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59화
셰니에는 자신이 상황을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비카를 처음 보았을 때 셰니에는 내심 깔봤다. 고작 준남작가 출신에 그럭저럭 봐 줄만한 미모를 가진 그녀가 공작 부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공작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처럼 아끼는 부인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 믿을 건 남편의 사랑밖에 없는 여자일수록 남편의 사랑이 자신에게서 떠날까 전전긍긍하기 마련이었다. 지참금이나 신분에 있어 남편에게 빠지는 것 없는 여인들은 셰니에의 말을 웃어넘기거나 슬쩍 무시하였다. 셰니에는 그렇기에 루비카를 능력이나 실력을 아주 조금만 겁주면 그녀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런 예법으로는 사교계에 가서 무시당하기 쉽다거나 귀족적이지 않다는 말만 슬쩍 흘리면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며 셰니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신분이 낮은 여인들은 사랑으로 신분 상승한 여인을 부러워하고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꿈을 꾸었으나 현실의 벽은 두텁기 마련이었다. 사교계에서 비웃음을 사거나 집안을 장악하지 못하는 원인을 그녀들은 자신에게서 찾았다. 자신을 좀 더 가꾸고, 예법에 맞게 행동하면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질 거라 여겼다.
사실 상류사회가 그들을 따돌리고 괴롭히는 건 결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녀들이 차지하는 자리가 원래는 자신의 딸이나 누이가 차지해야 할 자리로 여기고 시기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예의발라도, 아무리 착해도 틈을 찾아내어 물어뜯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셰니에는 자신이 한 행동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타인의 악의에서 원인을 찾는 것보다 자신에게서 찾는 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루비카는 셰니에가 여태까지 만나 왔던 어떤 여인과도 달랐다. 그녀는 한미한 가문 출신에 신분 상승을 이룬 여인들이 가지는 콤플렉스가 없었다.
그날 저녁, 셰니에는 결국 루비카의 앞에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루비카의 방침에 따라 아이들을 가르치겠으니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다시 고용해 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루비카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 * *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에드가는 조금 뚱한 표정으로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루비카를 보았다. 만찬 때부터 루비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제 매일매일을 기념일로 챙기는 데 재미 들린 스티븐은 결혼식 이후 맞이하는 열한 번째 날은 신이 열하루 동안 세상을 창조한 것처럼 기념해야 한다면 엄청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왔다. 루비카의 얼굴을 펴지지 않았었다. 그녀가 두 번이나 ‘한 번 더 먹을게.’를 말하는 바람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으나 에드가는 알았다. 루비카는 아까부터 지금까지 쭉 기분이 나빴다.
‘날 보고 있지 않아.’
샤워를 마치고 잠옷을 입고 침실에 들어설 때가 되면 루비카는 항상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 시선을 피하는 척하며 그를 훔쳐보았다. 에드가는 아닌 척하면서도 루비카가 자신을 몰래몰래 보는 그 순간이 좋았다. 특히 목덜미에 맺힌 물망울이 흐르는 걸 볼 때 루비카의 볼이 그 어느 때보다 발그레해진다는 걸 깨달은 그는 일부러 물기를 채 닦지 않고 나왔다.
그런데 자신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에드가는 그 이유를 루비카에게서 찾았다. 발그레해진 뺨으로 부끄러워하는 그녀에게 사실 그가 일부러 그랬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땐 발그레해진 뺨이 터질 듯이 붉어져 그동안 그럼 자신을 놀린 거냐고 화를 내겠지.
그 장면을 상상하니 벌써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졌다. 그때가 되면 에드가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 줄 심산이었다.
자신이 일부러 그런다는 사실을 모른 채 순진하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란……. 두고두고 기억하고 놀려 주고 싶은 장면이었다.
‘그래, 이건 모두 그녀를 놀리기 위한 일의 일환이야.’
그렇게 에드가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를 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비카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딘가 정신이 먼 곳에 가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또 뭘 잘못했나?’
맹세코 걸리는 일이 없다. 일주일의 시간이 흐른 뒤 에드가는 루비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어렴풋이나마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가끔 헛다리 집는 일이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 에드가는 루비카의 기분이 상할 일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루비카를 흉보러 온 셰니에 부인을 단번에 쫓아내기까지 했다.
“루비카.”
“응.”
넌지시 부르자 루비카가 대답했다. 부름을 무시하지 않는 모양을 보아 기분이 나쁜 원인이 그는 아닌 것 같았다. 다행스러운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 적어도 루비카는 그의 얼굴을 좋아했다. 그에게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순간에도 루비카는 에드가가 맑은 눈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면 시선을 피하고 마지못해 용서해 줄 때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그의 미모마저 통하지 않고 있다.
“무슨 일 있어?”
“응?”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상념에 잠겨 있던 루비카가 깜짝 놀라 에드가를 바라봤다. 언제나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제스쳐를 취했던 에드가가 무슨 일인지 오늘은 걱정에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지 몰랐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반대쪽 의자를 끌어당기며 에드가가 루비카의 곁에 앉았다. 눈치 좋은 하녀들이 침실에 적당히 향을 피운 뒤 빠져나갔다. 그 틈을 타 에드가는 루비카의 손을 잡았다. 언제 만져도 따뜻한 손이었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손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렀다. 이상하게 루비카 앞에 서면 난생처음 느껴 보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 감정은 다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내내 딴 생각을 하고 있었잖아.”
“딴 생각이라니…….”
에드가의 투명한 푸른 눈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자 루비카는 결국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그의 두 눈을 보고 있노라면 거짓말을 하기 힘들었다. 실제 에드가의 속이 시커멓고 제멋대로인 것과 달리 그의 두 눈은 마치 이 세상의 가장 맑은 것만 모아 놓은 것처럼 투명했다.
“봐, 루비카.”
에드가가 시선을 피하는 루비카의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자신을 다시금 바라보게 했다.
‘보석 같은 눈이야.’
전에는 평범한 색이라고 느꼈던 루비카의 적갈색 눈동자가 요즘 에드가에게는 그렇게 오묘해 보일 수가 없었다. 눈동자에 살짝 어린 붉은 기운이 그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
“셰니에 부인이 낼 소문이 걱정되어서 그래? 걱정하지 마. 그 여자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해도 공작 부인인 당신을 깎아내리지는 못할 거야. 나도 좌시하지 않을 거고.”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면 뭐지?”
루비카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안고 있는 걱정을 과연 에드가가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재수 없고 오만한 남자였다. 루비카는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보였던 태도를 잊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은 지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보다 똑똑하지.’
자꾸 눈을 현혹시키는 외모 때문에 까먹기 일쑤였지만 에드가는 시대의 총아라 불릴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높은 자존심 덕에 오히려 상대의 약점이나 고민을 안다고 해서 물고 늘어질 요소가 없었다. 루비카는 결국 에드가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조금 고민이 있어.”
“고민?”
“오늘 별채에서 셰니에 부인에게 혼나고 있었던 아이들 이야기인데……. 다들 사정이 딱했어.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고민이라는 게 그런 거였군. 에드가는 치밀어 오르는 입꼬리를 숨기느라 애썼다. 그녀의 기분이 자기 때문에 상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고, 별채에 살고 있는 아이들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그녀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콱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
“자세한 사정을 말해 주겠나?”
다행히 에드가는 루비카의 고민을 쓸데없는 것이라고 칭하지 않고 들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스테판이 내가 도둑질을 하고 도망친다고 고했는데도 이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서 이유를 물었지.’
어쩌면 에드가는 착한 사람이 아닐까? 루비카는 에드가를 새삼 다시 보았다.
‘아, 역시 잘생겼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평가를 다시 할 여유 따위는 새카맣게 잊고, 빛을 머금고 있는 듯한 검은 머릿결과 대리석 같은 피부에 홀리기 일쑤였다. 코에서 입술, 턱까지 내려오는 선이 너무 아름답게 딱 떨어져서 가끔은 손으로 더듬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났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그냥 얼굴에 좀 홀렸을 뿐이야. 예쁜 건 1년만 있으면 금방 익숙해진다잖아.’
하지만 과연 익숙해지는 날이 올까? 루비카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쿵쿵 뛰는 심장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말을 이었다. 세세히 사정을 이야기를 하던 루비카는 엘리제의 항목에 이르러서는 쉽게 흥분했다.
‘조금만 더 꾸미면 예뻐질 텐데!’
에드가는 물끄러미 자신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참새처럼 조잘대는 게 귀여웠다. 그렇게 열변을 토하면서까지 설명하는 아이들이 누구일까 궁금하면서 부러웠다.
‘부럽다고?’
에드가는 평생 누군가를 부러워한 적이 없었다. 가지지 못한 적도, 해 보지 못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엘리제가 부러웠다.
만약 루비카가 엘리제에게 하듯이 그에 대해 이야기 하며 저렇게 열변을 토한다면…….
심장이 몸 밖에서 나갈 기세로 뛰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라 상상을 더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일시적인 현상이라더니 점점 더 심해지고 있잖아!’
에드가는 샴페인과 감기약을 함께 복용했을 때 손에서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지나치게 뛰는 부작용에 대한 연구를 아카데미의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의학박사에게 의뢰했다. 의학박사는 당장에 답장을 보냈다.
[각하, 술과 감기약은 함께 복용했을 시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일시적인 현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 증상은 일시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심해졌다. 가끔 숨도 못 쉬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나아졌다. 견딜 수 없이 크게 뛰던 심장이 어느 날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뿐이면 좋았을 텐데 요즘 들어 자꾸 이상한 충동이 일어났다.
자꾸 루비카의 입술만 보면 결혼식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녀에게 키스했던 그 때.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럼 그는 불쑥 그녀를 껴안고 입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것이다. 대체 왜 이러는지 그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정신병인가, 조만간 의사를 불러 진단을 받아야겠군.’
“듣고 있는 거야?”
에드가의 눈빛이 자꾸 자신의 입술에만 머무르는 걸 느낀 루비카가 그의 주의를 끌 겸 손가락을 톡톡 쳤다. 에드가는 그녀의 그런 귀여운 행동에 더 참지 못하고 손을 꼭 잡았다. 당장에라도 자기 쪽으로 당겨 품에 안고 입술을 탐하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지.
에드가의 눈은 마치 고요한 바다 같았다. 그 아래에서 들끓는 혼탁한 욕망을 루비카는 짐작도 못했다. 그녀는 다만 이야기 도중에 혼이라도 빠진 것처럼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에드가의 태도에 이상을 느꼈을 뿐이다.
“듣고 있었어. 특히 그 엘리제 로안 드 솔라나라는 소녀에 대해서는 당신이 지금 당장 내게 시험을 치러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외우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