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70화
“마님…….”
루비카를 어떻게든 설득하려던 앤은 그녀의 단단한 적갈색 눈동자에 이내 마음을 접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앤은 루비카가 보기보다 심지가 굳고 한번 마음먹은 건 그대로 해내고 만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마님이 평판이 나빠질 거야.’
귀족 사회에서 남편의 체면을 세우지 못한다는 평을 듣는 귀부인에게 따라붙는 비난과 조롱은 단순히 거추장스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란 이름으로 무마할 수준이 아니었다. 앤은 어떻게 해서든 루비카의 결정을 되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시녀장인 자신이 나서서 그녀를 비난하고 결정을 물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공작의 위신을 살리겠다고 공작 부인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릴 노릇이었다.
‘일단 시간을 벌어야 해.’
먼저 마영석을 구하지 않겠다고 알릴 시간을 최대한 뒤로 미뤄야 한다. 앤은 곰살맞게 웃으며 쥐고 있던 주판을 상자에 넣었다.
“마영석과 관련된 비용을 정리하려면 오늘 저녁까지 주판을 튕겨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네요. 마님, 마침 산책 시간이니 잠시 숨 돌린 다음에 다시 할까요?”
“음…….”
루비카는 잠시 수상쩍은 눈빛으로 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앤과 두 시간 가까이 되는 설전이 벌어지리라 예상했다. 앤은 무엇이든 루비카를 최우선으로 두었으나 그것은 그녀가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은 클레이모어 공작가를 이길 수 없다. 쉽게 납득하고 물러가는 게 오히려 수상쩍었다.
자신을 영혼 깊숙이까지 꿰뚫어 볼 듯한 눈앞에서 앤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럴 때 루비카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공작 부인이 아니라 꼭 수 십 년을 더 산 사람 같았다. 노련한 그녀마저도 표정을 숨기는데 어려움을 있을 정도였다.
루비카는 앤이 수긍한 척하는 걸 알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무슨 꿍꿍이냐고 호통쳐봐야 그녀의 마음만 잃을 것이다.
‘……결국 앤과 반목하게 되려나.’
에드가와 티격태격하는 건 괜찮았으나 이 사람 좋은 시녀장과 싸우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다. 루비카는 일단 차근차근 설득할 방법을 찾기로 했다.
“좋아. 앤, 마침 찌뿌둥한 참이었어. 나가자.”
정원을 산책하며 나무와 꽃의 푸른 기운으로 머릿속을 맑게 할 필요가 있었다. 루비카는 카나가 만든 살몬색 드레스에 어울리는 꽃으로 꾸며진 밀짚모자를 쓰고, 아이보리색 레이스 장갑을 꼈다. 앤은 바로 옆에서 산책을 위한 채비를 도와주며 슬며시 근처에 있던 하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마님께서 하신 말씀을 칼에게 전해 주렴.”
“네.”
루비카를 말릴 수 있는 건 에드가 밖에 없다. 앤은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면 루비카의 신뢰를 잃으리라는 걸 알았다. 이미 한 번 그녀의 동향에 대해 입을 잘못 놀렸다. 하지만 루비카가 원한다고 해서 아무 말 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 과연 시녀장의 미덕일까?
‘날 미워하고 신뢰하지 않아도 좋아. 마님이 잘못돼서 비난을 받는 일만은 막아야 해.’
아직 루비카는 수도 사교계에 정식 입성하지 못했다. 앤은 루비카가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란 무게를 견뎌내고도 남을 사람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주변의 시선은 전혀 달랐다. 영지 내의 평판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은 채 사교계에 갔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앤도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공작 부인의 자리를 노렸던 영애들이 좀 많아야지.’
원래 자기 것이 아닌 자리였음에도 빼앗긴 것처럼 반응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 미움과 비난이 루비카가 바라던 바라는 사실을 몰랐던 앤은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산책은 별채에 있는 아가씨들도 함께하는 게 어떨까요?”
“정말?”
“네. 가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영지 내의 소문이나 사람들의 관심사 같은 걸 들어 보는 것도 마님께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엘리제도 함께하는 거지?”
“그럼요. 아마 사는 곳이 떨어져서 엘리제 양도 아가씨들도 아쉬웠을 거예요.”
꼭 사탕이라도 선물 받은 것처럼 루비카의 얼굴이 퍼졌다. 루비카가 물려준 분홍 드레스를 입고 산책하는 엘리제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함께 지냈던 친구들에게 몰라보게 예뻐졌다는 칭찬을 들으면 엘리제의 태도도 더 당당해지고 자신감이 서릴 것 같았다.
“좋아. 당장 엘리제랑 별채에 연락을 보내자.”
“네.”
한참 새로운 예법 선생 아래에서 공부 중이었던 소녀들은 하녀의 연락을 받자마 바로 양산과 모자, 장갑을 챙기고 본채의 현관으로 왔다.
“부인, 너무 예쁘세요.”
“새로운 드레스인가요?”
한참 꾸미는데 관심이 많은 아이들은 누구보다 빨리 루비카의 변화를 눈치챘다. 루비카는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의 표정이 전보다 더 밝고 명랑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엘리제를 보면 더 깜짝 놀랄 걸.’
호들갑 떨며 엘리제의 변화를 칭찬하는 장면을 떠올리자 루비카의 마음이 다 설렜다. 자신이 꾸미고 아름다워진 엘리제의 모습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다.
‘빨리 왔으면…….’
원래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이다. 루비카는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엘리제!”
드디어 그녀가 나왔다. 미리 이른 대로 루비카와 하녀들이 공을 들였던 모습 그대로였다. 소녀들은 엘리제의 이름을 부르고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엘리제가 꾸민 모습은 셰니에 부인이 정숙한 여인이 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예뻐.’
‘천박해 보이지도 않아.’
오히려 어딘가의 공주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귀해 보였다. 엘리제는 친구들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렇게까지 화려한 옷은 분수에 맞지 않는다. 공작 부인과 하녀들이 칭찬한 건 모두 갓 시녀가 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러 넣어 준 것이라.
한번 위축된 사람의 눈에 자신감이 서리기란 어렵다. 루비카는 엘리제가 주변의 시선을 잘못 해석하고 위축되어 있음을 눈치챘다. 본인이 나서서 말할까 했으나 그럼 그녀가 앞으로도 쭉 그녀에게 쏟아지는 찬사를 루비카에 의한 후광으로 여길 수 있었다.
“앞머리 자른 거야?”
그때 엘리제보다 한두 살 어린 케이가 눈을 빛내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푸른 눈은 호의로 반짝거렸다.
“응.”
“누가 잘라 준 거야?”
“마님의 하녀가 잘라 줬어.”
“너무 잘 어울린다. 나도 그렇게 잘라 볼까?”
케이는 어제까지의 엘리제와 마찬가지로 꽉 묶은 자신의 뒷머리를 슬그머니 만졌다. 지금은 꽉 묶고 핀으로 고정해서 어쩔 도리가 없지만 아무래도 내일부터 케이도 엘리제와 비슷한 머리를 할 것 같았다.
“드레스 정말 잘 어울려.”
“고마워.”
“처음에는 너무 예뻐서 못 알아 봤어.”
“입술, 진짜 잘 어울린다.”
“연지를 주셨는데 나중에 나눠 줄까?”
“정말? 나도 발라 봐도 괜찮을까.”
친구의 갑작스런 변화에 놀라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아이들은 곧 신나고 기뻤는지 칭찬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소녀 떼들에게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 하던 엘리제는 점점 웃음을 찾았다. 아직은 반신반의하고 있으나 그녀의 미소에 슬슬 자신감이 싹텄다. 루비카는 실로 흐뭇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사교계에 갓 데뷔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딸을 보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사람들이 엘리제에게 딱 어울린다고 말하는 드레스는 자신이 골랐고, 하녀에게 머리를 꾸며 주고 화장을 시켜 주라고 한 게 모두 자신이라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소녀들의 얼굴에 선망의 빛이 서릴수록 루비카는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자, 그럼 이만 가 볼까?”
“네.”
현관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한 아이들은 루비카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공손히 치맛자락을 잡고 가볍게 몸을 숙였다. 손동작 하나 발동작 하나 우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새로운 예절 선생이 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아이들은 귀족 소녀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행동거지를 할 줄 알게 되었다.
‘역시 자르길 잘했어.’
소개장을 써 주지 않은 건 좀 미안했으나 그렇다고 셰니에가 클레이모어 공작가처럼 큰 저택의 예절 선생이 되는 길을 수월하게 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조금 반성이라는 걸 할 필요가 있다.
* * *
시끄러운 소리가 창가에서 났다. 여러 목소리 중에 차분하고 맑은 여인의 웃음소리만이 에드가의 귀에 꽂혔다. 루비카의 목소리다. 에드가는 휠체어를 힘차게 밀어 창가로 갔다. 누가 밖에서 볼까 커튼 뒤로 몸을 숨기면서도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맑은 유리창 너머 웃고 있는 루비카의 모습이 보였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산책을 나온 사람의 수가 많았다. 별채의 한 아이를 시녀로 들이더니 아마 그녀와 친구인 아이들까지 몽땅 포함시켜 산책 중인 듯했다.
‘저 아이인가.’
에드가는 루비카가 마음에 들어 한 엘리제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다른 아이를 바라 볼 때와 그녀를 바라볼 때 루비카의 표정이 아주 달랐다. 저 멀리 집무실 유리창에서 보고 있건만 에드가는 그 차이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찬찬히 주변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루비카는 힐끗 엘리제를 바라보더니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가 무언가를 할 때마다 칭찬해 주고 싶어서 못 견디는 그런 표정.
‘꼭 한참 어린 손녀라도 보는 눈빛이로군.’
에드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잠시 턱을 만졌다. 그가 무언가를 유심히 관찰할 때는 턱을 만졌다. 깊이 생각할 때 탁자 모서리를 두드리는 버릇이 있었다.
‘가끔 보면 좀 할머니 같은 데가 있어.’
새삼스레 루비카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펴볼 때였다. 한참 하녀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루비카는 둘부리에 걸려 잠깐 휘청거렸다. 누가 보는 사람 없는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다들 자신이 아닌 화단에 핀 꽃을 보고 있자 안심하더니 곧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게 아닌가.
“큭큭큭.”
차마 참지 못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앤과 주변사람들이 루비카가 휘청거리는 모양새를 못 봤을 리 없다. 다들 루비카의 체면을 생각해 필사적으로 못 본 척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걸 저 순진한 여자는 꿈에도 모르고 안심하고 있었다.
“하하하하.”
경쾌하게 걷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 딴에는 새침하고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하녀에게 말을 걸자 에드가는 그만 배를 잡고 집무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웃고 말았다. 모두 루비카의 헐렁한 실수를 보았는데 그녀만이 그 사실을 모른 채 깍쟁이처럼 굴고 있단 사실이 너무 웃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