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71화 (71/212)

# 7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71화

그저 정원을 산책하고 있을 뿐인데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칠 수 없는 이유가 이거였다. 루비카는 매일매일 그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이 재미있는 걸 놓칠 수야 없지. 에드가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정원을 거니는 루비카의 모습을 보았다. 어쩐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원래도 햇살아래 있는 그녀는 반짝반짝 예쁘긴 했다만 지금은 꼭 눈이 부실 정도랄까.

‘잠깐 예쁘다고?’

에드가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직 루비카가 몸을 돌려 집무실을 바라보지도 않았는데 깜짝 놀라 창가에서 떨어졌다.

‘미쳤군.’

평범한 여인이다. 그녀는 정말이지 평범한 여인이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고, 결혼식 때도 분위기나 드레스에 취해 환상적으로 보이기는 했다. 그때 꼭 지상에 강림한 천사처럼 보였던 건 금빛 베일 덕에 입술도, 얼굴도, 눈빛도 모든 것이 안개 속에 있는 듯 뿌옇게 환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일 뿐 그녀 자체는 평범했다. 그런 그녀가 어느새 세상 그 누구보다 예뻐 보이다니 스트레스를 받다 못해 요새는 환상을 볼 지경이 된 걸까.

에드가는 재빨리 종을 쳤다. 이 종을 치면 칼이 채 삼십 분이 안 되어 그의 앞에 당도할 것이다.

‘도저히 안 되겠군. 더는 미뤄선 안 돼. 주치의를 불러 달라고 칼에게 명령해야겠군.’

미리 명령하는 건 해가 지면 그가 모든 기억을 잃고 루비카를 찾아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악마 같은 여자가 자신에게 대체 무슨 마법이라도 건 게 아닐지 궁금할 지경이다. 이게 만약 정신과 관련된 병의 일종이라면 더 심해지기 전에 치료하는 게 옳았다. 어딜 가도 발에 치일 정도로 평범한 여인이 눈부실 정도로 예뻐 보이는 환상이라……상태는 심각하다.

‘……아냐. 길거리에 발에 치일 정도는 아니지.’

에드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생각해도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는 건 너무 박한 평가였다.

‘그리고 눈동자가 예쁜 건 사실이잖아. 피부도 요즘은 너무 대리석처럼 하얀 걸 선호해서 루비카처럼 건강미 넘치는 우윳빛 피부를 낮추어 보는 경향이 있어. 창백한 것보다 밝고 건강한 게 더 좋지. 어쨌든 건강이 최고잖아.’

에드가는 그렇게 손가락, 머리카락, 어깨, 코, 눈썹, 입 하나하나 다 뜯어보았다.

‘손가락은 적당히 길이에 손톱이 커서 보기 좋아.’

‘어깨는 좀 작지만 동그스름하니 안으면 품에 딱 들어와. 옷 위에 살짝 드러난 곡선이 볼수록 기분 좋지.’

‘입술도 그 정도면 도톰하니 괜찮지.’

뜯어보니 의외로 모난 구석 하나 없이 다 예뻤다.

‘가만, 이정도면 미인 아냐?’

세부를 통해서 전체를 판단하는 건 제법 논리적인 추론이다. 에드가는 세리토스 왕국의 미인열전에 루비카의 이름 정도는 당당히 올려 둘 수 있겠다 판단했다. 그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루비카는 미인이다. 그런데 왜 전에는 그녀가 예쁘지 않고 평범해 보였을까. 길거리에 치일 정도로 많기는, 어디에도 루비카 같은 여인은 없다.

‘내 눈이 삐었군.’

잘못 판단한 건 지금의 그가 아니라 과거의 그였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하려니 자존심이 퍽 상했다. 그는 1mm의 오차도 찾아내는 공학의 천재가 아닌가. 그런데 여인의 아름다움조차 못 알아 봤다고?

‘평범한 옷을 입어서 그래. 특히 처음 봤을 때 입었던 촌스런 회색 드레스란.’

그래. 그의 눈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틀리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루비카가 지나치게 남루한 드레스를 입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오판했을 뿐이다. 에드가는 자신의 생각이 논리적으로 크나큰 허점을 가지고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공작 부인이 되었고 그런 촌스런 드레스는 안 입어도 되니 얼마나 좋아.’

눈을 감고 방금 본 루비카의 모습을 천천히 음미해 보았다. 오늘따라 평소의 몇 배로 예뻐 보였던 이유가 뭘까. 무엇이 평소와 달랐는지 에드가는 꼼꼼히 뜯어보았다.

‘그래, 드레스.’

정원을 거닐고 있던 루비카가 입었던 살몬색 드레스는 평소의 드레스와 전혀 달랐다. 전의 옷들은 에드가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것이었다. 에드가의 할머니였던 선선대 공작 부인은 6년 전까지만 해도 정정히 살아계셨다. 그녀는 창백하고 하얀 피부에 옅은 금발 머리, 그리고 지금 에드가가 가진 새파란 푸른 눈을 가진 이른바 요즘 유행하는 미인의 선두주자였다. 루비카가 어제까지 입고 있었던 옷은 모두 원래 선선대 공작 부인에 맞춰 만들어진 옷이었다. 루비카와 전혀 다른 타입의 미인. 나쁘지 않은 옷들이었지만 루비카에게 딱 맞춤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얼마 전에 새 옷을 주문했었다고 했지. 그 카……, 음. 카나의 의상실이었나?’

디자이너가 남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한시름 놓았었지. 왜 자신이 디자이너의 성별 따위에 한시름 놓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좀 더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어야 할 필요가 있어.’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까 부른 칼이었다. 채 30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어쩐지 평소보다 빨리 왔다.

“들어와.”

에드가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깥에서 열쇠를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칼이 조심스럽게 집무실에 들어왔다. 마침 앤에게서 마영석과 관련된 루비카의 말을 전달 받은 그는 이를 어찌 에드가에게 전달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명령을 기다리듯 칼이 고개를 숙였다. 당초 에드가는 주치의를 만나는 날짜를 좀 더 당기기 위해 그를 불렀다. 그러나 턱을 한참 쓰다듬던 그는 처음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소리를 꺼냈다.

“내 개인 예산이 얼마나 남아 있지?”

“……네?”

칼이 당황해 반문했다. 그의 주인인 에드가는 사치를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옷도 딱 정해진 양만 기계적으로 주문했으며 유일하게 돈을 쓰는 것도 실험기구나 펜 같은 걸 사는 정도였다. 매년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돈이 반절 이상 남아 그의 개인 저축에 차곡차곡 쌓을 정도였다.

“안 남았나?”

“아니, 아닙니다.”

칼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짧은 시간동안 그는 암산을 끝냈다. 올해는 루비카에게 지참금을 지급하느라 갑작스러운 지출이 있었다. 그 금액에 에드가가 앞으로 쓸 금액의 평균을 내어서 제한 뒤 여유 자금을 입에 올렸다.

“흠.”

톡톡, 에드가가 마호가니 테이블의 끝을 톡톡 쳤다. 무척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돈에 대해 욕심이 없다시피 한 그가 대체 무엇에 쓰려고 저러는 건가. 새삼스레 취미라도 생기신 건가. 칼은 의중을 가늠하려 노력했으나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안 되겠군. 각하께서 돈을 다른 곳에 써 버리기 전에 빨리 앤이 알려 준 걸 전해야겠다.’

“각하,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급한 일인가?”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였다. 에드가는 방금 들은 금액에서 어느 정도를 루비카에게 옷이나 사 입으라는 명목으로 주기에 적절한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5천 골드? 1만 골드? 5만 골드? 아니면 차라리 몽땅 다?

어느 정도에서 기뻐할지, 어느 정도에서 부담스러워할지 그건 무척 어려운 계산이었다. 루비카의 평소 씀씀이나 성향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찰나 칼이 불순물처럼 끼어드니 기분 나빴다.

“마님과 관련된 일입니다.”

“무슨 일이지?”

하지만 칼의 입에서 루비카와 관련된 일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에드가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방금 루비카가 즐겁게 정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하였음에도 그는 어쩐지 그녀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 한구석이 초초하고 불안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마음 상한 곳은 없는지 걱정되고 안쓰러웠고, 잘 있는 모습을 보면 이상하게 대견했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일평생 자신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행동을 규제하려는 사람들 틈에서 자랐다. 그에게 그건 사랑도 보호도 아닌 끔찍한 폭력이었고, 구속이었다. 그는 본인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을 루비카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에드가는 최대한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두었고, 이에 대한 평이 그의 귀에 닿는 것을 사양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누구보다 기민하게 눈치챈 것이 앤과 칼이었다. 그들은 저번 소동 이후로 루비카와 관련되어서 함부로 말을 옮기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이 무언가를 고하려 했다. 에드가는 본능적으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였는데……. 어디 크게 아픈 곳이라도 있는 건가?’

마음에 먹구름이 꼈다.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 누워 있는 루비카의 모습을 떠올리자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아파왔다. 그리되면 그녀는 그에게 다시는 그 새처럼 높고 귀여운 웃음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건가? 자신의 말에 앙칼지게 반박하고 그의 눈빛이나 태도가 어떻든 자신의 뜻을 펼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걸까? 건강은 하늘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으나 그와 결혼한 뒤에 그녀가 아프다면 에드가는 꼭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았다.

‘괜찮아. 아프면 내가 책임지고 치료하면 돼. 나는 왕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야. 루비카의 치료비 정도는 못 댈 사람이 아니야.’

에드가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칼의 말을 기다렸다. 대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인데 칼을 먼저 말을 꺼내고서 한동안 심호흡을 하는 걸까. 에드가는 무슨 일이든 받아들이자고 새삼 다짐했다.

“마님께서 올해는 마영석을 구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뭐?”

그러나 칼이 한 소리를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별안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 왔다. 두 다리가 온전했다면 아마 자리에서 일어났으리라. 겨우 수십 초 정도였으나 그녀가 혹 불치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노심초사했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한 듯 루비카는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에드가는 정원을 거닐며 마영석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을 내지르는 루비카를 안다. 그녀는 그 돌의 아름다움에 분명 매료되었다. 그날은 에드가가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에 처음으로 감사함을 느낀 날이었다. 어디의 누구로 태어나든 그는 뛰어난 두뇌로 제 한 몸 먹고 사는 것은 물론 부를 일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마영석상이나 되는 것은 축적된 부와 권력이 없는 자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매년 추수 감사절에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친척이나 오래 교류한 귀족가문을 초대해 새로운 마영석상을 공개했다. 에드가는 그 행사를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해 대귀족을 비롯한 왕가의 사람에게 루비카를 제대로 소개할 예정이었다. 행사의 규모가 곧 부인에 대한 애정의 척도였다. 마영석이 크면 클수록 귀족들은 공작가와 자신들은 궤를 달리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 행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한다. 에드가는 그 행사를 통해 수도 사교계에 가기 전 루비카에게 미리 공주 같은 황가 사람들과 친분을 다지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루비카가 앞으로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으로서 적응해나가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는 루비카의 출신을 얉잡아 본 날파리 같은 존재들이 그녀 주위를 웅웅거리게 둘 생각이 없었다.

그러려면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하고 화려한 마영석상이 필요했다. 이미 대륙에서 두 손가락에 꼽히는 조각가가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오기로 약속했다. 에드가는 내심 올해는 루비카가 원하는 모티브로 석상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리는 동안 앤은 뭘 했나?”

“지켜본 하녀의 말로 마님의 표정이 워낙 단호하셔서 일단 물러나셨다고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