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69화
아무래도 예산을 오버한 것 같았다. 아니 진즉에 오버하고도 남았지. 루비카는 예산을 예년보다 늘리라고 주문했지 줄이라고는 주문하지 않았다. 당장 보았을 때는 크지 않은 돈이라서 앤은 모두 그러자고 했으나 모이니 그것은 결코 작은 구멍이 아니었다.
“이래서는 마님께서 입으실 옷이 부족한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옷들은 엘리제가 입기에는 너무 불편해 보였어.”
“수선을 잘 하면…….”
“엘리제는 호리호리하지만 나보다 키가 큰 걸? 물론 입을 수야 있지만 어울리지 않을 거야.”
앤이 장탄식을 했다. 왜 우리 마님은 마음씨가 곱고 난리야. 하지만 그렇다고 앤은 시녀 때문에 루비카에게 쓸 돈을 줄이고 싶지 않았다. 카나가 지은 드레스를 입은 루비카는 무척 예뻤다. 선선대 공작 부인의 옷을 수선해 만든 것보다 확실히 처음부터 루비카만을 위해서 지은 옷이 훨씬 좋았다. 이제 막 공작 부인이 된 루비카는 옷으로 주변의 귀부인들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
‘……앤이랑 같이 예산을 짜면 장점도 있지만 이건 문제네.’
같은 장부를 보며 루비카는 영 다른 생각을 했다. 루비카가 혼자 예산안을 짠다면 구멍이 나든 말든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가문의 마님이 돈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으니 참견하지 말라고 하면 시녀장으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루비카는 앤의 도움 없이 예산안을 짤 능력이 없었다. 수도원의 운영을 도운 것과 귀족가를 직접 운영하는 것은 비슷한 부분이 있었으나 다른 지점도 많았다. 곧 오게 될 여름에 대한 준비나 축제에 필요한 것, 고용인이나 친척에게 지급해야 할 물건에 대해서 루비카는 소상히 알지 못할 뿐더러 필요한 양이 상상이상으로 많아 어느 정도가 적당한 선인지 오히려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줄일 만한 게 없을까?”
결국 루비카는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앤이 지켜보고 있는데 제 맘대로 예산안을 짤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한 발 물러선 뒤에 돈 쓸 구석이 나오면 실컷 써야지.
“생각보다 돈 드는 곳이 많지요? 마님의 마음에 차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야, 지금도 충분해.”
사실 이미 루비카가 쓴 돈만 해도 일반적인 귀족가의 부인이 쓰는 양의 몇 배에 달했다. 다만 다른 귀부인과 달리 루비카는 그야 말로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왔기 때문에 옷을 비롯한 다양한 물품이 부족했을 뿐이다.
“음…….”
루비카는 더 큰 사치를 위해 지금은 참기로 하고 작년도 예산안을 옆에 두고 올해 예산안을 천천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꼼꼼한 앤은 빠지는 것 하나 없이 필요한 정보를 모두 기입해 두고…… 있었다.
‘확실히 세사르 경 때문인지 투자한 돈이 많긴 하구나.’
예산안의 삼분의 이 가까이가 조경비로 소모되고 있었다. 장미꽃 개발에 투자하기로 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돈을 좀 깎아 볼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며 루비카는 그 장을 넘기려다 잠시 멈추었다.
‘아니, 총 금액이 내가 세사르 경에게 지불한 돈의 몇 배잖아.’
정원을 꾸미는데 돈이 이렇게 많이 든단 말인가? 루비카는 매일 오후 무렵마다 클레이모어 저택의 정원을 산책했다. 아직 모두 돌아보지 않았으나 공작가의 정원을 유지하는데 세사르 경의 연구비만큼 많은 돈이 들 것 같지 않았다. 따로 운영하는 온실도 없었고, 특이하거나 희귀한 식물을 많지도 않았다. 그저 제때제때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 되는 나무로 만든 미로나 산책로가 많았다. 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돈이 나가는 걸까. 루비카는 혹 정원사가 횡령이라도 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거름값이나 모종값을 뻥튀기 해 봤자 얼마나 한다고…….’
게다가 산책을 하는 종종 만났던 정원사는 무척 사람이 좋아 보였다. 가끔 실수도 하는 걸 보면 횡령처럼 머리써야 하는 일은 귀찮아서 안 할 스타일이었다. 찬찬히 리스트를 따라가던 루비카의 눈동자가 한 구석에서 고정되었다.
‘……마영석!’
세리토스 왕국에서 흔한 꽃과 나무로 꾸며진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정원에 유일하게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마영석상이었다.
“앤, 이 비용은 어떻게 된 거지?”
“빛을 잃어버리는 마영석상이 일 년에 하나 꼴로 나옵니다. 3월부터 마영석을 구해서 6월경에 조각가가 작업을 하면 10월경에 설치를 해요. 마침 석상 하나가 빛이 꺼지는 바람에……. 지금부터 빨리 구하지 않으면 메꾸는 게 힘들답니다.”
마영석이 나는 곳은 이베르의 권역이었다. 드래곤의 권속과 싸워야 하는 기사부터 짐을 나루는 일꾼, 그리고 그 사람들이 먹고 자는 비용. 결코 적은 돈이 드는 게 아니었다.
‘군대 하나 파견하는 것과 똑같은 비용이네.’
거기에 위험수당과 목숨을 잃는 사람을 위한 보상금까지 책정되어 있는 걸 보아서 심심치 않게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 같았다.
“굳이 이걸 구해야 돼?”
“……네. 추수 감사절 축제에 영지민들 앞에 새로운 마영석상을 보여 주고, 각하의 공덕을 기리는 게 전통이어서요.”
앤이 마영석을 왜 구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무래도 클레이모어의 위세와 힘을 자랑하는 것이기에 마영석과 관련된 항목은 무척 오래되고 의미 있는 전통이었다. 많은 귀족이나 왕족, 외국의 사신들이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오면 정원의 마영석을 보고 기가 죽었다. 공작가의 정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친척이나 영지민도 무척 많았다. 하지만 루비카는 앤의 설명에도 수긍의 말도 내뱉지 않고 리스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돈만 쓰지 않아도 예산이 확 늘어.’
엘리제에게 드레스를 백 벌로 사 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건 엄청난 유혹이었다. 앤이 공작가의 체면과 위신에 대해서 설명해도 루비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가만 어차피 전쟁이 나면 마영석상이고 뭐고 다 부서질 거잖아?’
그리고 공작가의 체면과 위신도 쑥대밭이 될 예정이었다.
‘예쁘긴 했지만 구하는데 돈뿐만 아니라 사람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누군가가 죽는 건 지긋지긋해. 어쩔 수 없이 죽는 것도 아니잖아. 체면과 위신을 세우느라 이딴 걸 구하지만 않으면 다 산 목숨들이야.’
어느새 아름답다 감탄했던 마영석은 루비카에게 이딴 것이 되었다. 루비카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심지어 생을 다시 살게 된 이 순간까지 아름다운 것이 좋았다. 예쁜 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열정을 삶 앞에서 꾹꾹 눌러 담느라 힘들 정도였다. 처음 만났을 때 에드가의 재수 없는 말대답을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아름다움도 사람의 목숨보다 먼저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라넨을 취급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돈도 되고 무척 예쁘잖아요.
루비카가 13살이 되었을 무렵, 그녀는 식료품을 주로 취급하는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라넨이란 보석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비록 아버지는 평민이었으나 어머니는 백작가 출신이었다. 어머니의 인맥과 신분이 있는 한 라넨을 취급할 수 있는 허가증이 쉬이 나온다. 또 아버지의 능력을 보았을 때 라넨을 구하는 건 식은 죽 먹기로 여겨졌다. 라넨을 취급하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덤으로 예쁜 라넨을 구경할 기회를 얻게 된다.
어린 루비카의 말에 아버지는 무척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루비카, 라넨이 나오는 나라들은 라넨 때문에 내전이 일어나고 있단다. 심지어 보석을 채굴하는 사람들은 모두 너만 한 아이들이라고 하는구나.
-나만 한 아이들이요?
루비카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호기심에 아버지를 따라 광산에 한번 가 본적이 있었다. 시끄럽고 연기가 날리고 공기가 좋지 않고 거친 현장. 그녀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어두운 동굴에 두려움을 느껴 결국 그 안까지는 들어갈 엄두를 못 내었다.
-라넨은 무척 투명하고 영롱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야 하고 아직도 흘리고 있단다. 물론 라넨을 취급하면 당장은 큰돈을 벌겠지.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피로 번 돈으로 널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싶지 않구나.
-저도 원하지 않아요.
루바카의 말에 어머니가 상냥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아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게 있어도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기 마련이야. 루비카, 엄마는 큰돈을 벌어오는 아버지보다 식료품을 취급해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가 좋구나.
그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 말은 루비카가 긴 생을 살면서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름다운 것을 위해 돈을 쏟고, 육체가 힘들 정도로 노력하는 것까지는 괜찮다. 루비카는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 좋아도 사람의 목숨보다, 제 주변의 사람보다 귀하게 여길 수 없었다.
물론 새로운 마영석과 그를 이용해 만든 석상이라니 보고 싶다. 공작의 체면이나 위세를 떠나서도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루비카 안의 욕망을 위험할 정도로 콕콕 찔렀다. 세상에 아름다움 위해서 온갖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이 넘쳐 났다. 누군가는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육체를 학대했고, 심지어 누군가는 부모와 자식까지 버렸다. 욕망의 양과 질을 따지자면 루비카는 결코 그들에게 지지 않았다. 다만 루비카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녀는 아름다움만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쁜 것은 좋지만 그 무엇도 삶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 결국 루비카에게 중요한 것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었고, 함께 행복해 하는 것이었다.
루비카는 결심을 굳혔다. 엘리제와 상관없다. 예산이 넉넉하든 넉넉하지 않았든 그녀는 결국 이런 결정을 내렸을 거다.
“앤, 마영석에 대한 예산은 다 취소해.”
“네?”
“구하지 않을 거야. 석상은 대체할 만한 다른 걸 찾아보자. 차라리 보통 다른 귀족가에서 하는 거대한 고기 파이를 만들어서 그날 깨뜨린 다음에 나눠 주는 걸 하자.”
“네? 하지만…… 이러면, 마님께서 비난 받으실 수 있어요. 당장 친척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상관없어.”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루비카는 호승심에 불탔다. 그동안 비난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노력했었던가. 그러나 여태 결과물이 영 시원찮았다. 열심히 돈을 쓰고 내키는 대로 막 행동했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 마님은 너무나도 대단하시고, 자애로우시고, 겸손하시고, 공작가를 맡으실만한 현명한 분이십니다.’였다. 이제 그만 현명한 마님이란 호칭과 이별하고 싶었다. 루비카는 애초에 현명한 부인이 될 생각이 없었고 에드가의 체면을 위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내키는 대로 살고 싶었다. 이전의 삶에서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고 그런 삶에서 봉사하는 것도 기뻤지만 가끔, 한 번 정도는 마음대로 살아 봐도 되잖아. 어차피 기간은 2년 남짓이었다.
단지 공작가의 체면과 위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사지로 내몬다는 건 더욱 납득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그녀가 비난을 받는 게 나았다. 당초의 계획이었던 사치스러운 공작 부인이라는 칭호 대신에 준남작가 출신으로 경우도 예의도 없어 공작의 체면과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는 부인이란 말을 듣고 비웃음을 사겠지만 모로 가나 도로 가나 욕먹고 이혼에 성공하기만 되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