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66화
엘리제는 잔뜩 흥분해서 말하는 루비카를 보았다. 정말 당황스러웠다. 이 사람이 정녕 셰니에 부인을 차갑게 일갈해 쫓아낸 공작 부인이란 말인가. 직접 목격했으나 전혀 다른 온도차에 엘리제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제발! 다시 한 번 그렇게 웃어 줘.”
엘리제가 망설이자 루비카가 두 손을 모아 간청했다. 엘리제는 그만 혼이 나가 버렸다. 감히 자신이 하늘같은 공작 부인을 저리 만들다니, 황송하고 망극하기가 이를 데 없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을 진흙더미에서 구해 준 사람이었다.
‘부인이 원한다면 난 사형대 앞에서도 웃을 수 있어.’
엘리제는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기억을 떠올려 간신히 눈꼬리를 휘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억지로 웃지 말고, 아까처럼 도도하게.”
“도도……요?”
“응, 도도하게. 넌 도도한 게 정말 잘 어울려.”
뜻밖의 말이었다. 상냥함과 우아함은 여인의 미덕 중 하나였다. 엘리제는 항상 어떤 일이든지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하라 교육받았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까다롭게 굴거나 까칠하게 말하면 셰니에 부인이 매섭게 지적했었다.
‘넌 눈꼬리가 올라가서 안 그래도 인상이 사나운데 입까지 다물고 있으면 정말 누가 널 데려가겠니?’
덕분에 엘리제는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자신이 혹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했는지 눈치보는 버릇이 생겼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가 나는 자신의 외모가 정말이지 싫었다.
어떻게 하면 친절해 보일지, 순해 보일지, 거울을 보며 억지로 웃는 연습을 하며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날 때부터 착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람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공작 부인은, 루비카는 그녀에게 도도하게 웃어 달라고 부탁했다.
“도도한 건…… 도도한 건…….”
좋지 않다는 말을 하려다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기대에 부푼 공작 부인의 얼굴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이 점점 더 뒤죽박죽되었다. 여태까지 옳다고 배운 것과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화려한 여인들은 당장 남자들의 눈을 사로잡겠지. 하지만 그런 여자들은 그냥 하룻밤 장난용이야. 남자들이 결국 선택하는 건 유순하고 상냥한 여인이란다.
그 가르침에 따랐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가만히 유순하게 있으면 결국 보상이 올 것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공작 부인은 그와 정 반대되는 것을 엘리제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날 구해 준 건 공작 부인이야.’
순종적이고 착한 여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셰니에 부인은 엘리제를 구해 주지 않았다. 지나쳤던 수많은 남자들 중 그녀가 더 착해져야 한다고 말한 적은 있어도 고맙다며 청혼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엘리제 안에서 작은 반항심 같은 것이 일어났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면 노력하지 말자.
‘부인이 도도한 여인이 좋다면 기꺼이 그리 하자.’
그게 훨씬 더 현실적이다. 자신은 루비카의 시녀였고, 시녀는 모시는 사람을 기쁘게 할 의무가 있다. 엘리제는 동그랗게 만들었던 눈꼬리를 편안히 내리고, 억지로 올렸던 입꼬리를 풀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종종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웃었다.
“꺄아!”
오페라의 멋진 미남 배우를 보며 소녀 떼들이 종종 그러듯 루비카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여태까지와 다른 그녀의 행동에 하녀들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바로 그거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루비카는 그런 주변의 분위기를 눈치챌 기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온 정신과 신경은 이제 막 개화하려는 엘리제의 아름다움에 쏠려 있었다.
“제니! 네 말대로 붉은 연지만 살짝 바른 게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아. 올라간 듯 내려간 듯 살짝 머금은 미소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는 것 같지 않니?”
“네? 네.”
제니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루비카의 갑작스런 태도에 얼이 나가 있느라 정작 엘리제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다. 제니는 정신을 차리고 엘리제를 다시 보았다. 아직 자세라던가 어깨 같은 건 많이 위축되고 자신감 없어 보였지만 제니는 곧 루비카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챘다.
“맞아요. 연지가 작은 입술을 더욱 강조해 주네요. 도도한 미소가 무척 고귀해 보여 감히 다가가기 힘든 분 같아요.”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오기 전 여러 귀부인을 상대했던 제니다. 칭찬이라면 도가 텄다. 그녀는 알고 있는 모든 단어를 끌어들여 기꺼이 엘리제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귀부인의 앞에서는 잘 움직이지 않았던 혀가 이번에는 마비라도 풀린 듯 술술 움직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정말 좀 더 자신감 있는 태도로 도도한 표정을 지으면 예쁠 것 같아.’
제니 덕에 다른 하녀들도 정신을 차리고 동조하는 말을 한마디씩 덧붙였다. 이에 누구보다 뿌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루비카였다.
“그렇지? 역시 그렇지?”
칭찬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아까와 같은 새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침착하고 현명한 여태의 공작 부인으로 돌아왔다.
‘……아까 그건 뭐였지?’
‘그냥 잠시 흥분하신 게 아닐까?’
‘맞아, 나도 사실 좀 놀랐어. 분명 꾸미는 과정을 보았는데 믿기지 않았다니까.’
하녀들은 저마다 눈빛으로 의견을 나누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루비카는 여전히 쑥쓰러워하는 엘리제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느라 주변의 분위기를 몰랐다.
“그럼…….”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엘리제는 점점 불안해졌다. 호의어린 시선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오래 받으면 부담스럽다.
“그만 옷을 벗을까요?”
엘리제는 이것이 일종의 인형놀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시녀로서 정식 업무는 시작되지 않았으나 이정도면 공작 부인에게 작은 즐거움 정도는 주었다고 판단했다. 솔직히 얼떨떨하고 불안하기는 하였으나 그녀도 즐거웠다. 하지만 입고 있기 부담스러웠다. 이렇게 비싼 옷을 살 돈도 능력도 엘리제에게는 없었다. 계속 입고 있다가는 이런 드레스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할까 두려웠다. 차라리 빨리 벗어 버리는 게 낫다.
“벗다니?”
루비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반문했다. 적갈색 눈동자가 빛을 받아 잠깐이지만 붉게 빛났다.
“부인의 옷인데 제가 계속 입고 있는 것도…….”
“가져!”
엘리제가 더는 부정적인 말을 꺼낼 수 없도록 루비카가 재빨리 말을 끊었다. 그녀의 요정은 남이 주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는 게 어울린다. 고개 숙이거나 우물쭈물하거나 자신 없어 하는 태도는 요정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키기만 할 뿐이었다.
“네? 가지라니요. 부인, 제가 어떻게 부인의 옷을 감히.”
“하지만 이 드레스, 나랑은 안 어울려. 가지고 있어 봤자 입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엘리제 너랑은 정말 잘 어울렸어. 꼭 널 위해 지어진 옷 같았다고 해야 할까? 누구도 입지 않은 채 옷장에서 썩는 것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입어 주는 편이 옷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해.”
하지만 너무 과하다. 너무 비싼 드레스다. 분수에 맞지 않는다. 엘리제는 마음속의 불안을 루비카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그조차도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우물거렸다. 보다 못한 앤이 나섰다.
“엘리제 양, 받으세요.”
“하지만…….”
“부인께서 시녀에게 옷을 물려주는 일은 흔하답니다. 이제 엘리제 양은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시녀에요. 시녀가 입는 옷을 공작가의 체통과 관련 있답니다. 부인께서 엘리제 양을 배려해서 선물을 내려 주셨으니 기쁘게 받는 것이 도리에요.”
그래도 이건 너무 비싼 드레스다. 엘리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스토마커에는 작지만 루비가 장식되어 있었다. 천은 분명 어디에선가 수입한 비싼 것일 거다. 세리토스 왕국에서는 이처럼 좋은 광택이 나는 천을 생산하지 못한다. 시녀보다는 대가문의 영애나 입을 법한 옷이었다. 실제로 공작 부인이 루비카의 옷장에서 나온 옷이다.
하지만 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시녀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의 얼굴에 누를 끼치지 않을 정도의 옷을 입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엘리제는 그런 옷을 마련할 돈이 없었다. 비록 시녀 월급이 나온다 할지라도 그녀가 받는 월급을 4개월은 모아야 이런 드레스를 한 벌 살까 말까 했다.
“감사……합니다. 부인, 제가 뭘 몰라서 호의를 거절하려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앤의 말을 듣고 있었던 루비카가 정신을 차렸다. 루비카는 앤이 최대한 좋게 엘리제에게 형편을 생각해서 옷을 받으라고 말한 것을 눈치챘다. 루비카는 비로소 찾은 엘리제의 아름다움에 그저 들떴을 뿐이었다. 그래서 부디 자신이 찾은 드레스를 입어 줬으면 했다. 엘리제의 사정과 시녀로서 입어야 할 옷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부끄러웠다. 나이깨나 먹었는데 그녀의 사정을 섬세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아무리 철이 들고 나이를 먹어도 아름다운 것의 앞에만 서면 그녀는 쉬이 이성을 잃고 말았다.
“나야말로 받아 줘서 기뻐. 자주 입어 줘.”
루비카의 말에 엘리제가 살짝 미소 지었다. 꼭 밤의 요정이 웃는 것처럼 도도하고 매혹적인 미소였다.
‘사교계에 나가면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겠지.’
루비카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벌써 엘리제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빨리 보고 싶었다.
하지만 농번기에는 사치스러운 무도회 같은 건 함부로 열 수 없다. 그저 평판만 깎일 정도면 루비카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농번기에 무도회를 열면 주최자는 물론이거니와 참석한 사람들도 벌을 받는다. 어차피 열어 봤자 아무도 오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는 세리토스 왕국만의 법이었다. 언제나 농작물이 모자라는 나라는 귀족의 다른 사치들을 다 모른 척 눈감아 주면서 농사 일손이 한창 바쁜 때에 무도회를 여는 것만은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고 루비카는 그 법을 좋아했다. 그래도 왕이 왕국민을 조금이나마 생각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겨울이요?”
“그래야 무도회에 참석해서 이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널 볼 수 있잖아. 널 보면 다들 깜짝 놀랄 거야.”
엘리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도회에 참석해서 그녀는 좋은 기억이 없다. 언제나 벽 뒤에 오도카니 서서 춤 신청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비참하고 낯부끄러운 기억뿐이다. 할 수 있다면 무도회 따위 가고 싶지 않았다.
“마님, 하지만 저는 항상 월플라워(벽에 핀 꽃: 춤 신청을 받지 못하는 여인을 이르는 말)였어요. 춤은 상대가 있어야 해요. 저는 아마…… 추지 못할 거예요.”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이젠 아니야.”
단호한 루비카의 말에 옆에 있던 하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확신했다. 수도의 수많은 잘난 영식들이 벌떼처럼 엘리제에게 달려드리라.
“진작에 시녀님의 미모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땅을 치고 후회할 걸요?”
“추종자에게 둘러싸여서 마님의 곁에 있기 힘들 수도 있어요.”
이구동성이었다. 엘리제는 얼떨떨했다. 하녀들이 말하는 게 자신인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엘리제, 춤은 잘 추니?”
“네? 그다지 잘 추지는 못해요.”
“이제부터 연습해. 아마 올 겨울부터는 발에 땀이 나도록 춰야 할 거야.”
그 자리에서 엘리제가 앞으로 들어야 할 수업 중 춤이 추가되었다.
‘아, 빨리, 빨리 겨울이 왔으면! 수도 사교계에 갈 때 엘리제도 무조건 데려갈 거야.’
루비카는 굳게 다짐했다. 과거에 무시했던 소녀가 한 떨기 꽃처럼 멋지게 변한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놀랄까.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무지 했는지, 미처 아름다움을 눈치채지 못한 걸을 엘리제에게 사과하겠지. 상상만 해도 흐뭇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