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67화
* * *
루비카가 별채를 수리하고, 엘리제를 시녀를 맞이하는 등 바쁜 한때를 보내고 있을 때 그녀만큼이나 바쁜 남자가 있었다. 세사르 경은 흐뭇한 표정으로 점점 모습이 갖추어지는 온실을 바라보았다. 온실은 클레이모어 저택에서 정원 서북쪽에서 조금 떨어진 귀퉁이에 자리 잡았다. 그는 아예 온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살기로 결정하였다.
“오늘 온 묘목은 이것뿐인가?”
“네, 이게 저희 상단에서 구할 수 있는 덩굴장미의 전부입니다.”
상인의 설명에 세사르는 돋보기를 꺼내 화분에 담긴 다양한 종류의 장미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다채로운 색상과 커다란 꽃봉오리, 모두 아름답기로 유명한 장미였다. 이만큼이나 구하기 위해서 든 돈은 그의 전 재산을 웃돌고 있었다. 루비카가 그의 연구에 투자하지 않았다면 시도도 못해 볼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이 들고 있었다. 세사르는 그 돈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상태가 좋지 않거나 병이 든 장미를 귀신같이 찾아내어 빼 버렸다. 생각보다 깐깐한 그의 눈짓에 상인은 벌써 기가 죽었다.
“음…….”
화분을 다 둘러본 세사르가 입맛을 다셨다. 바로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대금을 치르지 않고 망설이는 그의 모습에 상인은 애가 탔다. 그가 여태 상대한 자들은 대부분 화원을 경영하는 자들이었다. 세사르의 겉모습은 그들과 똑같았다. 무릎까지 오는 긴 장화, 옷에 잔뜩 묻은 흙은 흰수염마저 얼룩덜룩 더럽히고 있었다. 햇볕에 잔뜩 탄 피부마저 그랬다. 그러나 세사르를 그들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다. 같은 모종을 대량으로 주문하지 않고 여러 모종을 겹치지 않게 주문한 것부터 시작해서 대체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참 난감한 사람이었다.
‘……주문을 취소하면 곤란한데.’
시세보다 높게 가격이 책정된 일이었다. 대금도 신용이 확실한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치를 예정이었다. 처음 일을 잡았을 때 세상에 이런 행운이 또 없다 여겼다. 그날 밤은 기분이 좋아 값비싼 와인을 마셨다. 하지만 생각보다 까다로운 세사르의 모습에 그는 땀을 흘렸다. 세상에 거저먹는 일이란 없는 모양이다.
“저희 상단만큼 상태 좋은 묘목을 취급하는 곳은 없습니다. 다른 곳은 이보다 더 많은 불량이 있을걸요.”
거래가 취소될까 황급히 말을 덧붙였으나 세사르는 대답이 없었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한참을 유영하던 그가 별안간 말을 꺼냈다.
“야생 장미가 필요하겠군.”
“야생 장미요?”
“너도 충분히 예쁘고 튼튼하긴 하지만 역시 덩굴장미만으로는 안정성이 부족하겠지? 야생 장미의 튼튼함이 필요해. 이왕이면 다마스크 장미류로 함께 육종해 예쁘면서 향기가 좋은 장미로 개발하는 게 좋으려나.”
어떻게 맞장구를 쳐야 하나 고민하던 상인은 곧 세사르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님을 눈치챘다. 그는 묘목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음, 그래. 그래. 그게 좋겠군.”
그러더니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떠야 하나 어째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세사르가 홱 고개를 돌렸다.
“다마스크 장미류도 이만큼 다양하게 구할 수 있습니까?”
“네? 네.”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세사르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비볐다.
“이만큼 빨리 가능하오? 5월이 되기 전에는 결과물을 하나라도 내고 싶어서 그러는데.”
“가능합니다.”
상인이 재빨리 머리를 굴러 대답했다. 돈 앞에서는 불가능도 가능해지리라. 아무래도 거래를 취소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좋소. 그럼 부탁하지.”
“저, 대금은?”
“저기 클레이모어저택의 집사에게 이걸 내밀면 바로 처리해 줄 것이네.”
세사르는 구입을 결정한 묘목에 대해서 체크한 리스트를 상인에게 내밀었다. 내용은 정확했다. 열심히 화분만 살피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또 이런 건 체크한 걸까? 허술해 보이면서도 꼼꼼한 세사르의 일처리에 상인은 눈을 끔뻑였다.
리스트를 건네받자마자 그는 잘 부탁한다는 인사도 없이 장갑을 홱홱 벗더니 오두막으로 걸어가 버렸다. 종잡을 수 없는 괴짜 같은 행동에 상인은 깊은 한숨을 토했다. 어찌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어는 대어였다. 상인은 세사르에게 한마디하고 싶은 기분을 꾹 눌러 담고 저택으로 향했다.
“야생장미 도감을 어디에 뒀더라.”
오두막 방안은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세사르는 산처럼 쌓인 책 더미를 뒤져 붉은 책 하나를 간신히 찾았다. 그가 존경해마지 않는 학자가 쓴 책이었다. 그는 가죽 가방을 꺼내 커다란 책을 넣고, 옷가지 몇 개와 삽, 나무뿌리를 감쌀 면보와 육포를 비롯한 며칠 먹을 식량을 챙겨 넣었다. 다른 건 다 업자를 통해서 구입할 수 있으나 야생장미는 불가능했다. 외투까지 다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하던 그는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차차, 거름! 이보시오. 거름을 주문하려 하는데!”
묘목에 정신이 팔려 거름을 주문하는 걸 깜빡했다. 황급히 밖으로 튀어 나갔지만 상인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혀를 차며 저택을 향하려던 세사르의 눈에 웬 남자가 보였다. 묘목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등이 익숙했다.
“경?”
“세사르 경, 오랜만입니다.”
공작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스테판이었다.
“각하께서 여기에 오실 예정입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기대에 찬 세사르의 질문을 스테판이 냉정히 잘랐다. 세사르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언제나 공작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는 스테판이 공작이 오지도 않을 이 화원에 온 게 의아했다.
“그럼 무슨 일입니까?”
“조금 구경을 왔습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의 말에 세사르의 표정이 대번 환해졌다.
“꽃을 좋아합니까?”
“그건…….”
스테판이 잠시 입을 열었다 곧 닫았다. 세사르는 그가 부끄럼을 타는 모양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확실히 검을 휘두르는 기사와 꽃이라니 안 어울리는 조합이기는 했다.
“아직 계절이 맞지 않아 꽃이 핀 묘목은 없습니다. 하지만 온실이 완공되면 곧 가득 핀 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세사르는 내친김에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기껏 꽃이 보고 싶어서 왔는데 헛걸음을 하게 된 스테판 경에게 미안했다. 묘목의 종류와 앞으로 피게 될 꽃에 대한 설명은 스테판 경은 눈살하다 찌푸리지 않고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키우는 꽃은 나중에 무엇으로 쓰는 겁니까?”
세사르가 호들갑을 떨며 대답했다.
“더 예쁜 장미꽃을 개발하는 재료가 되지요.”
“……그 장미꽃의 용도가 뭐지요?”
질문이 이해가 되지 않아 세사르는 눈을 끔뻑였다. 아니 꽃이 예쁘면 됐지 용도랄 게 따로 있나. 그러나 스테판 경은 제법 초초해보였다.
“마님께서 정원을 꾸미는데 쓰기로 했습니다.”
“정원……. 정말 그 용도 외에는 없습니까? 특별한 독이 있다든지, 기계의 원료가 된다든지.”
“아니, 꽃이 이쁘면 됐지 다른 용도란 게 따로 필요합니까?”
납득하지 못한 스테판이 인상을 썼다. 세사르는 슬슬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사랑스런 꽃을 보고 그런 불순한 상상을 하다니 이건 모욕이다.
“경의 말이 맞는군요.”
세사르는 무척 단순한 사람이었다. 스테판의 그 말에 그의 기분은 벌써 풀려 버리고 말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스테판은 제법 도움이 될 듯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 이제부터 야생장미를 찾으러 여행을 떠날까 하는데 혹 야영을 하는 요령 같은 걸 알려 줄 수 있소?”
“……야영?”
스테판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잘못 걸렸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만 일이 밀려 바쁘다는 소리를 하고 도망칠까 했으나 그랬다간 더 골치 아파질 것 같았다. 그는 포기하고 설명을 하기 좋은 자리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설명해드리지요.”
“역시 꽃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나쁜 사람이 없다더니.”
잘 걷던 스테판의 걸음이 멈췄다.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났는지 세사르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게…… 현재 그의 심정이었다. 그는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세사르에게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 말하면 분명 자신이 여기까지 온 걸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것만은 사양이다.
“야영을 하실 때는 주변 환경이…… 제일 중요합니다. 젖은 땅은 최대한 피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풀이 많은 곳을 고르십시오. 지금, 이 정도 되는 땅이 좋습니다.”
그리고 스테판이 간단하게 은신처를 만드는 시범을 보였다. 세사르는 순식간에 이를 따라했다. 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이 야무졌다.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공작 부인께서 나를 믿고 큰 투자를 하셨는데 내가 실망시켜드릴 수야 없지.”
“그럼 경의 연구에 대한 투자는 모두 공작 부인의 결정입니까?”
“그렇네. 부인이 그렇게 딱 결정하니 공작 각하도 별말 없이 순순히 따르는 게 아닌가. 공작 부인은 다른 어리석은 이들은 없는 심미안을 가졌어. 내 스케치를 딱! 보자마자 그게 엄청나게 아름다운 꽃이 될 거라는 걸 알아보신 거지. 꽃을 사랑하는 자네라면 알겠지?”
“하하하.”
슬쩍 떠보자 의외로 세사르를 순순히 대답했다. 꽃을 좋아하는 기사에서 사랑하는 기사가 된 건 부담스러웠지만 의외의 수확이 있었다.
“그렇게 뛰어난 심미안을 가진 줄을 몰랐군요.”
“그렇지, 그렇지. 남과 다른 분이네.”
“어디가 달랐지요?”
맞장구를 치는 척 질문을 집어넣었다. 이러면 상대편은 별 의미 없는 대화인줄 알고 쉽게 정보를 토하고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행동거지나 이런 게 남과 달라. 격식도 분명 넓고 공부도 많이 하셨을 거야.”
공작 부인은 따로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보통의 영애들이 그렇듯 가정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았을 뿐이다.
“공부는 따로 안 하신 걸로 압니다.”
“글쎄, 그건 아닐 텐데. 희한하군. 분명 고대 바바리아어로 적힌 꽃 이름을 정확히 읽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