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58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그때에 루비카가 나타났다. 하늘 같은 공작 부인. 엘리제는 그녀가 나타났을 때 자신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아닐지 심히 두려웠다. 공작가에 온 뒤로 그 흔한 칭찬 한 번 못 들어 본 엘리제였다.
하지만 루비카는 엘리제에게 화내지 않았다. 대신 그동안 엘리제를 무참히 깔아뭉갠 셰니에 부인에게 화를 내었다. 심지어 그녀를 쫓아내었다.
엘리제는 무섭기 짝이 없는 사람이 공작 부인으로 왔다고 여겼다.
그런데 서늘한 태도로 셰니에 부인을 쫓아낸 공작 부인이 그녀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닌가.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동안 다들 힘들었겠구나. 그래, 어쩌다 공작가에 오게 되었니?”
따뜻한 말 한마디에 엘리제는 그만 루비카에게 자신의 모든 사정을 소상히 말하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 주었다.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은 엘리제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도 제각각 공작가의 피후견인이 된 경위를 이야기했다. 그중에는 부모와 형제자매를 모두 잃은 아이도 있었고, 모두 살아 있음에도 빚더미에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고 공작가에 몸을 의탁해야만 하는 아이들의 가정환경이란 불우한 게 당연했다. 사실 이 아이들은 어찌 보면 그래도 잘 풀린 축에 속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치명적인 스캔들이 없는 한 어려움에 처한 친척을 방계와 직계에 상관없이 받아 줬으니. 루비카의 어머니의 집안인 백작가는 루비카가 그녀를 찾아갔을 때 내쳤다.
‘집안에서 반대한 결혼을 한 딸의 자식은 받아 줄 수 없다고 했었지.’
그건 아마 표면적인 핑계였고, 속사정은 당시 루비카가 지고 있었던 빚이 부담스러웠으리라. 그때 백작가가 루비카를 단칼에 거절하지 않고 빚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봤다면 삼촌에게 속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 지난 일이야. 원망해 봤자 쓸데없는 일이지. 백작가는 클레이모어 공작가처럼 부자가 아니었으니.’
동병상련을 느끼며 루비카는 밝게 질문했다.
“여태 무엇 무엇을 배웠니? 선생님들이 잘 가르쳐 주었니?”
다행히 모든 가정교사가 셰니에 같지는 않았다. 작문실력이나, 자수, 수학 실력은 어디에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다만 여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예법만이 엉망이었다. 아이들과의 면담이 끝난 후 루비카는 일부러 작문 선생과 수학 선생, 그리고 자수 선생을 불렀다.
“공작가의 피후견인들을 잘 가르쳐 주어서 고맙네.”
그리고 앤을 시켜 세 선생의 다음 월급에 감사비가 포함되도록 조치했다. 곧 이 일은 공작가의 별채에 파다하게 퍼졌다.
* * *
루비카가 아이들의 사정을 들어 주고 있을 무렵, 해고를 통보받은 셰니에 부인은 집사 칼을 찾아갔다.
“각하를 뵈러 왔습니다.”
칼은 목을 꼿꼿이 하고 자신을 찾아온 셰니에 부인의 모습에 당황했다. 아직 해는 서산에 기울지도 않았다.
“부인, 각하께서는 바쁘십니다.”
“그럼 이 앞에서 계속 기다리지요.”
“용무가 있으시다면 만찬 이후에 와 주십시오.”
셰니에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제가 참으려 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 없군요.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예법 선생으로서 공작 부인의 무례에 대해서 고하러 왔다고 전해 주십시오. 공작가의 체면이 달린 일입니다. 이 앞에서 계속 기다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셰니에 부인이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나이든 부인이 집무실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도 보기 좋은 일은 아니었다. 칼은 잠시 고민하다 고했다.
“각하께 일단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인, 옆방에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이윽고 집무실에 조심스레 들어간 칼이 에드가에게 셰니에 부인의 말을 고했다. 다른 일이었다면 귀찮게 하지 말고 쫓아내라는 식으로 응대했을 에드가는 ‘공작 부인의 무례’ 라는 말에 반응했다. 칼은 에드가를 집무실 서재 의자에 옮겨 앉히고 휠체어가 보이지 않게 치워 놓은 뒤 셰니에 부인을 안내했다.
“각하! 제 평생 이런 취급은 처음 당해 봅니다. 공작 부인의 행동은 명백히 문제가 있습니다.”
작심한 듯 셰니에는 에드가가 질문하기 전에 말을 쏟아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는 쏙 뺀 채 본인에게 유리하게 말을 지어냈다. 셰니에의 이야기 속 루비카는 정말인지 아이들을 미래를 생각하는 엄한 선생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쫓은, 건방지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에드가는 일단 셰니에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어쩌길 바라는가?”
“공작 부인께 따끔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해고하는 걸 철회하라 하십시오. 그래야 각하와 클레이모어의 체면이 설 수 있습니다.”
루비카에게 따끔히 말하라고? 셰니에의 말에 에드가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따끔히 말했다가 역으로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셰니에가 사람을 잘못 찾아왔다. 그는 정말이지 루비카를 이길 수 있는 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앤이나 칼에게 하소연하는 게 나았다.
“루비카가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었겠지.”
“각하!”
“어떤 선생을 고용하는지는 전적으로 그녀의 권리이네. 돌아갈 때 경비와 퇴직금은 넉넉히 챙겨 주고 추천서도 잘 써 주겠네.”
셰니에는 거기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이 차갑기 짝이 없는 공작이 고작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셰니에가 보기에 루비카는 천하절색도 아니었다. 설사 사랑에 빠졌다고 할지라도 남자란 자신의 체면에 민감하기 마련이었다. 셰니에는 루비카가 준남작가 출신인 점을 파고들기로 했다.
“각하께서는 아직 공작 부인에 대해 잘 모르시는 듯하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사흘 간 문안 인사를 하며 지켜본 결과 부인께서는 상류 귀족의 예법에 대해서 무지하십니다. 걸음걸이도 우아하지 못하며 말투도 천합니다. 특히 각하께 함부로 말씀하시는 버릇은 고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제가 이 지점에 대해서 지적했을 때 부인께서는…….”
“지금 뭐라고 했나?”
에드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자신의 계략이 통한다 여긴 셰니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처음부터 공작을 찾아왔어야 했다. 남편이 뭐라 하는데 이를 이길 부인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각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일주일에 세 번 수업을 진행해 공작 부인을 유순하고 얌전한 여인으로 탈바꿈시켜 놓겠습니다.”
만약 에드가의 다리가 온전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셰니에의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손에 집히는 책을 잡아 던져 버렸다. 셰니에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셰니에는 그제야 공작의 싸늘한 눈과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제가 각하의 심기를 거슬렀다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모두 충정에서 비롯된…….”
“왜 지금 내 행동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지?”
“네?”
“사람에게 책을 집어 던지다니 예의 없고 버릇없지 않나?”
에드가의 푸른 눈은 마치 사막에 물 없이 삼 일이나 있었던 사람처럼 건조했다. 셰니에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루비카에 대해서는 말투 하나까지 물고 늘어져 놓고 내게는 바로 사과를 하다니 부끄럽지 않나?”
“각, 각하는 공작 각하시나 부인은…….”
“공작 부인이지.”
“각하!”
더 듣기 싫다는 듯 에드가가 칼에게 손짓했다. 그는 아까까지 보던 서류를 꺼내 잉크에 펜을 묻혀 수식을 기입하기 시작했다. 마치 셰니에가 거기 존재하지 않는, 공기로 변하기라도 한 듯한 태도였다.
“제 말을, 제 설명을 좀 더 들어 주십시오. 부인의 그런 행동을 그대로 두는 것은 공작가의 명예에 누가 됩니다.”
칼은 셰니에 부인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셰니에 부인이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자 결국 그녀를 집무실 바깥으로 끌 듯이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시종이 문을 닫자마자 셰니에는 서러운 듯 울음을 터뜨리고 바닥을 동동 굴렀다.
“대체 각하께서 왜 저러는 거죠? 내가 뭘 잘못했다고, 부인의 태도를 고치면 각하께도 좋은 일이련만!”
칼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셰니에 부인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칼의 추측에 의하면 에드가는 루비카가 자신에게 반항하거나 버릇없이 구는 걸 몹시도 좋아했다. 말로는 그녀와 싸우나 그때마다 에드가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고 귀 끝이 붉었다. 한 때 칼은 자신의 주인에게 혹 괴롭힘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그러나 루비카 이외의 다른 이가 자신에게 그렇게 굴면 에드가는 가차 없이 대했다.
“부인, 각하 앞에 공작 부인의 말투를 지적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셰니에 부인은 선뜻 칼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인은 남편에게 공손하게 말을 해야 옳다. 함부로 말을 놓는 루비카의 행동은 공작에게도 썩 유쾌한 것이 아님이 틀림없다. 실례로 피로연 때 부인에게 잡혀 사는 것 같다는 주변의 숙덕거림에 에드가는 표정을 있는 대로 구겼다. 셰니에 부인은 예절 선생답게 루비카의 버릇을 고쳐 주려 했다. 설사 그녀가 지금 공작 부인이라 할지라도 모두 에드가라는 남편을 만났기 때문에 이룰 수 있는 위치였다. 자신이 에드가의 비위를 맞추고 신임만 얻을 수 있다면 루비카의 해고 명령 따위는 간단히 뒤집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랬지요. 왕세자조차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각하께 부인이 너무 막 대하는 것 같아 이를 바로잡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얼마 전 있었던 만찬자리에 부인께서 계시지 않아 말씀드리자면, 각하께서 마님과 각하께서 서로 쓰시는 말투는 부부사이의 일이니 관여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부인의 말투에 대해서 충고한 죄로 각하께서 그 자리에서 삼 개월 치 월급을 감봉하라 명령하셨습니다. 마님께서 그러지 말아 달라 하셨으나 결국 감봉되었지요.”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칼이 말은 끝맺었다. 셰니에부인은 그제서야 어렴풋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런…….”
“부인, 마님의 말투를 지적하신 관계로 각하께서 추천서에 좋은 말씀을 써 주시지 않을 겁니다. 아니면 아예 추천서를 쓰시는 걸 거부하실 수도 있습니다.”
추천서를 받지 못하면 다음 일자리를 구하는 데 큰 문제가 생긴다. 귀족들은 하녀조차도 추천서가 없으면 쉽사리 고용하지 않으려 했다. 셰니에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럼 나는 이제 어찌해야합니까?”
“지금이라도 마님께 찾아가서 사죄하십시오. 각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분은 마님뿐입니다.”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