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65화 (65/212)

# 6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65화

루비카가 엘리제의 손을 잡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설득했다. 손과 손을 통해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 따스함에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님을 믿지. 그럼 누굴 믿겠어.’

루비카의 얼굴에 대번 빛이 서렸다. 그녀는 기뻐하며 엘리제를 꼭 끌어안았다. 엘리제는 루비카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하긴 했으나 싫지 않았다.

“좋아! 그럼 이제 나한테 맡겨!”

그 말이 신호였다. 옆에 있던 제니가 재빠르게 구석에 있던 자그마한 의자를 가져와 엘리제를 앉혔다.

“난 옷방에서 옷을 좀 골라 올게.”

그리고 앤과 하녀 두셋이 루비카를 따라 우르르 작은 방으로 갔다. 따라가야 하는 걸까? 나는 그녀의 시녀인데? 엘리제가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제니가 그녀의 어깨를 꾹 눌러 저지했다. 하녀와 시녀, 평민과 귀족. 신분의 격차가 분명할진데 제니의 표정이 너무 결연해 엘리제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그녀의 무릎 위에 하얀 천이 깔리더니 제니가 주머니에서 은제 가위를 꺼냈다. 여태 보던 가위와는 다른 모습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가위를 든 채 그녀가 다가왔다.

날, 날 어떻게 하려나? 역시 시녀가 될 생각이 없냐는 말은 그저 미끼였던 걸까? 월급까지 지불하는 정성을 들여 괴롭히다니, 대체 무슨 일이 펼쳐지려는 거지? 오돌오돌 떨던 엘리제는 도저히 두 눈 뜨고 있을 자신이 없어 찔끔 눈을 감아 버렸다.

싹둑

곧이어 서늘한 소리가 바로 눈앞에서 들렸다. 절로 목이 움츠려들고 이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가만있으세요!”

그러나 제니는 오히려 호통을 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귀족인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외칠 배짱이 엘리제에게는 없었다. 그녀는 이 새로운 괴롭힘에 하루 빨리 익숙해지자고 되뇌었다. 그래, 어떤 방식으로 괴롭히든 월급은 주잖아. 잠깐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야.

“자, 다됐어요.”

서걱 서걱 들리던 소리가 끝난 뒤 제니가 다정히 말했다. 목소리에 깃든 따스함이 믿겨지지 않았다. 아무도 머리를 책으로 내려치지도 팔을 자로 때리지도 않았다. 그래도 엘리제는 눈을 꾹 감았다. 도저히 뜰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가……, 아니. 시녀님 이제 눈 뜨세요.”

겁이 났지만 눈을 뜨란 말에 가만있다 혹시 더 큰 곤욕을 치를까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는 엄한 표정을 짓던 제니가 싱글싱글 웃으며 거울을 내밀었다. 책 하나 정도 크기의 거울은 자신의 얼굴을 딱 담고 있었다.

‘어?’

거울 속의 얼굴이 낯설었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 곧 엘리제는 앞머리가 눈썹 위에서 싹둑 잘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마가 비칠 정도로 적은 양이었으나 그녀의 삶에서 앞머리를 자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이 거랑 이 거 어때?”

마침 루비카가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드레스 두 벌이 들려 있었다. 공작 부인인 그녀가 지금 입고 있는 옷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이었다.

“어머, 이게 딱 이겠어요.”

제니가 재빨리 꽃분홍 드레스를 집더니 엘리제의 목 아래에 대었다.

“그렇지? 나도 그게 어울릴 거라 생각했어.”

그 말이 신호였다. 별 다른 명령도 하지 않았는데 하녀들이 엘리제를 에워쌌다.

“팔을 좀 들어 보세요.”

“일단 구두를 벗기자.”

“코르셋의 끈이 낡았네요. 튼튼한 끈이 어디 있더라.”

“슬립은 깨끗하네요.”

어? 어. 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옷이 벗겨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루비카가 가지고 온 드레스로 갈아입혀졌다. 가슴에 수놓아진 장미와 루비로 정신이 어질어질 했다. 그렇게 비싼 드레스는 엘리제의 인생에 처음이었다.

“머리는 린다 네가 잘하지.”

“네!”

루비카의 지목을 받은 빨간 머리의 하녀가 기세 좋게 나섰다. 그녀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꽉 묶여 있던 엘리제의 머리를 풀더니 향 좋은 기름을 바르고 솜씨 좋게 빗기 시작했다.

‘셰니에 부인은 정신 사납다고 머리를 풀고 다니지 말라고 했는데…….’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를 차버릴 수가 없어 엘리제는 가만히 있었다. 그 사이에 앤이 간단하게 착용할 수 있은 머리핀이 찾아왔다. 가슴에 장식된 자수와 비슷한 붉은 장미 모양으로 커팅된 루비는 딱 봐도 비싸 보였다. 린다는 그 비싼 머리핀을 아무렇지 않게 방금 막 땋아서 꼰 옆머리에 붙였다.

‘내……내가 가진 걸 다 팔아도 못 살 것 같은 머리핀이었어.’

무서워서 머리핀이 달린 옆머리 쪽은 보지도 못했다. 잔뜩 겁먹은 엘리제와 달리 주변은 웃음꽃이 피었다.

“머리카락을 그렇게 조금 땋아서 돌돌마니 꼭 장미 같아.”

“맞아, 꼭 장미모양 머리핀이랑 잘 어울리네.”

“제니의 말대로 머리를 내린 게 훨씬 더 잘 어울려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엘리제는 가까스로 안도했다. 그때 제니가 동그란 통 하나를 꺼냈다.

“아직 어리니까 그냥 입술연지만 발라 줘.”

“네.”

통 가득 담긴 붉은 고체를 제니가 손가락에 바르더니 엘리제의 입술에 꼼꼼히 묻히기 시작했다. 셰니에 부인이 발랑 까진 아이들이나 바르는 것이라고 했었지. 특히 붉은 색은 상스럽고 촌스러운 색이라 했었다.

‘……날 놀리고 있는 건가?’

이렇게 잔뜩 꾸민 뒤 비웃으려나. 아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 천박한 모습을 한 걸 만천하에 보여 주려고 그러나? 엘리제는 나쁜 예측밖에 할 줄 몰랐다. 불행과 푸대접은 그녀의 친구였으나 행운과 호의는 저 바다 건너 님프의 섬처럼 멀리 있었다.

“됐다. 됐어.”

제니의 손이 떨어지고 루비카가 기뻐하며 엘리제의 손을 잡고 전신거울 앞으로 갔다. 제 꼴이 얼마나 우습고 천박할지. 엘리제는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거울을 보았다.

‘어?’

거기에는 인형이 있었다.

‘말도 안 돼.’

촌스럽지도 우습지도 천박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예뻤다. 일자로 자른 앞머리는 엘리제의 살짝 올라간 푸른 눈을 강조하고 있었다. 분홍빛 드레스는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 환상적으로 잘 어울렸다. 거기에 린다가 장미모양으로 땋아 만든 머리카락과 붉은 장미모양 머리핀, 스토마커의 장미자수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살짝 덧바른 연지는 천박하게 보이기는커녕 엘리제를 더욱 도도하게 보이게 해 범접하기 힘든 느낌마저 주었다.

거울 속에 비친 소녀가 정녕 자신이란 말인가.

그냥 귀족소녀도 아니고 꼭 어느 나라의 공주님 같았다. 엘리제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울을 보면 생기 없고 꼬질꼬질하며 촌스러운 소녀가 자신을 반길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거울 속은 자신은 전혀 딴 사람 같았다. 그냥 가슴이 벅차오르고 너무 놀라워 오히려 믿어지지 않았다.

“마음에 드니?”

엘리제가 거울을 보고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루비카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조바심이 났다. 넋이 나가 있었던 엘리제가 화들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보니 모두 기대감 넘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머리를 꾸민 린다와 얼굴에는 부드러운 크림을, 입술에는 딱 어울리는 연지를 발라 준 제니가 가장 기대감에 찬 얼굴을 하였다.

“고…….”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려했던 엘리제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하녀에게 고맙다고 하면 부인께서 자존심 상해할 수 있어.’

셰니에부인은 엘리제에게 하녀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고마움을 표시할 때도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만 하고 나머지는 눈치를 봐서 하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 눈치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았다.

-높으신 분에게 예법에 따라 대하지 않으면 화를 사고 말아!-

셰니에 부인의 말이 귀에 윙윙 울렸다. 엘리제는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으나 자칫 잘못하다 모두의 기대를 어긋나게 할까 두려웠다. 머릿속이 꼬인 실처럼 복잡하게 엉켰다.

“……마음에 들지 않아? 옷이 별로야?”

엘리제가 활짝 웃기는커녕 울상을 짓자 루비카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옷을 준비할게.”

루비카가 고른 옷은 엘리제와 무척 어울렸다. 입자마자 옷이 제 주인은 찾은 듯 자태를 뽐냈다. 하지만 정작 엘리제의 감상은 다를 수 있다. 미美란 주관적인 거다. 루비카는 엘리제가 마음에 드는 옷을 찾을 때까지 얼마든지 옷장의 옷을 내어줄 수 있었다. 루비카가 당장에라도 드레스 룸에 다시 갈 채비를 하자 엘리제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뇨.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저 같은 게 어찌 감히 이런 귀한 옷을 입고…….”

“들어? 마음에?”

“……네.”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루비카를 비롯한 주변의 하녀들이 동시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엘리제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그들이 울고 웃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 불안하고 얼떨떨했다. 그녀는 항상 주변에서 타인의 반응에 따라 제 얼굴과 말을 맞추었다. 누구도 그녀가 왜 웃고 우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었다.

“머리스타일은 어떤가요? 너무 제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한 것 같은데…….”

“마, 마음에 들어요.”

엘리제는 루비카의 눈치를 흘낏 살피다 린다만 들을 수 있도록 모기만한 소리로 조용히 덧붙였다.

“무척 예쁘고 신기한 걸요.”

“그렇지?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냈는지 몰라. 장미모양 머리핀이랑 어울러져서 머리에 저절로 꽃이 핀 것처럼 보이지 않아?”

공작 부인을 제쳐 두고 하녀를 먼저 칭찬했건만 루비카는 화내기는커녕 칭찬의 말을 보탰다. 엘리제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루비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의 얼굴 표정을 보았을 때 이는 비꼰 것도 분위기에 맞춘 것도 아닌 순수한 진심이었다. 이상하게 어깨가 가벼워졌다. 무거운 짐 하나를 떨친 엘리제의 입가에 아주 희미하고 작지만 미소가 떠올랐다.

“어머!”

루비카가 양손으로 입을 막더니 잠시 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엘리제는 제가 뭔가 실수라도 했는지 염려스러웠다. 루비카의 그런 행동에 당황한 건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작 부인의 행동거지가 좀 특이한 구석이 적잖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앤은 어디가 아픈지 혹은 잘못된 곳이 있는지 사색이 되어 당장이라도 주치의를 부를 기세였다.

“바로 그 미소야!”

하지만 루비카의 입에서 나온 외침은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벌처럼 날쌔게 엘리제의 손을 잡았다.

“방금, 방금처럼 웃어 줄래?”

“네?”

“엄청 도도해서 정말 예뻤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