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68화
“고대 바바리아어 말입니까?”
스테판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나는 걸 세사르는 보지 못했다. 보았다고 해도 알아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람보다 꽃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는 얼굴의 변화 같은 건 너무나도 어려운 학문이었다.
“어휘도 조금 특이했지.”
“어휘요?”
루비카가 말하는 투는 그냥 평범한 세리토스 왕국민 수준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 스테판이 되물었다. 세사르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관찰력은 어떤 부분에서는 유아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세기의 천재였다.
“보통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거네. 나처럼 아카데미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오래 공부를 하는 사람만 눈치챌 수 있지.”
“흐음.”
“우정을 ‘필리아’라고 칭하더군. 그건 휴의 사제들이 쓰는 말투야.”
“아.”
생각 외로 수확이 있었다. 스테판은 아무래도 루비카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 내렸다.
“그런데 그걸 왜 묻나?”
“경의 견해가 궁금했습니다. 참, 은신처는 사실 이런 땅보다는 나무위에 마련하는 게 안전합니다. 제가 시범을 보여드리지요.”
스테판이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다행히 세사르의 의심은 금방 사라졌다. 애초에 꽃 이외에는 관심이 없고 금방 까먹는 특이한 사람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거름 주문하겠다고 외치며 나왔다 그를 보자마자 야영을 하는 법을 알려 달라고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공작 부인에 대한 스테판의 관심은 세사르의 기억에서 금방 잊혀졌다.
그에게 그보다 중요한 건 장미였다. 세사르는 루비카의 앞으로 연구에 필요한 야생장미를 확보하기 위해 몇 주간 자리를 비우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여행을 떠났다.
* * *
“마님, 카나 님께서 만든 옷이 방금 막 침방에 도착했답니다.”
공작 부인의 서재에서 앤과 함께 책을 보고 있었던 루비카는 하녀의 말이 들리자마자 보고 있던 책을 딱 덮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운영과 행사에 대해서 소상히 적힌 책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벌써?”
지루한 시간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도 고마운데 옷이라니, 그녀의 얼굴에 당장 햇살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침방에서 자수를 도와줬다고는 하나 그 많은 옷을 다 만들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카나의 솜씨가 보고 싶어서 루비카는 발을 동동 굴렀다.
“마님, 침방에 가 볼까요?”
“그래도 될까?”
“네, 어차피 이런 것들은 제가 잘 챙기면 돼요.”
“하지만……, 앤만 힘들게 할 수는 없어.”
행사라는 건 하루 잠깐 하는 거지만 챙겨야 할 일이 많다. 루비카는 그 힘든 일을 앤에게만 맡길 수 없었다. 게다가 앤에게 맡기면 그녀는 최대한 예산에 맞춰서 행사를 치르겠지. 루비카는 공작 부인으로 있는 동안 모든 행사를 역대급으로 꾸릴 계산이었다. 루비카의 그런 속셈을 모르는 앤은 무척 감동스런 표정을 지었다.
“제 걱정까지 하시다니…….”
양심이 조금 찔렀지만 앤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건 나중에 함께 하고 같이 옷을 보러 가자.”
“네, 저도 마님께서 예쁜 옷을 입은 걸 보고 싶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녀가 두꺼운 책을 받아 옮겼다. 앤은 책상 위의 장부를 서재 안쪽 서랍에 넣고 열쇠를 잠갔다. 장부는 공작 부인인 루비카와 시녀장인 앤만이 볼 수 있었다. 루비카는 그들이 준비를 다 끝낼 때까지 뻣뻣하게 서 있었다.
“고마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을 대신해 주는게 익숙해 져야 하는데 영 어색했다. 안절부절못하던 루비카가 인사를 건네자 앤과 하녀가 얼굴을 붉혔다. 자신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굳이 감사를 표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였으나 아무래도 루비카가 당연하듯 서 있는 날이 오는 건 요원할 듯하였다.
“그럼 어서 갈까요? 마님.”
마침 로사와 카나가 어디 잘못된 곳이 없는지 점검하기 위해 마네킹에 옷을 입혔을 때 루비카가 침방에 도착했다. 루비카는 우아한 살몬색 드레스에 감탄을 내질렀다. 그녀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일까 드레스는 마음에 쏙 들었다.
“마님, 한번 입어 보세요.”
“그래도 될까?”
“물론이지요. 마님 옷인걸요.”
루비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침방 문이 닫히고 커튼이 쳐졌다. 그들은 마네킹에 입힌 옷을 벗겨 루비카에게 입히기 시작했다. 종종 남편의 일을 도왔다는 카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듯 바느질이나 옷에 달린 프릴이 무척 꼼꼼했다. 물론 카나는 완벽하거나 대단한 디자이너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로사의 의견과 루비카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모조리 상쇄했다. 드레스는 아름답기도 아름다웠지만 놀라울 정도로 몸에 딱 맞았다. 땅에 끌리지 않고 발목 즈음에 오는 스커트의 길이는 산책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암홀과 허리에 적당히 여유를 두어 움직이기 쉽게 만든 것도 마음에 들었다. 카나는 옷의 원래 목적을 잊지 않는 디자이너였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어머, 마님께 살몬색이 이렇게 잘 어울릴지는 몰랐어요. 당장 칼에게 말해 주문을 늘려야 하나…….”
“스토마커의 진주장식이 정말 잘 어울리네요.”
루비카는 침방에 설치된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제 입으로 이런 소리를 하기 부끄러웠으나 드레스는 확실히 마네킹이 입었을 때보다 루비카가 입은 게 훨씬 나았다. 살몬색 드레스는 루비카의 우윳빛 피부가 가진 기분 좋은 부드러움을 더욱 극대화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가진 풍만한 아름다움을 십분 살릴 수 있게 제작되었다.
“마음에 들어.”
루비카의 말에 카나가 환히 미소 지었다. 열심히 만들기는 하였으나 혹 루비카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 노심초사했었다.
“팔도 이렇게 자유롭게 휘저어도 불편한 부분도 없고, 옷도 가벼워서 너무 좋아.”
뿐만 아니라 루비카는 카나가 패턴을 만들면서 한 고민 또한 놓치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도 좋지만 이 옷은 산책 드레스이다. 양산을 드는데 불편함이 없어야 하고, 걷기에 불편함 또한 없어야 했다. 카나는 예쁘게 보이는데 치중하느라 옷의 본질을 잊지 않았다. 그건 루비카 같은 초보는 챙길 수 없는 지점이었다.
“네, 산책하실 때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을 썼답니다.”
그리고 다른 완성된 드레스들을 루비카에게 보여 줬다. 모두 루비카에게 딱 어울리는 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루비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에 어울릴 것 같은 장갑과 밀짚모자를 추가로 구매했다.
“아, 참.”
카나가 이만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루비카가 그녀를 잡았다.
“내일도 또 와 줄 수 있어?”
“내일이요? 물론 되고말고요.”
아직 루비카가 카나에게 옷을 주문했다는 사실은 널리 퍼지지 않았다. 물론 루비카의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요 며칠 밤낮없이 일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카나의 스케줄은 넉넉하였다. 물론 빡빡한 스케줄이었다해도 카나는 루비카가 부른다면 없는 시간이라도 낼 참이었다.
“고마워. 내일 오후쯤으로 앤과 이야기해서 시간을 잡았으면 해.”
“필요한 옷이 더 있으신가요? 말씀해 주시면 어울릴만한 디자인과 천을 챙겨 올게요.”
“내 옷은 아니야.”
“부인께서 입을 옷은 아니라고요?”
“응, 새로 올 시녀 입을 옷이야.”
루비카는 엘리제가 걱정스러웠다. 자신이 분홍색 드레스를 주기는 했으나 그건 고작해야 한 벌뿐이었다. 그리고 그 드레스는 만찬자리나 격식 있는 자리에서 입기에 어울렸다. 비록 시녀가 하녀들이 하는 궂은일은 하지 않는다만 그래도 앤을 보고 있자면 결코 놀기만 하는 일은 아니었다. 가문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도 도와야 하고 장부도 루비카 혼자서 하기에는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너무 크고 사람이 많았다. 챙겨야 하는 기념일도 그렇고. 세간에는 시녀란 귀부인의 말동무나 해 주면서 부채만 전달하면 그만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상은 해야 할 일도 챙겨야 할 일도 너무 많았다. 엘리제가 불편한 옷을 입고 그 일을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럼 수선을 맡기시려는 건가요.”
“아니, 새로 지으려는데?”
“네? 아, 부인께서 많이 아끼는 분이신가요?”
루비카는 카나의 질문에 당황했다. 그녀가 자란 베르너가는 하녀는 부릴 수 있어도 시녀를 부리기에 적당한 가문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백작영애이기는 하였으나 그녀는 루비카에게 시녀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소상히 알려 준 적은 없었다. 사실 준남작 집안 출신인 루비카는 남작 정도와 결혼해도 시집을 매우 잘 간 축에 속했다.
‘앤이 시녀 옷을 챙겨 주는 게 보통이라고 했었는데…….’
그게 아무래도 새 옷을 지어 주는 게 아니라 입던 옷을 물려주는 게 보통인 모양이었다.
‘뭐, 알게 뭐야. 난 입던 옷도 물려주고, 새 옷도 지어 줄거야!’
채신머리없다거나 역시 한미한 출신답게 공작 부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모른다는 평은 루비카로서 바라던 바였다.
“응.”
“네, 그럼 맞춰서 준비하겠습니다.”
카나가 떠난 후 루비카는 하녀를 시켜 옷을 드레스 룸으로 나르라고 일렀다. 그리고 난 다음 서재로 다시 돌아왔다. 아직 앤과 함께 상반기에 쓸 예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3월까지 쓴 비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장부를 보고 파악하였으나 앞으로 쓸 예산에 대한 건 달랐다. 그나마 영지 내에서 열리는 축제는 루비카의 소관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가문 내의 기념일은 알짤없이 공작 부인의 영역이었다. 루비카는 챙겨야 할 친척들의 기념일에 머리를 싸맸다.
‘누가 누군지 알아야지.’
물론 차근차근 하나씩 집어서 알아내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당장도 결재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그러는 건 너무 효율이 떨어진다. 루비카는 결국 지름길을 택하기로 했다.
“친척에 대한 선물이나 기념일에 쓰는 비용은 예년보다 조금 더 내는 쪽으로 할게.”
“예년 기준으로 어느 정도로 잡을까요?”
“5%정도 더?”
그런 의미에서 앤은 정말이지 믿음직한 시녀장이었다. 안주인이 없는 4년 동안 공작가를 담당했던 그녀는 예산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 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 덕인지 주판을 다루는 솜씨도 능숙했다.
앤은 당장 루비카가 말한 퍼센트를 적용한 금액을 계산해서 보여 줬다.
“마님께서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오시고 처음 보내는 선물이니 예년보다 조금 신경 쓴 느낌을 내는 게 아무래도 좋겠지요.”
게다가 셰니에 부인 같은 잔소리 꾼 기질이 없는 것도 좋았다. 루비카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하녀들에게 주는 간식비도 넉넉히 잡았다. 주방에 대한 예산 또한 놓칠 수 없었다. 이제 스티븐은 구실을 붙여 주지 않아도 매일 당연하다는 듯 케이크를 만들었다. 새로운 레시피 책을 구해 아예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설탕과 밀가루, 계피, 럼주 등등의 예산을 다른 때보다 높이 책정한 앤은 계산하다가 말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아아.”
“앤?”
“안 되겠어요. 마님, 엘리제 양에게 옷을 사 주기로 한 거 취소하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