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74화 (74/212)

# 7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74화

“불쌍해라.”

루비카가 라떼가 안쓰러워 한마디 덧붙였다. 아무래도 또 루비카에게 점수를 잃은 것 같았다.

‘까다롭기가 그지없군.’

에드가는 루비카를 내려다보며 그리 생각했다. 그녀는 뭘 하든 그에게 실망했다. 다른 사람은 그토록 쉽게 그녀의 웃음을 샀는데 자신은 도통 웃음을 살 수 없었다. 그게 화가 나 잠시 서서 내려 보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정수리 가마가 귀엽군.’

키가 큰 에드가가 그녀를 노려봐 봤자 보이는 건 루비카의 갈색머리에 자리 잡은 동그란 가마뿐이었다. 별거 아닌,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머리 가마였는데 난데없이 웃음이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았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그녀는 그만 보면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는 그녀의 가마만 봐도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객관적으로 못생겼으면 억울하지 않지. 그는 객관적으로 왕국 내 최고 미남이었다.

‘대체 그…… 아르망인지 뭔지 하는 놈은 어떻게 이 까다로운 여자의 마음을 얻은 거야.’

떠올리기도 싫어서 아예 기억에서 없애 버리려 했던 놈의 이름이 머릿속에 툭 튀어나왔다. 아르망, 흔하디흔한 이름이다. 심지어 에드가의 긴 정식 이름 중에도 하나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그리 불리었다. 대체 아르망이라는 작자는 어떤 놈이 길래 루비카의 마음을 얻은 걸까. 찾을 수만 있다면 비법을 알려 줄 때까지 가둬 놓고 싶은 심정이다.

“무슨 일이야?”

루비카가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커피가 담긴 주전자 대신 계피와 생강, 꿀을 한가득 넣고 끓인 주전자를 들어 새로운 잔에 따라 줬다.

“당신이 좋아하는 그 이상한 건 여기 없으니 이걸로 참아.”

“그건 이상한 게 아니야. 이것보다 몸에 훨씬 좋아.”

“그냥 풀 말린 거 같은 걸 우린 게 훨씬 좋다고? 에드가, 감기예방에 이것보다 더 좋은 건 없어.”

에드가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항상 마음은 먹지만 루비카와 이야기하면 항상 투닥거렸다. 하지만 루비카가 꾸지람하듯 말하는 게 영 싫지 않았다. 어쨌든 몸에 좋은 것을 내어주다니 조금이나마 그를 생각해 주는 것 같아 기분 좋았다. 비록 계피는 싫어하나 그는 루비카가 준 잔을 쭉 마셨다.

“계피 싫어해?”

다 마신 그가 인상을 살짝 쓰자 루비카가 물었다.

“그런 편이지.”

그의 대답에 루비카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왜 그러냐는 듯 그가 고개를 살짝 앞으로 빼어 까닥 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무언가를 떨쳐내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찝찝한데…….”

“조금, 아는 사람이랑 입맛이 비슷한 것 같아서.”

루비카가 씁쓸히 웃었다. 눈 가에 그리움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에드가는 가슴 한쪽이 아찔해졌다. 그럴 때마다 루비카와 자신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높고 두터운 벽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점잖게 웃고 상황에 따라 앳된 것처럼 행동하였으나 때때로 이런 오래 산 사람만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때마다 에드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계피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아.”

위로를 하려고 했는데 형편없는 소리밖에 안 나왔다. 이게 비꼬는 거지 뭔가. 그의 속도 모르고 루비카가 쓸쓸히 웃었다.

“그렇지. 딸기를 좋아하고, 계피를 싫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내가 딸기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스티븐이 가져온 케이크에서 다른 건 하나도 손대지 않고 딸기만 쏙쏙 골라먹었잖아. 요 편식쟁이 공작님.”

“풉.”

마지막 말은 그의 돌아가신 할머니가 자주 하던 소리였다. 그녀는 에드가가 태어난 순간부터 공작이라고 불렀다. 버릇 나빠진다는 주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표현이라 그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금까지 불안했던 마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당신 가끔 할머니 같은 소리를 해.”

보통 여자라면 이 대목에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화를 냈어야 한다. 그러나 루비카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중요한 비밀이라도 들킨 듯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맞받아치지 않자 민망해 헛기침을 했다. 대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여자다.

“루비카, 올해 마영석을 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들었어.”

그의 말에 루비카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그녀는 오늘 오후 앤과 예산에 대해서 나눈 이야기가 에드가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번이 두 번째다.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공작저는 겉보기는 깔끔한데 쥐가 많이 사나 봐.”

“쥐라니?”

에드가가 당황했다. 루비카는 그 모습에 더 화가 났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한단 말인가. 당장 멱살을 잡고 이 따위로 굴면 내가 네 눈치를 보느라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겠냐고 외치고 싶었다. 대신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리 저리 벽을 타고 낮말을 듣고 옮기는 쥐가 많으니, 아무래도 대청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러려면 당신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겠지요?”

에드가의 머리에 경보의 뿔피리가 불었다. 말 속에 뼈가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데 존댓말까지 썼다. 이건 단단히 화가 났다는 신호였다.

“미안하오.”

“당신이 왜 사과해요. 저택의 청결을 신경 쓰지 않은 내 잘못이잖아요.”

“정말 미안하오.”

사색이 된 에드가가 고개 숙여 거듭 사과했다.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에 루비카는 슬쩍 화가 풀렸다. 요즘 들어 에드가가 좀 솔직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사안이 워낙 크기도 컸다. 그녀도 당장 공표하기 전에 에드가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을 하긴 했었다. 엘리제를 시녀로 데려오는 것도 그렇고 그는 확실히 그녀에 비해 머리가 좋았다. 그라면 그녀의 뜻을 알아 주고 모두를 설득할 좋은 방법을 찾아 줄 것 같았다.

“내가 한 결정이 좀…… 주변이 걱정해서 당신에게 말을 옮길 만도 했지.”

한풀 꺾인 그녀의 목소리에 에드가가 안도했다. 이제는 루비카가 존댓말을 쓰면 소름이 돋는 수준이 아니라 두려웠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당신과 이야기도 하지 않고 멋대로 진행할 생각은 없었어. 좀……, 당신 머리가 나보다 월등히 좋기도 하고.”

루비카는 머뭇거리다 한마디 보탰다. 솔직하게 그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좀 이상했다.

하지만 에드가는 루비카가 자신에게 마영석을 구하지 않아도 될 방도를 찾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지 몰랐다. 그는 그녀가 오직 예산에 대해서만 걱정하는 줄 알았다. 이건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가 경솔했다.

왜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고 말았을까. 머리 좋은 그라면 금방 그녀의 뜻을 알아채고도 남았을 텐데……. 이유는 단순했다. 에드가는 지나치게 긴장했다 일시에 그것이 탁 풀린 정도를 지나쳐 루비카의 칭찬에 우쭐해졌다. 우쭐해진 사람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쉽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한껏 너그러운 체를 했다.

“올해는 당신이 이 저택에 처음 온 해라 챙길 것도 많고 돈 들어 갈 것도 많은데 내가 무심했어.”

그리고 기다렸다. 루비카가 그에게 걱정을 토로하고 기대 주길. 혹 옷을 사는데 누가 눈치를 주면 어쩌나, 자신이 사치를 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다는 말을 하면 에드가는 한껏 격앙된 어조로 그녀에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북돋아 줄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루비카는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따뜻한 음료를 마셨다.

“괜찮아. 그 문제는 마영석을 구하지 않으면 다 해결되니까. 그래, 에드가. 사람들을 설득할 좋은 방법이 없을까?”

“뭐?”

에드가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언제나 그녀는 그의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그의 실낱같은 기대를 깨는 수준을 떠나 이건 머리 위에 바로 폭탄을 던진 급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루비카?”

루비카는 아차 했다. 여태 에드가가 포옹이나 이마 키스 같은 걸로 거래를 하려 들어서 그렇지 항상 그녀의 뜻에 따르거나 보탬이 되는 쪽으로 행동했다. 그래서 그만 이 건도 그가 자신에게 동의할 거라 생각했다. 마영석을 구하는 건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위신과 관련 있는 오랜 전통이었다. 에드가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공작이긴 했으나 전통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었다.

‘침실만 해도……, 공작의 방에 침대를 넣으면 서로 피곤하지 않게 따로따로 푹 잘 수 있는 걸 전통이라는 이유로 굳이 새벽1시까지 내 방에 있다 자기 방에 가는 피곤하고 귀찮은 짓을 하고 있지.’

그런 에드가가 공작가의 전통을 깨는 일을 아무런 설명 없이 순순히 동의할 거라 기대했다니……. 사실 공작가의 전통을 떠나서 그런 큰 건을 순순히 동의하리라 생각하고 말을 꺼내는 건 오만한 태도였다. 루비카는 자신이 주제넘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왜 그리 생각했을까? 왜 그가 그런 큰일을 어떠한 의문 없이 자신에게 따르리라 여겼을까…….

겁이 덜컥 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친절에 많이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자신이 좀 이기적인 것 같았다.

“에드가, 나는 마영석을 구하지 않았으면 해.”

에드가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 루비카와의 대화는 항상 어딘가에서 맥이 툭툭 끊겼다. 그가 바란 것은 “돈이 필요한데 어쩌지.”하고 그녀가 나약한 모습을 보이며 걱정을 토로하면 그가 든든하게 이를 받쳐 주며 그 걱정을 한방에 날려 주는, 쉽게 말해서 영웅 같은 역을 하길 바랐다. 사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여자라면 아까 그의 말에서 모든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도 이를 노리고 은근히 있는 티 없는 티를 다 냈다. 그런데 루비카는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그에게 무심했다.

“걱정하지 마.”

그의 말에 그녀가 기대했다. 어딘가 근사한 아이디어를 내는 게 아닐지. 기대감이 실린 눈빛에 에드가가 다리를 한차례 꼬았다. 그녀에게 능력 있는 남자의 여유로운 모습을 한껏 보여 줄 차례였다. 그가 그리 행동하면 의도치 않게 수많은 여성이 걸려들었지만 그녀만은 걸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나른하고 우아하게 말했다.

“칼에게 내 개인 자산에서 3만 골드를 인출해 당신 앞으로 돌려놓으라고 했어. 드레스든, 옷이든, 선물이든 사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사고 마영석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

에드가는 말을 꺼내자마자 루비카가 활짝 웃기를 내심 기대했다. 무엇이든 마음껏 사라는 말을 듣고 싫어할 사람은 없다. 사탕가게 앞에 있는 아이는 물론 일흔이 넘은 노인조차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내키는 대로 마음껏 사라는 말에 활짝 웃기 마련이었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그리 웃으면 두 팔을 벌려 그녀를 포옹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틈타 그동안 본인의 행동으로 쌓은 오해도 좀 풀고 싶었다. 자신은 루비카를 결코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녀를 존중하며 함께 잘 지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루비카는 활짝 웃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번엔 대체 뭐가 문제인걸까? 그는 자신이 한 말에서 한 톨의 잘못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어리벙벙했다. 루비카는 그에게 영원히 풀기 어려운 난제 같은 존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