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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57화 (5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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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57화

살얼음이 낀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셰니에 앞에 있는 소녀들을 비롯해 앤까지 잠시 귀를 의심했다. 루비카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셰니에를 제쳐 두고 앤에게 말했다.

“클레이모어가의 예절 선생은 다른 분을 찾으려 해. 아이들을 친절하게 가르칠 줄 알고,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아이들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서 내 예법을 꼬집으려 매일 면담이나 오는 사람 말고.”

“부인!”

모욕을 받은 셰니에가 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갓 공작 부인이 된, 새파랗게 어린 계집애가 저에게 이렇게 굴 줄을 몰랐다.

“부인의 지금 서 계시는 자세나 말투에서 예법을 어긴 것은 자그마치 13개가 넘습니다. 저는 클레이모어의 예법을 담당하는 선생으로 온당한 지적과 수업을 권유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지금 하신 언행은 정말이지 클레이모어라는 이름을 다시기에 어울리는지 생각해 보시길 권유합니다.”

“그래도 당신은 해고야.”

“고집부리지 마시고…….”

“당신과 말싸움할 생각 없어. 셰니에 부인, 나는 당신에게 이미 한 번 기회를 줬어. 앤, 부인은 이제 더 이상 선생이 아니니 아이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어. 방으로 돌려보내 줘.”

루비카가 결심이 단단히 선 걸 눈치챈 앤이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눈치를 셰니에 부인에게 주고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 문밖으로 데려갔다. 바깥에서 한동안 따지는 듯한 소리가 났으나 곧 잠잠해지고 하녀 하나가 간단한 간식거리를 가지고 왔다. 어서 자리에 앉으라는 루비카의 손짓에도 아이들은 눈치를 보느라 선뜻 자리에 앉지 못했다.

“너희들이 보는 가운데 나 혼지 이걸 먹게 할 거니?”

농담 삼아 던진 말인데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벌벌 떨더니 넷이 잽싸게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루비카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가정교사 중 제일 무서운 이가 셰니에였다. 그 무서운 셰니에를 한순간에 자리에서 물린 공작 부인이다. 비록 길 가는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순한 인상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그들에게 있었다.

“셰니에 부인이 너희를 그렇게 가르쳤을 줄이야……. 가정교사 관리가 엉망인 건 내게 책임이 있어. 미안하구나.”

루비카가 사과할 줄은 몰랐던 아이들은 당황했다. 순식간에 셰니에를 해고한 그녀가 자신들을 막대하리라는 예상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런……, 부인.”

“저희에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 저희가 부족해서 일어난 일인걸요.”

“너희는 부족하지 않아. 잘못한 건 어른들이지.”

루비카는 손수건을 꺼내 방금까지 셰니에에게 혼나느라 눈물이 마르지도 않은 그녀의 요정에게 건넸다. 그녀의 요정은 키가 크고 홀쭉한 몸매를 가졌다. 턱은 마치 달걀모양을 본떠 만든 듯 갸름했다. 눈은 살짝 작았으나 동그랗고 우아했다. 당당하고 도도할수록 빛나는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였다. 그러나 셰니에의 지나친 훈육 때문에 요정은 자신감을 잃었고, 아름다움 또한 빛을 잃었다. 귀엽고 앙증맞은 소녀라면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외려 사랑스러울 수 있으나 요정은 반대였다.

루비카는 하녀가 가져온 달걀샌드위치를 먹고 이제야 진정한 소녀들에게 왜 문안을 오지 않았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셰니에가 알려 주지 않았거나 공작 부인을 뵈어야 하냐는 질문에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답했을 것이다. 인사는 여기서도 나누어도 된다.

“한 명씩 내게 소개를 해 줄 수 있겠니?”

막 눈물을 다 닦은 루비카의 요정이 입을 열었다.

“저는 엘리제 로안 드 솔라나입니다.”

드디어 알게 된 요정의 이름에 루비카는 미소를 머금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그렇게 요정을 시작으로 네 명의 소녀들이 차례차례 자기소개를 했다.

엘리제의 가정환경은 조금 복잡했다. 자작집안 출신인 그녀는 신분으로 따지자면 어디 빼놓을 곳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엘리제가 다섯 살이었을 무렵 투자에 실패했다. 하지만 귀족가의 수입과 지출은 장부를 딱 펼쳤을 때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떤 것은 몇 년 뒤에 수익이 나기도 했으며 급한 것은 어음으로 메꾸는 것이 가능했다.

“이번은 실패했지만 가끔 그런 일도 있는 거지.”

솔라나 자작은 대수롭게 생각했다. 그는 한 번의 실패 때문에 생활 방식이 바뀌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자작 부인다운 드레스를 입고 보석으로 치장하길 바랐으며 그는 하나뿐인 딸과 아들의 교육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모두 낙관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장부에 드디어 이 일이 심상치 않다는 표시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때에는 모든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솔라나 자작은 영지를 팔아야 하는 사태까지 오자 이 일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 버렸다. 조상님 보기에 면목이 없다는 유서뿐이었다.

그때는 엘리제가 열두 살 무렵이었다. 홀로 남은 그녀의 어머니, 솔라나 자작 부인은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차분히 사태를 수습했다. 일단 영지를 다 정리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두고 조상님 보기 낯 부끄럽다는 이유로 자살할 인물이 못되었다.

“이제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리처드, 너는 다음 달에 있는 왕립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하거라. 기사는 귀족으로 명예를 지키며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다.”

엘리제보다 세 살 어린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절박했기 때문이었을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정말 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정식 기사로 서임받기 전까지는 약간의 생활비만 주어질 뿐 돈을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수련을 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집안에서 대어야 할 형편이었다.

“엘리.”

어느 날 결심을 끝낸 솔라나 자작 부인이 엘리제를 불렀다.

“우리에게 남은 건 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지참금뿐이구나. 하지만 우리 둘이서 지금까지처럼 생활하며 리처드의 교육비를 대면 5년이 채 되지 않아서 자금이 바닥날 거야. 그리되면 나중에 네가 시집갈 때 가져갈 돈이 없구나.”

반쯤은 예상했던 말이다. 그러나 엘리제는 어머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그녀는 너무 어렸다.

“괜찮아요. 시집 같은 건 안 가도 좋아요. 같이 있어요. 리처드가 정식 기사가 되면 돈 같은 건 금방 벌 수 있잖아요.”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말씀드렸단다. 어머니의 외할머니가 클레이모어 공작가 출신인 건 알고 있지? 기꺼이 너를 받아 주겠다고 하더구나. 공작가의 가정교사들이 너를 가르치기로 했으니 교육도 걱정할 게 없구나.”

우리가 아니라 ‘너’였다. 불길한 예감이 엘리제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엘리제는 밝게 목소리를 꾸며 내었다.

“그럼 어머니랑 함께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가는 건가요? 공작 각하와 부인께 노래를 불러드릴게요. 친구들도 내 목소리가 예쁘다고 했으니 분명 다들 좋아할 거예요.”

솔라나 자작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남편을 잃은 부인만 갈 수 있는 수도원이 있어. 엄마는 거기에 갈 거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수도원에서 일하면 내 앞의 생활비는 한 푼도 들지 않을뿐더러 수사나 사제 시험에 합격하면 적더라도 돈이 나와.”

“안 돼! 안 돼요. 엄마.”

엘리제는 솔라나 자작 부인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펑펑 울며 매달렸다. 제발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애원했다. 자작 부인도 할 수 있다면 딸과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사랑스러운 딸의 미래를 희생해야만 했다.

“엘리, 엄마는 사실 네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원래 사제가 되고 싶었단다. 그러니 엄마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와주겠니?”

“거짓말!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녀의 어머니는 사제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자신을 떼어 내기 위해서 만든 말이라는 사실을 엘리제는 알고 있었다.

“엘리, 우리가 함께 사는 데 돈을 다 쓰면 리처드는 어떻게 되겠니? 리처드는 다른 견습 기사들이 받는 보조 비용의 절반도 안 되는 돈을 받고 있어.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할 텐데 이대로라면 우리는 리처드에게 검 하나 사 줄 수 없구나.”

그러나 리처드의 이야기까지 나왔을 때 어린 엘리제는 입을 꾸욱 다물고 훌쩍훌쩍 울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엘리제는 일주일 간 방안에 틀어박혀 울었다. 하지만 시위한다고 해서 먹힐 일이 아니었다. 간신히 눈물을 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클레이모어 공작가로 떠나야만 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의 생활은 사실 다른 귀족가의 피후견인 생활보다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물질은 풍부했다. 공작가는 원래 재능 있는 아이들을 지원했다. 개중에는 평민도 있었다. 문제는 엘리제가 매우 평범한 소녀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법 선생인 셰니에가 지독했다.

“넌 행동도 굼뜨고 하는 일도 덜 떨어지는데 덩치가 커서 눈에 띄기까지 하구나.”

세상에 그런 악담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엘리제는 경악했다.

“감히 어른을 상대로 그런 표정을 짓다니. 네 어머니가 뭘 가르치신 건지 궁금하구나.”

셰니에는 엘리제를 구박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공작가에서 중요한 인물이 될 것 같은 아이들, 특히 소년들에게 각별히 친절하게 굴었다.

“어쩜, 나이프마저 고상하게 잡니.”

그리고 엘리제가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나이프를 잡았을 때 셰니에는 무참히도 손을 꼬집었다.

“다 틀렸구나. 나이프마저 제대로 잡지 못해서 어디에 쓸꼬. 쯧쯧쯧.”

무엇을 해도 혼이 났다. 그녀는 최대한 셰니에 눈에 띄지 않게 어깨를 오므려 큰 키를 숨겼다.

“자세가 구부정하게 그게 뭐니.”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어린 시절에는 제법 예쁘장하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으나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가 못생겼다 이야기했다. 처음 엘리제는 ‘아니야. 어머니랑 동생은 나보고 예쁘다고 했는걸.’이라고 속으로 반박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그녀는 그 말에 수긍하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이 되어 처음 무도회에 데뷔했을 때 그녀는 벽 뒤에서 한참을 오도카니 서 있어야 했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지 않았다.

‘……엄마랑 동생이니까 내가 예뻐 보인 거겠지.’

어머니는 그녀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을 만나 결혼할 수 있도록 지참금을 지키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다. 동생은 최대한 손 벌리지 않기 위해서 학교에서 장학금을 탔다. 엘리제는 모두 쓸데없는 일로 느껴졌다. 이렇게 못생긴 자신을 돌아봐 주는 사람이 세상에 있기나 할까.

하지만 가족의 노력을 헛되게 할 수는 없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그녀는 어느덧 열일곱이 되었다. 그녀는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노력하며 힘겹게 공작가에서 버텼다. 버티고 버텨서 도저히 시집갈 수 없는 나이가 되면 지참금을 모두 동생에게 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공작가에서 열심히 배워서 가정교사가 되고자 했다. 여성 가정교사에게 바른 예법은 특히 중요했다.

“어쩜 넌 이런 것도 모르니?”

하지만 그때마다 셰니에 부인의 무참한 손길이 그녀를 강타했다. 셰니에 부인은 어느 날은 허리를 깊숙이 굽혀 인사해야 예절 바르다고 했고 또 어느 날은 귀족이라면 체면을 지켜 목례만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뭐가 맞는지 뭐가 옳은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나가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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