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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60화 (60/212)

# 6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60화

어떻게 딱 꼬집어 엘리제를 호명한 걸까. 이름과 성을 완벽히 외운 걸 보았을 때 이야기를 성실히 들은 것 같았다. 루비카는 무의식중에 요정에 대한 관심이 이야기 속에 흘러 들어간 게 아닌가 싶어 황급히 수습했다.

“응, 솔라나 양이 제일 걱정스러워. 그중에서도 제일 자신감이 없어 보였어. 셰니에 부인이 얼마나 구박했던지 자세도 구부정하더라. 그걸 교정하려면 누가 옆에 붙어서 꾸준히 교정해 줘야 할 텐데……. 아, 조금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줘도 눈 깜짝할 사이에 예뻐질 아이가 그러고 있다니.”

“솔라나 양을 지나치게 걱정하는군.”

“그, 공작가의 식구잖아. 나는 공작 부인으로서 해야 할 걱정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루비카의 말이 맞다. 그녀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에드가는 어쩐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솔라나 양을 향한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자신에게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루비카는 비록 그를 보고 종종 얼굴을 붉히기는 했으나 그건 그가 앞에 있을 때 만이었다. 그녀는 그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당연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잖아.’

아르망, 요즘은 그 사내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위가 아팠다.

“솔라나 양을 곁에 두고 챙겨 주고 싶은 건가?”

루비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별채에서 기거하고 있는 아이들이라, 내가 너무 자주 별채에 가는 것도 어쩐지 주변에 민폐인 것 같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

루비카가 불현듯 에드가와 눈을 마주쳤다. 에드가는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불쾌했다. 얼마 전부터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던 스티븐에 이어 이번엔 여자다. 스티븐의 케이크를 먹을 때 루비카가 짓는 미소만 아니었어도 그는 진작에 그를 쫓아냈을 것이다. 에드가는 이 이상한 감정이 대체 어디까지 가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루비카의 관심을 사는 존재를 쫓아낼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존재를 곁에 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까지 했다.

“간단하다니, 어떻게?”

“궁금해?”

“응.”

루비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에드가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살쾡이처럼 변한 눈에 루비카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알고 싶으면…….”

키스라는 말을 꺼내려던 에드가는 루비카의 긴장된 얼굴에 너털웃음을 흘렸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거절당하면 그의 자존심이 회복하지 못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에드가는 재빨리 루비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로 요구를 낮추었다.

“포옹.”

평소에도 해도 괜찮다고 합의한 선이었다. 에드가는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그럼에도 루비카는 선뜻 그러라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눈치였다.

“포옹이라니…….”

“왜, 싫어? 그럼 난 입 다물지. 충고를 하나하자면 공작 부인인 당신이 그녀를 아끼는 티를 너무 내면 앞으로 솔라나 양의 생활은 고달파질 거야. 질투하는 이는 물론, 당신에게 자신의 요구를 대신 전하라고 괴롭히는 사람이 생기는 건 당연지사지.”

에드가는 선뜻 원을 들어주지 않는 루비카가 원망스러워 솔라나 양의 미래를 최대한 비참하게 꾸며 읊어 주었다. 더 듣기 고통스러웠는지 루비카가 귀를 막고 “그만!”이라고 외쳤다.

에드가는 루비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고무공 같다고 느꼈다. 통통 튀어 대체 어느 방향으로 튈 줄 모르는 공. 그러나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루비카가 어디로 튈지 눈에 훤히 보이기도 했다. 적어도 루비카의 도덕성만큼은 눈에 훤히 비칠 정도로 맑았다.

“아, 정말. 도리가 없네.”

이제 슬슬 일어나 그녀를 품에 끌어안으면 되겠군.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며 에드가가 꼰 다리를 풀 때였다.

루비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에드가 앞에 왔다. 루비카가 걸을 때마다 은은한 촛불을 받은 면 잠옷이 팔랑거리며 그녀의 실루엣을 드러내었다.

에드가는 갑작스러운 루비카의 행동에 당황해 굳은 듯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루비카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팔을 뻗어 에드가의 목을 끌어안았다. 루비카의 부드러운 살결이 에드가에게 닿았다. 깨끗이 씻은 면 잠옷 너머 비누 향과 향수냄새에 섞여 루비카만이 가지고 있는 향이 났다.

‘……먼저 끌어안을 줄이야.’

고무공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예상가능하다는 말은 취소다. 정말 루비카의 행동 하나하나가 언제나 에드가의 예측 범위를 넘어섰다.

“됐지?”

고작해서 쿠키 하나 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루비카가 에드가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에드가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멀어지려는 루비카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루비카는 갑작스러운 에드가의 행동에 당황했다. 그의 팔은 강인했지만 그녀를 끌어안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달아나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달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다리는 못이라도 박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거세게 뛰기 시작한 심장소리를 다스리기 위해 루비카는 무던히도 애를 썼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르망이야.’

에드가와는 일이 꼬여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것뿐이다. 그런데 왜 심장이 이리 거세게 뛰는 걸까.

‘그냥 잘생겨서 그런 거야. 나는 워낙에 예쁜 사람을 좋아하잖아.’

에드가도 루비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다. 여자에 궁할 리 없는 이 멋진 남자가 굳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을 좋아할 리 없다. 모든 것은 장난의 연장선상일 뿐이다. 루비카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방금까지 강인하게 루비카를 안고 있었던 손이 너무나도 쉽게 풀어졌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보상으로 치기에는 너무 짧은데.”

억양 없는 목소리였다. 아직까지도 에드가에게 닿았던 몸에서 열기가 남아 있었다. 루비카는 목소리의 떨림을 간신히 감추고 대꾸했다.

“시간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잖아.”

일렁이는 촛불 너머 보이는 루비카의 모습에 에드가는 신음을 삼켰다. 그녀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이때만큼은 침실에 마석램프가 아닌 촛불을 둔 게 후회스러웠다. 환한 램프보다 촛불을 침실에 두는 게 분위기에 좋을 거란 조언을 괜히 받아들였다. 분위기니 뭐니 따지기 전에 루비카의 뺨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의 볼이 발그레하기라도 한다면 에드가는 아마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쁨을 느끼리라.

‘정신 차려.’

손을 뻗어 루비카를 제 품에 다시 끌어안고 싶었다. 그녀의 숨소리와 심장소리를 들으며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었다. 그리고 마치 원래부터 자신의 것인 양 그리운 그녀의 입술을 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그저 에드가의 충동일 뿐이다. 루비카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를 원하지 않는다. 시시때때로 그를 멍하니 관찰하고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허락 없이 손을 잡으면 불쾌해했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길 소위 터프하다고 말하는 행동을 하면 불같이 화를 내기 일쑤였다.

그녀가 거부감 없이 그의 접촉을 받아들일 때는 지금처럼 ‘거래’를 했을 때뿐이었다. 그도 지나치게 큰 요구를 할 수도 없었다. 키스 같은 걸 입에 올리면 세상에 이런 더러운 벌레는 처음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생 살면서 그를 보며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은 남녀를 통틀어 루비카가 처음이었다.

거센 충동과 싸우며 에드가는 소파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그리고 최대한 오만한 표정을 유지하며 턱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다행히 전략이 통했다. 루비카는 불만 많은 표정으로 입술을 꾹 누르면서도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잠옷자락이 옆구리를 슬쩍 스쳐 지날 때마다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에드가는 간신히 참았다.

“그럼 간단하다고 말한 해결책을 알려 줘. 만약 별 신통찮은 방법이면 방금 포옹의 몇 배는 받아낼 거야.”

당신이 한 포옹의 몇 배를 받아낸다니 그럼 잘못된 대답을 하면 내가 그대에게 포옹해도 된다는 말인가?

에드가는 목 끝까지 올라온 대답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에게는 유쾌한 농담이었으나 루비카가 들으면 화를 내고도 남을 말이었다.

“솔라나 양을 당신 시녀로 임명하면 돼.”

루비카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두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루비카는 곧 에드가의 말뜻을 이해했다. 생각지도 못한 방책이었다. 곧이어 그녀의 입가에 봄 햇살 같은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 미소. 에드가는 자신의 황량한 마음에 따스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루비카의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그게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라도 그 끝에는 그보다 더 달콤한 기쁨이 주어져 있으리라.

에드가는 초의 은은한 노란 불빛을 받아 기쁨으로 반짝이는 적갈색 눈동자를 보고 이번에는 단언했다. 그녀의 눈은 정말 보석 같았다. 아니, 보석 그 자체다.

“세상에. 왜 난 그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지.”

“시녀 하나 정도는 더 두는 게 좋을 듯하군. 그동안 앤이 혼자 보필하느라 고생했지.”

루비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앞으로 시녀의 봉급을 받을 수 있으니 솔라나 양의 가계에도 도움이 될 것 같네. 아, 만약……, 그녀가 하기 싫어하면 어쩌지?”

문득 루비카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든든한 뒷배를 가지지 못한 공작 부인이다. 피로연장에서 적의를 드러냈던 아직 이름 모를 친척 몇 명이 걸렸다. 셰니에가 부린 술수도 그렇고 공작가의 친척 틈에 있던 엘리제는 어쩌면 말은 하지 않을 뿐 루비카를 좋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식구인 자신을 시녀로 고용했다고 기분 나빠 할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루비카, 당신은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야. 당신의 시녀를 하기 싫어한다니 그게 말이 될 소리인가.”

“하지만…….”

“오늘만 해도 게오르 백작부인이 자신의 네 번째 딸을 당신의 시녀로 삼는 게 어떠냐는 편지가 왔어. 아직 다들 눈치를 보느라 그렇지 당신의 시녀 자리를 노리고 있을 걸?”

“하지만 나는 그런 편지를 받지 못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앤은 에드가와 상의한 후 그 편지를 루비카에게 바로 건네지 않고 따로 보관 중이었다. 에드가는 게오르 백작가가 결코 좋은 의도로 편지를 보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시녀를 통해 그녀를 자신들의 손바닥위에 쥐락펴락하고자하는 계략일 것이다. 그가 아는 루비카는 괴롭힘이나 그런 술수에 신경 쓰지 않을 사람이었으나, 귀족이 벌이는 공작질이나 정치는 때때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더러웠다. 괜히 다른 쟁쟁한 가문의 여인을 시녀로 데려왔다 집안 내의 일이 바깥으로 새어나가 루비카가 가슴앓이를 하는 게 아닐지 걱정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솔라나 양은 제법 괜찮은 선택지였다. 비록 멀기는 하나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친척이었고, 그녀에게 염탐이나 에드가나 루비카의 비밀을 알아오라고 시킬만한 주변 인물도 없었다. 다른 후작가나 백작가에서 시녀를 데리고 오는 것보다 그쪽이 더 안심이었다.

“아마 앤이 느끼기에 그녀가 당신의 시녀로 부족해서 편지를 빼놓았나 보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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