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64화
도저히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그저 솔라나 양을 옆에 두고 예쁘게 꾸며 주고 싶어서 시녀로 들였다는 말은 추호도 꺼낼 수 없었다. 설사 그대로 설명한다고 해도 지금 이 사람들은 그 뜻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리 없다. 분명 솔라나 양을 가엾게 여겨 적극적으로 그녀를 아끼겠다는 뜻으로 해석하고도 남겠지.
“그냥 시녀가 필요해서 그랬을 뿐이야.”
“네, 그러시겠죠.”
그냥 변명하는 걸 포기하고 한숨에 가까운 대답을 했다. 그러자 앤이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녀들의 미소는 훈훈하다 못해 이제는 손이 데일 정도로 뜨끈해졌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현장이었다. 루비카는 그동안 악명을 쌓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상냥하고, 현명하고, 자애로운 공작 부인으로 명명되었다. 그러고 지금 이 순간부터는 그 세 가지 수식어 뒤에 ‘겸손한’ 이란 말이 붙었다. 상냥하고, 현명하고, 자애로우며 겸손하기까지 한 공작 부인.
‘대체 악명은 언제 쌓느냐고!’
루비카는 자꾸 의도와 달리 쌓이는 명성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한 꺼풀 뒤집어 보면 그녀의 의도는 부끄러울 정도로 욕망에 충실한 이른바 총천연색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리 여기지 않았다. 그리 판단하기에는 루비카는 지나치게 차분하고 얌전해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노인이 될 때까지 얼굴을 밝힌다는 사실이 들통나지 않은 이유기도 했다.
* * *
산책이 끝나자마자 루비카는 별채를 향했다. 루비카가 다녀간 뒤 별채는 한참 수리 중이었다. 수도나 벽 같은 건 고치려면 시간이 꽤 걸렸으나 당장 침구가 새것으로 깨끗이 교체되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반색하며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목적이 있는 그녀는 그들을 빠르게 스쳐지나 4층으로 돌진하다시피 올라갔다.
“솔라나 양,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마침 쉬는 중이었던 엘리제는 깜짝 놀라 문을 열었다. 루비카는 작은 방을 휘둘러본 뒤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베르너 저택에서 지냈던 작은 다락방에 비하면 한결 나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루비카는 그녀에게 좀 더 좋은 환경을 선물하고 싶었다.
“솔라나 양, 오늘 온 건 제의를 하기 위해서야.”
엘리제의 얼굴에 언뜻 어두운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여러 번 잡았다 놓았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움츠러든 어깨는 루비카의 제의라는 게 이 저택에서 나가달라는 소리가 아닐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루비카는 방금까지 솔라나 양이 자신보다 나은 환경에 있었다고 생각한 걸 취소했다. 먹고 자고 입는 게 한결 나으면 뭐하나. 이리 주눅 든 태도를 보았을 때 그녀는 무얼 하든 혼나기가 일쑤인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루비카와 다를 바 없거나 더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솔라나 양. 당신은 잘못한 게 없어.”
다정히 대꾸했으나 엘리제의 얼굴에서는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엘리제는 자신의 삶에 다가올 것은 불행 외에 아무것도 없으리라 확신했다. 무엇이 새로 오신 공작 부인의 맘을 상하게 했을까. 초조함에 그녀는 루비카가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해도 앉지 못했다. 루비카는 하는 수 없이 용건을 먼저 밝혔다.
“그대가 내 시녀가 되었으면 해.”
순간 엘리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제가……요.”
믿기지 않았다. 철들 무렵부터 그녀의 삶에는 불행만이 왔었다.
“그래.”
“……부인,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는 인사하는 동작도 엉망이었고, 문 여는 법도, 걷는 법도 어색하기 짝이 없어요.”
“그건 셰니에 부인이 잘못 가르쳐서 그런 거지. 그 일에 대해서는 사과할게.”
“사과라니, 그런! 당치도 않는 말씀마세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정말 그녀의 앞날에 좋은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걸까? 무언가 착오가 아닐까? 정말 공작 부인이 자신을 시녀로 들이려는 걸까?
만약 그녀가 확신했을 때 루비카가 잠시 사람을 착각한 거였다고 철회를 한다면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을 것이다. 불행이 오는 건 괜찮다. 그건 익숙한 일이었으니. 하지만 희망이, 기쁨이 다가왔을 때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 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리라.
“저, 저는 목소리가 크지 않아요. 카트린느보다 자수도 잘 못 놓고, 클로에보다 작문도 못해요. 글씨도 예쁘게 못 쓴답니다.”
그 전에 확인하고 싶었다. 확신한 뒤 실망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다가올 행운 같은 게 남아 있지 않다는 걸 미리 확인하는 게 나았다.
루비카는 오돌오돌 떨며 마치 결정을 철회라고 해 달라는 듯 구는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혹 자신의 시녀가 되기 싫은 걸까?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설사 공작 부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녀는 어쨌든 준남작가 출신이었다. 그녀의 요정이 그럴 타입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콧대 높은 귀족소녀라면 콧방귀를 뀌고도 남았다.
“내 시녀가 되기 싫으니?”
“아, 아니요. 제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다만, 다만…… 저는 너무 부족하고…….”
내리깐 엘리제의 눈이 정처 없이 움직였다.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루비카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내가 그랬지.’
삶의 모든 기쁨을 포기했던 때가 떠올랐다. 잔혹한 전쟁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슬픔 속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쁜 일이 벌어진 게 놀랍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던 그때. 루비카는 조심스레 엘리제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난 네가 마음에 드는 걸.”
땅만 보던 엘리제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좋은 말을 해 주었는데 그녀의 얼굴은 경악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런, 그런……. 전 예쁘지도 않고.”
아니야. 넌 예뻐. 정말 예뻐. 내가 여태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손꼽히게 예뻐. 그렇게 외치고 싶은 걸 루비카는 간신히 참았다. 그래 말해 봤자 솔라나 양의 부정에만 부딪칠 것이다. 이럴 때는 솔직해지면 안 된다. 솔라나 양이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해 주는 게 적절하다.
“고대어는 네가 제일 잘 하잖아.”
“……네.”
이번에는 부정을 안했다. 객관적으로도 엘리제는 고대어 실력이 좋았다. 시녀가 그런 걸 잘해 봤자 뭐하냐는 부정의 마리 나오기 전 루비카가 재빨리 말했다.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나는 고대어를 영 못해. 네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예법이 모자란 거 너무 걱정하지 마. 일하면서 계속 배우면 돼.”
“……하지만.”
“솔라나 양. 내가 구하는 건 시녀이지 예법 선생이 아니야. 하기 싫으면 거면 솔직히 말해도 돼.”
그녀는 드디어 현실을 자각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놀랍지만 현실이었다.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은 엘리제 솔라나를 시녀로 원한다.
엘리제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루비카는 그녀가 자신 없다는 이유로 거절할까 두려워 재빨리 조건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시녀가 되면 월급은 한 달에 150골드 정도 나올 거야. 근무하는 기간에 따라 월급은 일 년에 한 번 인상할 테고, 네가 먹고 자고는 건 여태까지처럼 공작가에서 부담할거니 걱정하지 마.”
엘리제에게는 왕국사관학교에 입단에 공부를 해야 하는 오빠가 있었다. 비록 지참금이 남아 있었으나 빠듯하다. 게다가 그 오빠는 여동생의 앞날을 가로막고 싶지 않다며 그녀가 주는 돈을 줄곧 거부했다. 녹슨 검과 낡은 장갑을 끼고 훈련하는 그를 볼 때마다 엘리제의 마음 한구석이 얼마나 시렸는지 모른다.
두렵다고, 걱정된다고, 잘할 자신이 없다고 믿기지 않는다고 도망칠 때가 아니었다.
“할, 할게요.”
엘리제는 용기를 쥐어짜 간신히 대답했다. 손이 땀으로 축축했다. 여전히 자신은 없었다. 한 달 만에 루비카가 그녀에게 실망해 쫓아낼지도 모른다. 기쁜 일이었고 좋은 기회였는데 벼랑 끝에라도 선 것처럼 무섭고 두려웠다.
“고마워!”
그때 루비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엘리제를 껴안았다. 그녀의 손과 품은 언 마음도 녹일 정도로 따뜻했다. 어느덧 엘리제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해도 루비카는 함부로 쫓아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단 한 번도 타인에게 가져 본 적 없는 기대였다.
“그런 고맙다니요. 감사해야 할 건 오히려 저인 걸요.”
엘리제는 간신히, 정말 간신히 목울대 굴려 대답했다.
* * *
엘리제의 짐은 당장 저택 본관으로 옮겨졌다. 그녀를 시녀로 데리고 오는 건 에드가의 아이디어였기 때문에 딱히 알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루비카는 엘리제의 방을 앤의 바로 옆에 배치했다. 마음 같아서야 자기 방 바로 옆에 두고 싶었으나 4층은 오직 공작부부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엘리제는 루비카의 방 한가운데에 있다. 시녀가 되자마자 루비카의 시중을 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주일 정도 견습 시녀로 앤에게 지도를 받은 후에야 본격적인 업무를 맡을 수 있었다.
마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엘리제를 가운데에 두고 루비카와 하녀들이 빙 둘러섰다. 엘리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제니.”
한참 엘리제를 바라보던 루비카가 말하자 야무져 보이는 하녀가 나섰다.
“약초물에 세수를 하면 피부는 금방 좋아질 거예요. 괜히 이것저것 바르는 것보다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머리는?”
“전 푸는 게 더 예쁠 것 같아요.”
제니라는 하녀의 말에 다른 하녀가 맞장구를 치며 한마디 보탰다.
“이왕이면 앞머리는 짧게 치는 게 더 좋을 것 같구요.”
루비카가 팔짱을 낀 채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은 엘리제에게 고정한 채였다. 엘리제는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살펴보았다. 수수께끼 같은 상황이었다.
‘혹시 부인에 대한 이야기인가?’
가까스로 그런 추론을 했다. 머리니, 세수니, 피부니 이런 저런 의견을 내는 게 아무래도 공작 부인이 입을 옷이나 스타일에서 토론하는 듯 했다. 하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할 것이 공작 부인에 대한 것 말고 또 있으랴. 하지만 쉬 납득이 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부인은 이미 피부가 좋은데……?’
역시 귀부인이라 이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는 건가? 그때 루비카가 손뼉을 짝 쳤다.
“역시 좀 새침한 게 어울리는 스타일이지?”
그 말에 하녀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더욱더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무리 봐도 루비카는 새침한 스타일이 어울리지 않았다. 솔직히 앞머리를 내는 것보다 지금처럼 예쁘게 뒤로 넘기고 핀으로 장식하는 게 더 어울리는 듯 했다. 혹시 다들 루비카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나? 하지만 갑작스럽게 앞머리를 자른 뒤에 부인이 후회하면 어떻게 하지?
치마 아래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엘리제가 드디어 결심을 하고 입술을 뗄 때였다.
“엘리제 나 믿지?”
“네?”
“나 믿고 맡겨 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