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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63화 (63/212)

# 6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63화

* * *

“이 곳은 연구자 분들께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곳입니다.”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마님.”

루비카는 눈앞의 학자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그만 잊고 멍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서쪽 별채에 가는 날이었다. 동쪽 별채처럼 평범하게 연구자들이 살고 수도원과 비슷한 비커와 용액들이 늘어선 연구실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별채에 도달한 루비카는 그녀의 상상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했다. 별채 안으로 들어서자 믿겨지지 않을 만큼 널따란 공간이 펼쳐졌다. 방의 구분 없이 탁 트인 그 곳은 높이가 거의 2~3층만 했다. 천장에는 마석램프를 달아 낮밤 구분 없이 환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한참 연구를 하거나 회의를 하고 있던 학자들이 루비카가 들어서자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쏟아지는 시선에 구두 안의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나도 반갑네.”

인사를 했으니 이제 학자들도 자신의 일에 집중하지 않을까 했다만 그들은 여전히 루비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그녀가 여기서 나갈 때까지 지켜볼 생각인가. 어찌해야 하나 당황했던 루비카의 머리에 에드가가 종종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만 하던 일을 하시게.”

그러자 그녀를 지켜보던 시선이 일제히 사라졌다. 루비카는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은 그녀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공작 부인…… 정말 부담스러운 자리구나.’

간신히 숨을 들이 쉬었을 때 연구소장이라 소개한 자가 그녀를 안내했다.

“이번에 새로 개발 중인 전차입니다. 마님, 이 무쇠는 보통 무쇠가 아니지요. 트롤의 도끼도 이걸 뚫지 못할 겁니다. 하하하하.”

연구소장은 마차 다섯 대는 훨씬 넘을 정도로 큰 전차를 가리키며 웃음 지었다. 따라 웃음 지어야 했으나 루비카의 얼굴은 어두워져만 갔다.

“게다가 여기엔 포가 달려 있어서 공격뿐만 아니라 방어도 가능합니다.”

루비카가 오기 전 연구소장은 공작에게 따로 언질을 받았다. 부인이 오면 각별히 잘 안내하라고. 특히 ‘그’가 얼마나 대단하고, ‘그’가 얼마나 엄청난 발명을 해냈으며, ‘그’의 발명품으로 왕국에 어떤 이득을 가져왔는지 소상히 설명하라고 했다.

‘쯧쯧, 사내란.’

한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던 공작의 변모에 연구소장은 혀를 휘둘렀다. 제 부인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잘난 척하듯 전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그러나 연구소장은 에드가의 명령에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기도 했지만 에드가가 없으면 진척이 되지 않을 일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연구소장이 아무리 세 치 혀를 놀려도 공작 부인은 제 남편에 대한 경의로 눈빛을 반짝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두워져만 갔다.

‘안 되겠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경을 칠 것이야.’

화가 난 공작은 무섭다. 서류를 내던지지 않고 서류를 안겨 주는 식으로 화를 내서 더 무섭다. 그가 풀 수 없는 온갖 난제를 촉박한 시일과 함께 던져 준다. 가까스로 문서를 다 정리해서 가면 그는 한 장 한 장 어디에서 전제가 잘못되었고, 어디에서 계산에 실수가 있었으며, 어디에서 논리의 비약이 있었는지 짚어 준다. 누구라도 이 공격을 한 번 당하면 한 달 간은 재기불능에 가까운 상태가 된다.

“마님, 게다가 이 포는 방향도 바꿀 수 있습니다.”

루비카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연구소장은 비장의 무기를 쓰기로 했다. 그의 신호에 따라 전차 안의 조수가 장비를 조절했다. ‘위잉’ 곧 거대한 소리를 내며 포가 움직였다.

“바로 옆에 있는 사과를 맞추겠습니다.”

포가 자신을 가리키자 루비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연구소장은 확신했다. 에드가의 설계에 의해 완성된 포의 정확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루비카의 터럭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사과를 맞출 자신이 있었다.

루비카는 연구소장에게 ‘그만’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포의 입구가 자신을 향하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 시커먼 구멍. 저 구멍에서 나온 불길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던가. 그녀는 먼저 죽은 사람의 시체 아래에서 살아남은 적도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그만두세요!”

꼼짝 못하는 루비카를 대신에 앤이 외쳤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포를 마님께 향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실례입니까?”

“이건 정확하기 이를 데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님도 깜짝 놀랄 만큼…….”

학자들이란 보통 제 발명품을 지나치게 믿어 안전불감증에 걸리기 일쑤였다. 앤은 ‘퍽’하고 연구소장의 등짝을 때렸다. ‘팍’이 아니라 ‘퍽’이다. 연구소장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등을 만졌다.

“놀라신 거 안 보이세요? 이 일은 각하께 아뢰겠습니다.”

“네? 네.”

망했다. 사색이 된 연구소장을 뒤로하고 앤이 여전히 떨리는 루비카의 손을 잡았다.

“마님, 괜찮으세요?”

“으응.”

“바람이라도 쐬실 겸 정원을 산책하는 게 어떨까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카는 앤의 부축을 받아 서쪽 별채를 나왔다.

“안뜰에 마침 제라늄이 폈습니다. 정원사가 하는 말이 향기가 무척 좋다고 합니다.”

곧장 안뜰로 향했다. 루비카는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충격적인 기억을 떨쳐 내기 위해서 부단히도 애썼다.

‘……그래, 그는 그런 잔인한 무기를 만들어 낸 사람이지.’

새삼스레 현실이 다가왔다. 그동안 잊고 있었다. 공작가의 생활이 너무 안온했다. 좋은 옷에 좋은 집에 좋은 사람들…….

심지어 요즘은 에드가마저도 제법 괜찮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홀리는 자신이 싫을 정도로 미웠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렇게까지 미운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처음에는 허락 없이 키스하는 무례를 저지르고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는 잠자리를 거부하는 루비카의 조건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결혼하고 나서 말 바뀌는 타입일까 걱정하였으나 나중에는 루비카가 허락하지 않은 범위 내의 스킨십은 요구하는 것도 자제했다. 남자들 중에 이 정도까지 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입이 좀 험해서 그렇지 그는 사실 무척 매너 있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두, 모두 그가 만들어 낸 거야.’

하늘에서 떨어졌던 폭격, 한때는 마물을 물리치고 택지를 개발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저런 전차는 사람을 향해 포를 쏘아 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 받았던가.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그저 그걸 만들어 낸 사람이 미웠다. 하지만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자 이제는 다른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다.

미래를 알았다면, 그런 일이 펼쳐지리라는 걸 알았다면 에드가는 과연 그런 무기를 만들었을까. 어쩌면, 혹시 그녀가 과거로 돌아오게 된 건…….

눈앞의 제라늄을 보며 루비카가 한숨 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녀가 이상한 꿈이나 꾸었다고 치부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제라늄 향이 별로 신가요?”

앤이 건넨 말에 루비카가 화들짝 놀랐다.

“마음에 안 드시면 정원사에게 말해 다른 꽃을 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아니. 아니야.”

이런 깜빡했다. 그녀는 이제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공작 부인은 무척 할 만한 직종이었다.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무엇이든 즐길 수 있었다. 대신 이제 어디를 가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그 뜻을 헤아리려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만 한다.

“그럼, 음.”

루비카가 고개를 저은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앤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에 옆에 있는 하녀가 성급히 먼저 말을 꺼냈다.

“날씨가 추우신가요? 숄을 가지고 올까요?”

루비카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꽃을 보고 도리질을 했다는 이유로 정원사를 불러 정원을 갈아엎을 생각을 하는 이들이었다. 괜히 옷 탓을 했다 침방이 혹 안 좋은 말을 듣게 될까 염려스러웠다.

“그럼 대체 왜…….”

“잠시 생각을 좀 했어.”

“생각이요? 뭐가 마님을 불편하게 했나요?”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를, 모두 앞에 펼쳐질 불행을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루비카는 공작 부인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하녀들에게 국영은행에 저축하지 말고 자칼은행에 저축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적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비카는 대신 애매하게 웃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하녀에게 앤이 더 이상 캐묻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자신이 눈치없이 굴었다는 걸 눈치챈 하녀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순식간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루비카는 이런 순간에 약했다. 누군가가 하는 하소연을 끈기 있게 들어주는 건 자신 있다. 설사 잘난 척으로 점철된 이야기라도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칠 수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것만은 영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삶 내내 남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었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역할을 해야만 한다.

“참.”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서 손뼉을 쳤다. 무척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연극적인 동작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앤, 내게 시녀가 필요하다고 했었지?”

긴장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원래는 앤과 단 둘이 있을 때 차분히 말을 꺼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화제도 없었고, 지금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을 듯 했다.

“네, 마님. 그렇지 않아도 각하와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했었답니다.”

받기만 하고 전하지 않은 루비카 앞에 온 수많은 추천장과 편지에 대해서 말을 꺼내야 하나 앤이 망설였다.

“엘리제 로안 드 솔라나 양을 내 시녀로 삼으면 좋겠어.”

하지만 루비카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뜻밖의 말에 앤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것 참.”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꺼내는 말버릇이었다. 다른 일이었다면 앤은 최대한 루비카의 뜻을 존중해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시녀는 달랐다. 좋은 사람을 구하면 루비카의 손발이 될 테지만 잘못 들이면 루비카의 앞날을 망칠 수도 있는 존재였다.

짧은 찰나 앤의 머리에 수많은 계산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곧 에드가와 비슷한 결론을 내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지만, 솔라나 양만큼 적절한 선택은 없어.’

곧 앤이 루비카가 좋아하는 아주 귀엽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는 무채색인 회색머리도 무척 따스한 빛을 발했다.

“감사합니다.”

앤이 한 말에 루비카는 당황했다. 좋은 선택이라던가, 적임자라는 말 대신에

“솔라나 양의 사정을 고려해서 그리 결정하신거지요.”

“그런…….”

그게 아니다. 루비카는 그저 자신의 요정인 솔라나 양을 제 곁에 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옆에 두고 아직 미처 발하지 못한 그녀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일깨워 주고 싶었다. 그 방법을 찾다 도달한 결론이 ‘시녀’였다. 그 조차도 그녀의 아이디어가 아닌 에드가의 아이디어였다. 사실 솔라나 양의 미래나 앞날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나는 그저.”

해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닫았다. 앤뿐만 아니라 다른 하녀들도 감격에 겨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또 ‘자애로운’ 공작 부인이라는 마법에 단체로 걸려든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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