나도 들어주지 않는 그녀가 야속했다.

“내 개인 재산을 쓰는 것 때문에 이래? 그런 걸로 자존심 상해하지 않아도 돼. 또,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뭐라 하지 않을 거야. 그 돈은 철저하게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고. 나는 오히려 공작 부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당신을…….”

심장이 아렸다. 그녀는 그를 얼마만큼이나 비참하게 해야 만족하는 것일까.

“배려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니 이제 그만 그런 우울한 얼굴을 집어치우고 날보고 웃어 줘.

그러나 루비카는 그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웃기는 했다. 난처하듯이.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냐.”

납득할 수 없는 빛이 그의 얼굴에 흘렀다. 루비카는 숨을 헐떡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최대한 차분히 에드가에게 설명했다.

“마영석은 잠들어 있는 드래곤 이베르의 권역에서만 구할 수 있잖아. 이베르의 권속들은 잠든 주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흉포하기 짝이 없다고 알고 있어. 작년 한 해만 해도 마영석을 구하러 간 모험단 중 스무 명 가까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어. 그리고 십년 전에는 상위 권속을 건드리는 바람에 이백여 명이 죽었고…….”

그녀가 마영석을 구하지 않으려 하는 건 예쁜 옷이나 돈 때문이 아니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꺾이지 않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에드가는 목이 타는 걸 느꼈다.

‘하인들을 모두 내보낸 게 다행이군.’

원래는 루비카가 기뻐하는 틈을 타서 함께 지내는 시간이나 포옹의 규칙 같은 걸 조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하는 김에 그녀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루비카는 기뻐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다. 에드가는 꼰 다리를 풀고 자세를 바로 했다.

“루비카, 마영석을 구하러 드래곤의 권역에 들어가는 건 우리 가문의 시초부터 시작된 오래된 전통이야.”

“사람의 목숨보다 전통이 귀할까?”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뜻을 안다. 그녀의 뜻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귀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삶을 살 수 없다.

“모험가들은 원래 위험한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야. 이미 연초에 질레한 경이 수색대에 계약금을 넘겼어. 당장 마영석을 구하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먹고 살 일이 막막해져.”

“다른 일을 구해 줄 수 없을까? 이런, 사는데 꼭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 때문에 사람의 목숨을 걸 필요가 있는지 난 모르겠어.”

“그들은 그게 일이야.”

“하지만 죽으면…….”

“사망자에게는 남겨진 가족들이 앞으로 먹고 살 길이 없도록 보상금을 넉넉히 주고 있어.”

에드가의 말에 루비카는 울컥했다. 돈, 돈, 돈. 그는 지나치게 돈으로 세상의 모든 갈등을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녀와의 결혼도 그랬고, 방금 전의 태도도 그랬다. 돈만 안겨 주면 모두 헤벌레 웃으며 좋아할 줄 아나.

“그게 남겨진 가족들이 바라는 바라고 생각해? 그 사람들은 그런 돈 보다 자기 가족이 살아 돌아오길 바랐을 거야!”

그가 마치 무슨 생소한 생물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 루비카는 그가 자신을 꼭 결백하게 구는 신전의 사제처럼 취급한다고 느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쨌든 삶의 절반 이상을 수도원에서 보냈다. 제대로 사제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어깨너머로 듣고 배운 것이 많았다.

“루비카,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어떻게 시작하고 커졌지?”

에드가가 억양 없이 말했다. 루비카는 한참 마영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와중에 그가 갑자기 공작가의 역사에 대해 질문해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클레이모어의 역사는 세리토스 왕조보다 유명했기에 그녀는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다.

“마석의 에너지를 이용한 무기를 개발해서 커진 가문이지.”

“그래, 그리고 그 무기 덕에 세리토스 왕국의 수천만의 국민들이 굶어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거고.”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하려는 순간 그의 푸른 눈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마영석을 구하러 가는 모험가들에게는 아직 테스트를 하지 못한 새로운 무기를 지급하지. 그들은 드래곤의 권역에 있는 마물이나 권속을 해치우는 데 그 무기들을 써. 대포를 비롯해서 작은 폭탄이나 총, 그리고 권속의 눈을 피하게 해 주는 보호막. 실전에서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는지, 마물의 공격을 어느 정도까지 막아낼 수 있는지. 모험가들이 먼저 써 보고 개선해야 할 점을 찾아. 그냥 단순히 공작가의 부를 자랑하고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마영석을 찾는 전통 따위가 생긴 게 아니야.”

루비카의 적갈색 눈이 흔들렸다. 에드가는 그의 설명이 그녀를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상의 모든 일이 선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에는 필요악이라는 게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루비카가 마른 입술을 들썩였다.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그녀가 마영석을 구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것은 한순간의 충동이 아니었다. 아직은 아무도 체험하지 못한 그녀의 지난 삶을 관통하는 강렬한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바닥에 쓰러진 순간 그녀를 끌어올렸던 희망과 삶에 대한 아이러니.

그 기억이 없었다면, 그저 지금의 평화로운 시대만 알고 있었다면 루비카는 쉽게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4년 뒤에 당신이 개발한 무기 때문에 이 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말거야. 나는 그 전까지 조금이라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살리고 싶어.’

할 수 있다면 루비카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게다가 모험가처럼 비상시에 살아남을 수 있는 온갖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중하다. 그런 사람 한 명은 못해도 주변의 스무 명은 살릴 수 있다. 올해 목숨을 잃지 않은 모험가는 분명 4년 뒤에 그들의 가족을 전쟁터에서 살아남게 하리라.

하지만 그런 말을 해 봤자 미친 사람 취급만 받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에드가가 믿어 주리란 확신도 없었다. 미래의 기억이 없다면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함을 안고 필요악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며 물러났었겠지. 할 수만 있다면 에드가에게 전쟁무기 같은 거 개발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결국 그 때문에 이 나라가 멸망할 테니 당신이 하는 짓은 아무 소용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무기를 개발하지 않으면 당장 다음해, 아니 올해 겨울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넘쳐 날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그런 테스트를 꼭 마영석을 구하는 모험단을 통해서 할 필요가 있을까? 다른 테스트로 대체하는 방법도 있잖아. 남부지방은 아직도 마물을 퇴치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까 그 쪽에 실전 테스트를 명목으로 지원한다던가.”

루비카는 작은 머리를 굴려 이런저런 대안을 에드가에게 늘어놓았다. 지금 자신이 꺼낸 말들이 적절한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는 쪽으로 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에드가는 작은 힌트만으로도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루비카.”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에드가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찾아보면 사치품인 마영석을 구하러 모험단을 보내는 방식이 아니라, 좀 더, 좀 더 희생을 줄이고 사람을 불필요하게 죽는 일이 없게…….”

에드가는 루비카가 필사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모진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에 화가 났다. 하지만 해야 하는 소리였다.

“루비카,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지? 클레이모어는 무엇을 통해 돈을 벌지?”

아까 했던 질문과 비슷하다. 반쯤은 애처로울 정도로 말을 주워 담는 그녀의 애달픈 목소리를 그만 끊고 싶은 의도도 있었다.

“……마석을 이용한 전쟁무기 개발.”

“그래. 당신은 내게 사람을 죽이지 말자고, 최대한 누군가를 살리는 방향으로 결정하자고 말하고 있지만 솔직히 이미 당신은 피가 묻은 돈을 썼어. 당신이 입고 있는 건, 먹고 있는 것, 심지어 자고 있는 것까지 피가 흐르지 않은 게 없어. 클레이모어가 돈을 버는 방식이란 그런 것이니까. 다른 나라의 피를 흘리게 해 제 나라의 백성을 배불리 한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는 듯 했다. 에드가는 최대한 빈정거리지 않고 사실을 나열하고자 노력했으나 소용없었다. 루비카는 그가 자신에게 위선 떨지 말라고 귀에 대고 외치는 듯이 느꼈다.

아까까지 그를 설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조잘거렸던 입술이 꾹 닫혔다. 그녀는 에드가에게 그럼 무기 개발 같은 일 따위는 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세상 물정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았다. 세상은 항상 크고 작은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대륙의 남쪽은 아직도 마물과 인간이 싸우고 있었고, 상속권과 관련되어 권리를 주장하느라 긴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 왕국들도 있었다. 오히려 대륙의 끄트머리에서 세리스 산맥을 끼고 아래로는 이오스의 권역, 위로는 이베르의 권역에 둘러싸여 있는 세리토스 왕국은 덕분에 전쟁으로부터 안전한 편이었다. 풍요로운 평원에 이오스가 자리 잡은 바람에 왕국 내 식량사정이 지나치게 안 좋다는 점만 빼면 세리토스는 몇 백 년 동안 평화로운 몇 안 되는 왕국 중 하나였다.

‘그리고 유일하고 가장 큰 단점인 식량 사정은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개발하는 전쟁무기를 통한 무역으로 해결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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