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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62화 (62/212)

# 6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62화

병에 걸렸거나 마법에 걸렸거나. 어쩌면 사라진 반지 대신 나타난 쪽지는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에드가?”

그러나 루비카의 목소리가 들리자 모든 상념이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날아갔다. 에드가와 눈이 마주친 루비카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눈을 감았다.

이 유혹에 어찌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을까?

고작 눈을 감은 거지만 에드가에게는 유혹이었다. 벗다시피 한 옷을 입은 여인보다 눈을 감은 루비카가 더 도발적이었다.

에드가는 성물을 운반하는 사제처럼 경건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숙여 루비카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러고 있고 싶었다. 에드가는 숨을 들이켜 루비카의 향을 맡았다. 침대 옆에는 수면을 도와주는 라벤더 향이 피워져 있었으나 그건 방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짙은 향이 가리고 있어도 에드가는 루비카만이 내뿜을 수 있는 고유한 향을 정확히 짚어 낼 수 있었다.

지나치게 오래 입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일까? 루비카가 몸을 뒤척였다. 에드가는 할 수 없이 입술을 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체를 올리지 않고, 얼굴을 찬찬히 내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을 맞닿을 정도의 위치였다. 루비카의 눈동자가 풍랑을 맞은 배처럼 흔들렸다.

“원래 굿나잇 키스는 입술에 하는 거야.”

힘껏 꾸민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이 이런 속삭임을 하는 입장이 될지 그는 꿈에도 몰랐다. 유혹을 받는 건 언제나 그 쪽이었다. 다른 여인들은 탐하고 싶어서 안달 난 입술이었다.

“안 돼.”

루비카가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녀 앞에 에드가는 항상 유혹하는 쪽이었고, 거부당하는 쪽이었다.

‘당신은 정말 잔인해. 왜 내게 조금이라도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는 거야.’

유혹을 거부하는 그가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다. 그러나 오늘 에드가는 그 말을 루비카를 향해 내뱉었다. 그녀가 들을 수 없게 마음속으로.

에드가의 마음은 요동쳤다. 이전에는 귀찮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여인들의 마음이 지금은 너무나도 잘 이해되었다. 루비카의 입장을 이해하라고,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성이 외쳤지만 마음은 원망스러웠다. 모두가 탐하는 그를 왜 그녀는 탐하지 않는 걸까?

-저는 아르망을 사랑해요.

아르망, 다 그 사내 때문이었다.

에드가는 당장이라도 루비카의 고개를 돌리고 거칠게 키스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루비카에게 떨어졌다.

“장난이야. 과민반응하지 마.”

그리고 비참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빈정거렸다. 하지만 도저히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린 루비카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몸을 휙 돌려 성큼성큼 침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잘 자.”

그리고 문을 닫아 어두운 복도를 걸어 집무실을 향해 갔다. 걸어가는 내내 생각했다. 루비카와 자신 사이를 가르는 어떤 벽에 대해.

“아르망.”

그 사내. 그 사내의 이름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루비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내.

“찾아낼 거야.”

찾아내서 어떻게? 어떻게 하지?

그 다음은 에드가도 몰랐다. 물론 흉폭하고 강렬한 충동이 일어나긴 했다. 바로 아르망이라는 사내를 찾아내 죽여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이었다.

하지만 에드가는 그런 결정까지는 내릴 수 없었다. 그의 양심이 말려서도 아니었고, 도덕 때문도 아니었다.

그리 하면,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루비카가 자신을 영영 봐 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웠다.

‘하지만 그 자가 있는 한 그녀는 내게 마음을 열지 않을 거야.’

난관이다. 그가 살면서 부딪히는 난관 중 이렇게 큰 것이 또 있을까. 에드가는 지독히도 초조했다. 인생에 해답이 없다는 말을 비웃었는데 그가 이런 상황에 처할 줄을 몰랐다. 그리 한참을 머리를 헝클 정도로 고민하다가 툭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내가 왜 이러지?”

그게 제일 이상한 문제였다. 루비카, 고작 그 여자의 마음이 뭐라고 얻지 못해 안달인 걸까. 벽이 느껴진다고 이리 초조한 걸까. 왜 그녀를 떠올리면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쿵쿵거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보인 차가운 태도를 떠올리면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메슥거리고 침울해지는 걸까. 모두 그녀, 그녀 때문이다.

“돌아 버리겠군.”

하루라도 빨리 주치의를 만나서 증상을 설명하고 약이라도 처방받아야 했다. 하지만 에드가는 그걸 차일피일 미루기는커녕 주치의를 부르라는 명령조차 칼에게 꺼내지 않았다. 그는 해가 떨어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서재에서 일어나 꿀을 찾는 벌처럼 루비카에게 달려갔다. 그가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었다.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그 귀한 시간을 주치의 따위와 만나는데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 * *

에드가가 떠난 후 루비카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머물렀던 이마를 살그머니 만져 봤다. 감기에라도 걸린 것처럼 뜨거웠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에드가의 눈빛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았다. 진짜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애가 타기라도 하는 것 같았던 눈빛, 그리고 꿀처럼 달콤했던 목소리. 그때 그녀의 심장은 꼭 아르망이 자신을 쳐다볼 때처럼 뛰었다.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뛴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정신 차려. 아니야.”

아무리 에드가가 잘생겨도 그렇지 아르망과 비슷하게 뛰다니.

정신 차려. 루비카.

네가 그를 사랑할 리가 없잖아. 너는 아무리 아름다운 걸 좋아해도 진짜 ‘사랑’하는 것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정신 차려.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것과 사랑하는 건 다른 거야.”

루비카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했다. 간신히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장난이야. 과민반응하지 마.

아마도 그것이 에드가의 본심일 것이다. 그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내가 자신에게 진심일 리 없다. 가끔 헷갈리게 구는 것은 그러니까, 그냥 루비카에게 부리는 심술일 것이다.

루비카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했다. 에드가는 어떤 사람인가. 그 정도의 미모면 신분이나 능력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을 사람이다. 여자는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건 남자들의 희망 사항이고, 잘생긴 남자가 매달리며 유혹하면 어느 여자인들 마음이 안 녹겠는가.

자칫 잘못해 인생이 구렁텅이에 처박힐 위험만 없다면……. 루비카는 머리를 붕붕 흔들며 막 떠오르려는 생각을 접었다.

어쨌든 그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넘쳐 날 것이다.

게다가 한창때인 스물다섯 살, 분명 그동안 사교계에서 자신에게 매달리는 여자들과 못해본 짓이 없을 것이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를 여자들이 가만둘 리 없고, 대부분의 남자들이란 아랫도리 잘못 놀려도 된다는 주변의 부추김에 자신이 져야 할 책임 따위 새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 에드가는 분명 여자와 진탕 놀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루비카는 그런 능수능란한 놈을 남편으로 맞이해 농락당했다. 경험 많은 선수가 하는 부리는 수작에 대해서 루비카는 문외한이었다. 아마 에드가는 자신이 하는 수작질에 어쩔 줄 모르는 그녀를 보는 재미를 즐기고 이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입가에는 가끔 악마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지지 않나.

그처럼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 남자가 굳이 별것 아닌 자신에게 저러는 이유는 딱 하나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니까 괜한 정복욕에 불탄 거야.’

그리고 저런 남자는 여인이 유혹에 굴복해 결국 마음을 열면 바람처럼 떠나간다. 루비카는 그런 사내에게 속은 여인을 알고 있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루비카가 아마 오십 줄에 들어섰을 때였다. 처음에는 어리바리했던 루비카도 그즈음에는 수도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어린아이는 물론 갓 청년이 된 소녀소년들이 루비카에게 많이 의지했었다.

-자매님, 흑.

열아홉 살 아직 아기 같았던 안나가 울음을 참으며 자신을 찾아왔었을 때 그녀의 배는 이미 손 쓸 수도 없이 불러 있었다. 안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열아홉이면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은 아무것도 모를 나이였다.

원래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던 그녀를 서른 살이나 처먹은 선원 조르바가 유혹했다. 조르바 씨도 에드가만큼은 아니었으나 야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남자였다. 그의 주변에는 그와 그냥 한번 놀아나 보려는 여자들이 꽤 있었다.

루비카는 뭐, 본인의 기호를 떠나 서로 합의하에 그런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그 쓰레기는 쉽게쉽게 이루어지는 관계에 질렸는지 순진한 안나에게로 눈을 돌렸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던 안나에게 조르바 씨가 온갖 말로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위해 집을 마련하겠다.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겠다 등등등. 다른 여자들이었으면 콧방귀도 안 뀔 말이었으나 안나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를 나이였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며 주변 여자들과의 관계도 모두 끊은 그의 행동에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아기를 가지자 조르바 씨는 바로 야반도주해 버렸다. 그녀를 사랑하긴 하지만 자신은 자유를 더 사랑해서 한군데에 얽히기 어렵다나 뭐라나.

결국 안나는 홀로 아기를 낳고 힘들게 키워야 했다. 루비카는 조르바 씨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뽀득 갈렸다. 이생에서 만약 그놈을 만나게 되면 안나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의 입안에 특정 부위의 기능을 상실하는 약이라도 부어 주고 싶었다.

‘속지 말자! 그는 그저 내가 넘어오지 않으니까 오기를 부리는 거야. 저렇게 쉽게쉽게 키스하는 입 가벼운 놈이랑은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야.’

루비카는 다짐에 다짐을 하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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