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61화
에드가의 부연 설명에 루비카의 얼굴은 밝아지기는커녕 더 어두워졌다. 루비카의 표정을 따라 에드가의 기분도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자신이 한 말을 돌이켜보았지만 어디가 루비카의 기분을 나쁘게 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
“셰니에 부인이 엉망으로 가르친 덕에 솔라나 양도 그렇게 예법에 밝지 못해. 하지만 수학이랑 고대어는 정말 잘해! 피아노도 무척 잘 쳤고…….”
루비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다른 건…… 몰라도 시녀가 되고자 하는 소녀는 예법에 정통할 필요성이 있었다. 에드가는 곧 루비카가 앤이 솔라나 양을 거절하는 게 아닐지 걱정하는 것을 눈치챘다. 솔라나 양을 시녀로 삼는 것을 누구보다 반길 사람이 바로 앤이었다. 그러나 에드가는 그 사실을 루비카에게 말하지 않았다.
“앤에게 내가 잘 말해 두지.”
순식간에 루비카의 얼굴이 환해졌다. 에드가는 막혔던 가슴 속이 뻥 뚫린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당장에라도 루비카의 볼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대신 테이블 위의 치즈를 그녀의 입에 내밀었다. 앤에게 잘 말해 주겠다는 말 때문에 에드가에 대한 경계심이 낮아진 루비카가 치즈를 받아먹었다. 오물오물 그가 준 음식을 받아먹는 입술을 보니 가슴 한쪽이 간지러웠다. 루비카의 행동 하나하나에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기분이 퍽 거슬리고 이상했으나 기분 좋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요즘 들어 그는 부쩍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자신을 느꼈다.
“대신 산책 시간을 좀 더 늘려.”
“이미 충분하지 않아?”
“30분 정도밖에 안 하잖아. 1시간은 했으면 좋겠어.”
에드가는 집무실에서 일하다 말고 종종 루비카가 생각났다. 전날 저녁 그녀가 한 말이 떠올라 피식피식 웃을 때도 있었고, 지금 뭐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가끔 그녀가 혹 넘어지지나 않았는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그때마다 칼을 불러 루비카의 안전을 확인했으나 도저히 칼이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칼은 언제나 내가 우선이야. 루비카의 안전 따위 관심 밖이지.’
칼의 충심은 어딘가 기묘한 데가 있었다. 그는 루비카가 숨이 넘어가 곧 죽을 지경이라도 그 사실을 알려 봤자 에드가에게 득 될 것이 없다 여기면 말하지 않을 자였다. 에드가는 칼의 괜찮다는 보고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칼을 보내 수시로 루비카에게 산책을 권유했다. 루비카는 종종 에드가의 말에 화를 내고 반항했지만 그건 모두 옳지 않다고 판단되는 상황에만 그랬다. 그녀는 납득되는 청에 한해서는 대체로 따르는 편이었다. 루비카는 귀찮기는 했으나 칼이 권유할 때마다 꼬박꼬박 산책했다. 심지어 내일 모레쯤이면 도착할 카나에게 부탁했던 드레스 중 세 벌이 산책용이었다. 건강을 챙기라는 권유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다. 공작가의 정원은 산책이 기꺼울 정도로 넓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딱 하나 불만이 있었다.
에드가의 푸른 눈은 노란 촛불 때문에 지금은 녹색으로 보였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은 가끔 사람보다는 조각가가 그의 삶을 다 바쳐 만든 대리석상 같기도 하였다.
“정말 내 건강을 챙기는 거라면, 그보다 더 급한 게 있어. 에드가 당신 말이야.”
루비카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아 에드가는 반문하는 표정을 지었다. 살짝 올라간 눈썹과 찌푸린 미간이 묘하게 악동적인 데가 있었다. 루비카는 문득 그와 지나치게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옷이 가로막고 있으나 허벅지가 그의 다리에 바로 맞닿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소파에서 일어나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슬금슬금 몸을 뒤로 빼는데 맞닿은 면적이 적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졌다. 아무래도 몸을 빼는 만큼 에드가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지? 내가 뭘.”
“으응.”
어쩌나 당황하는 걸 들킨 걸까? 시선을 피하려는 순간 에드가가 그녀의 고개를 휙 잡아 자신을 바로 보게 했다. 시선을 피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에드가가 루비카의 바로 지척에까지 그의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아, 차라리 잘생기지나 말지.’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남편으로 둬야 하는 건 고문이다. 루비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정말 여자를 어떻게 유혹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말해. 눈 피하지 말고.”
이 남자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가슴이 떨리다 못해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 수준이었다. 루비카는 간신히 에드가에게 대꾸했다.
“내 건강보다 에드가 당신 건강 말이야.”
“무슨?”
“산책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집무실에 콕 처박혀 나오지 않는 당신이야. 나는 그래도 면담실에서 친척들을 만나기도 하고, 앤이랑 같이 다음달에 준비해야 할 물건에 대해서 의논하기도 하는데 당신은 아무도 만나지 않고 낮 동안 내내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있잖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초롱초롱 빛나던 에드가의 눈이 혼탁하게 가라앉았다. 절벽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루비카에게 밀착되었던 몸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 에드가가 어두운 눈으로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맑았던 푸른 눈이 심해와 같은 빛이 되었다.
“필요 없어.”
다정했던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루비카는 자신이 한 말 어디에 그가 화를 내는 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몸을 밀착한 에드가가 부담스럽고 떨어졌으면 했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에드가가 달아날 듯 몸을 멀리하자 허전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렇지 않아. 밝은 햇살 아래에서 산책 하는 건 건강에 좋은 일이라고 의학서에도 나와 있어.”
“햇살이라면 집무실 창으로도 잘 들어와.”
“하지만 공기 같은 건…….”
“창문도 수시로 열어 둬서 환기시키니 괜찮아.”
빈틈없이 딱 잘라 들어오는 대답에 루비카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루비카는 에드가에게 함께 산책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루비카는 클레이모어 저택에 와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풍요 속에 살고 있었다. 무언가가 먹고 싶다고 한마디만 하면 냉큼 눈앞에 대령되었고, 입고 싶은 것, 신고 싶은 것 모두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앤을 비롯한 저택의 사용인들은 루비카에게 친절하였지만 명확한 선이 있었다.
주인과 사용인.
넘기 힘든 선이었다. 예전 베르너 저택에서 하녀 같은 취급을 받았을 때 루비카는 항상 삼촌 내외와 안젤라의 눈치를 보며 대화를 해야 했다. 무슨 말을 하든 그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진심이 통하는 친구 같은 건 서로 동등한 관계에 있을 때나 가능했다.
루비카는 공작 부인이 된 뒤에야 안젤라가 가끔 자신에게 짜증스럽게 반응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애는 루비카가 자신을 동등하게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래서 눈치를 보며 기분을 맞춰 주면 화를 냈고, 안젤라의 잘못에 대해 지적할 때는 툴툴거리면서도 결국 루비카의 말에 따랐다.
산책을 가면 루비카는 그 선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날씨가 흐려도 루비카가 ‘날씨가 참 좋네.’라고 말하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날이 햇살이 따사롭지 않아 산책하기에 딱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건 비가 올 때도 햇볕이 따사로울 때도 적용되었다.
루비카가 산책을 하다 말고 발걸음을 멈추면 무엇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아님 무엇이 발걸음을 멈출 정도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눈치를 보기 일쑤였다.
산책을 하는 동안 앤을 비롯한 여러 하녀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건만 루비카는 마치 홀로 산책을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일주일을 꾸준히 산책했지만 아직 정원은 절반도 둘러보지 못했다. 눈앞에 밟히는 풍경들은 새로운 데 따분하고 지겨웠다. 오죽하면 요즘은 에드가와 함께 하는 만찬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당신, 사실 날 지켜보고 있었잖아.’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휙 돌리면 집무실에 난 창의 커튼 자락이 펄럭였다.
‘또 몰래 지켜보고 있나 보네.’
에드가의 머리 한 올 보지 못했으나 루비카는 그리 짐작했다. 그럼 따분했던 산책이 조금 재미있어졌다. 루비카는 일부러 집무실 창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쪽으로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럼 어김없이 집사 칼이 찾아와 오늘 산책은 어떠했냐고 물어보며 넌지시 방향을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몰래 지켜볼 거면 그냥 같이 하지.’
하지만 루비카는 에드가에게 함께 산책하자는 말을 먼저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을 꺼내면 당장 저 인큐버스 같은 남자는 ‘역시 당신도 내 매력에 빠졌군.’ 같은 미소나 지을 것이다. 에드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루비카는 충동적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에 누웠다.
“잘래. 그만 가.”
뎅, 뎅, 뎅. 마침 새벽 한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에드가는 괘종시계를 한번 보더니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거꾸로 누워 있는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자면 몸에 안 좋아.”
루비카가 몸을 또륵 굴려 바로 누웠다. 맞는 말을 하면 어기는 법이 없다. 하지만 정말 그가 한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입을 불룩 내밀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모습이 짜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당신 건강 말이야.
기뻤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것이.
산책을 나갈 때마다 루비카는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휙 고개를 돌려 집무실 쪽을 바라봤다. 에드가는 그때마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들킬까 황급히 암막 커튼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때 그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최고조에 달했다.
한참 루비카의 뒷모습을 훔쳐보며 그녀가 자신의 저택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단 사실을 즐기고 있던 중이었는데 왜 갑자기 뒤돌아보는 건지 처음에는 짜증이 났다.
‘혹, 그녀도 내가 잘 있는 건지 궁금한 건가?’
그러나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가능성이 떠오르자 루비카가 뒤돌아보는 게 짜증나지 않았다. 심지어 언제쯤 뒤돌아볼지 수를 세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루비카의 옆에서 걷고 싶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볼 때마다 무얼 바라보는 지 묻고 싶었고,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오늘 날씨는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코끝에 스치는 공기는 상쾌한지, 구두는 산책을 하기에 적당했는지 묻고 싶고 나누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루비카가 그에게 함께 산책을 권유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럼 그는 단칼에 거절해야 해야만 했다. 그럼 루비카는 그가 자신과 산책하기 싫어한다고 여기겠지.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와중에 함께 산책하자고 권하지 않은 게 씁쓸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녀를 보고 있으면 기쁜 동시에 슬펐고, 섭섭하며 즐거웠다. 어째서 반대의 감정이 함께 오는지 신비했다.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루비카도, 자신도.
“그만 가 봐.”
“잠든 걸 보고 가도 될까?”
자신이 생각해도 구차한 목소리가 나왔다. 자존심은 에드가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가 비참한 삶에서 목숨을 내려놓지 않은 건 자존심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루비카 앞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자존심이 버려졌다.
그리고 한순간에 자존심을 버리게 만든 루비카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어깨를 잡고 자신이 아무 여자에게나 이러는 줄 아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그럼 머리카락이라도 쓰다듬게 해 달라고 구걸하고 싶었다.
‘미쳤군. 미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