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56화
제임스와 아이들은 긴장이 역력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이왕 루비카가 온 김에 그는 실력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자신이 아이들을 얼마나 잘 가르쳤고, 아이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루비카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고대어 교사가 아니라 자문이 되면 더 좋고.
“윌, 46쪽 두 번째 문단을 해석해 보거라.”
가장 똑똑한 아이를 시켰다. 윌은 처음에는 더듬었지만 매끄럽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루비카는 뿌듯한 동시에 슬픈 마음이 들었다.
‘전쟁이 나면 이 아이들은…….’
모두 죽겠지. 이런 고대어 수업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아직 4년이 남았지만 4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난다. 그리고 이 수업을 듣는 열 살짜리 아이들은 그때에 고작 열네 살밖에 되지 않는다. 폭격을 피한다고 하더라도 열네 살짜리가 전쟁 통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앤, 아이들이 쓰는 펜이 너무 오래된 것 같아. 새 걸 구입해서 지급할 수 있을까?”
“집사에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루비카는 소년들이 고대어를 공부하던 중인 방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지나치는 아이들이 루비카를 보고 깜짝 놀라서 인사했다. 공작가는 기사가문이 아닌 관계로 후원하고 있는 아이들 대부분이 검을 잡기 보다는 공부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었다. 이 중에 우수한 몇몇 아이들은 막대한 학비를 공작가에서 부담하고 아카데미에 보낸다. 아카데미에 간 아이들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지만 남은 아이들은? 전쟁이 나자마자 누구보다 먼저 폭격을 받은 곳이 클레이모어 공작가였다.
‘……전에는 꼴좋다고 생각했지.’
이전의 삶에서 루비카는 스텔라를 발명해 낸 클레이모어 공작이 미웠다. 누군가는 잘못한 건 그걸 사용한 사람에 있고 발명한 이는 죄가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드가가 발명한 것은 ‘전쟁무기’였다. 발명한 에드가는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하늘 위에 떠오른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심지어 좀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방법이 없는지 고민했겠지. 설사 세리토스 왕국이 아니었더라도 스텔라는 결국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안겼을 것이라는 걸 에드가는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에드가에게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전 삶에서 루비카는 에드가를 알지 못했다. 완벽한 타인인 그가 자신이 발명해 낸 살인 기계로 인해 궁색한 처지가 되었고 결국 공작가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루비카는 그가 신의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 앤도 그렇고…….’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오기 전 루비카는 자신이 살 궁리만 했다. 안젤라를 안전한 곳으로 보낸 것만으로 그녀는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겼다. 안전한 곳으로 도피할 자금을 마련해 전쟁이 나기 전 에드가와 이혼할 예정이었다. 고작해야 한 달이 안 되는 기간이었으나 루비카는 그만 클레이모어 저택 내 사람들에게 정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 사람들을 살릴 방법이 있을까?’
평온하게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루비카 옆에서 언제나 단단히 그녀를 지지하고 있는 앤을 보자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들 앞에 닥칠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적어도 이 사람들은 아무 죄가 없다. 하지만 그러려면 전쟁을 막아야 한다. 루비카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너희는 정말 구제 불능이야.”
그때 잔뜩 독이 오른 셰니에의 목소리가 루비카의 귀를 찢고 들어와 상념을 깼다. 곧이어 책을 집어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작해야 이런 것도 못 외우는 바보들에게 내가 뭘 가르치겠니?”
루비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날 선 말이었다. 그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셰니에의 뒷모습이 보였다. 예절 교육을 담당하던 셰니에 부인의 부업은 네 명의 소녀가 듣고 있었다.
루비카의 등장에 소녀들은 당황했으나 한참 화를 내고 있던 셰니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들고 있던 책으로 바로 앞 소녀의 머리를 무참하게 때리고 있었다. 덜덜 떨며 눈을 감고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소녀는 놀랍게도 루비카가 그토록 찾고 있던 요정이었다.
“그만!”
더 참지 못하고 루비카가 소리를 질렀다. 뒤돌아본 셰니에가 당황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고통이 사라진 요정이 살그머니 눈을 뜨고 눈치를 살피다 루비카를 보고 간신히 인사했다. 치맛자락을 잡는 법, 고개를 숙이는 법 모두 엉망이었다. 옆에 있는 소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전문 가정교사가 아닌 어머니에게서 배운 루비카도 그보다는 잘했다.
“셰니에 부인,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아이들을 훈육하고 있었습니다, 마님.”
“책으로 머리를 때리는 게 훈육이라고?”
셰니에는 루비카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걸 눈치챘다. 그러나 셰니에의 눈에 루비카는 고작해야 22살짜리의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그녀는 루비카쯤은 자신이 요리할 수 있다 여겼다. 오히려 지금이야 말로 기회였다.
3일 전의 일은 공작 부인을 제 치맛자락 안에 넣는데 성공한 앤의 술수에 걸린 것쯤으로 판단했다. 능구렁이 같은 앤이 공작에게 일러바치는 바람에 셰니에는 이후 본관 근처에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루비카에게 자신의 진가를 보여 줄 속셈이었다. 말썽이나 피우는, 쓸모하나 없는 아이들을 다루는 그녀의 카리스마를 보면 루비카가 자신에게 흥미를 가질 거라 여겼다. 공작 부인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을 대신 처리하는 오른팔이 하나 정도 필요하다. 셰니에 부인은 고개를 뻣뻣하게 들었다.
“마님, 올바른 귀부인을 위한 지침서에는 말을 안 듣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아이들을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보다 더 효과적인 교육방법은 없지요.”
훈계조의 말투였다. 그게 루비카를 더욱 화나게 했다.
“교육의 신이자 지식의 신인 아르카의 성서에 나와 있는 구절이네.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칭찬하라. 매들 들기 전 적어도 세 번은 생각하라.’”
셰니에는 당황했다. 예절 선생인 그녀는 예법에 대해서는 공부하였으나 아르카의 성서를 굳이 찾아 읽은 적이 없었다.
“마님, 아르카의 성서와 예법은 상관없습니다.”
“아르카는 교육의 신이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지점에서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세 번 생각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무참히 벌을 줄 이유는 못 돼.”
루비카가 단호히 말했다. 셰니에가 침을 꿀꺽 삼켰다. 햇병아리라고 생각했는데 만만치 않다. 하지만 나이와 연륜을 무기로 삼으면 이기지 못할 게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셰니에가 오랜 경험을 들먹이면 입을 다물었다.
“마님은 자애로우시니 제가 너무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년 간, 아닌 수십 년 간 제 경험에 의하면 너무 풀어 주면 아이들은 제대로 크지 못합니다. 엄격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공작 각하도 제가 가르쳤습니다. 그분을 보세요. 얼마나 완벽하게 예법을 지킵니까. 마님, 교사가 아이들을 훈육하는데 끼어드시는 건 교육에도 좋지 못합니다.”
아, 경험으로 나오시겠다 이거지. 루비카는 입술을 깨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에드가의 입에 들러붙은 재수 없이 비꼬는 말투는 당신이 가르쳤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앤이나 다른 가족이 보는 앞에서 에드가의 체면을 깎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아는 분은 일흔 살 가까이 되도록 아이를 가르치셨지만 아이들을 매로 다스리는 것보다 칭찬하는 게 교육에 더욱 좋다고 말씀하셨네.”
그리고 그 사람은 루비카 본인이었다.
셰니에는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대체 루비카에게 그런 쓸모없는 사상을 주입한 게 누구일까. 앤일까? 그녀는 불쌍하게도 세뇌당한 공작 부인을 자신이 구제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 고작해야 한 사람의 의견일 뿐입니다. 사람에 따라 효율적인 훈육방식은 각자 다르지 않습니까? 마님께 그런 말을 주입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군요.”
루비카의 인내심은 서서히 끊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셰니에를 노려보던 걸 멈추고 바로 옆에서 바들바들 떨며 대기 중이던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인사해 보렴.”
“네?”
“겁먹지 말고 내게 다시 인사하렴.”
아이들은 당황하였으나 루비카의 말투가 셰니에를 향했을 때와 달리 다정했기에 용기를 내어 인사했다. 그리고 네 명의 아이들의 인사법은 교본에 나와 있는 지침을 따르긴 하였으나 세부적으로 고쳐야 할 점이 너무 많았다. 예법이란 그저 책만 읽는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선생이 필요하다.
“셰니에 부인, 이 아이들이 인사하는 방식을 보았을 때 당신의 교육법은 엉망진창인 것 같은데?”
자신들을 비난하는 줄 알고 아이들이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루비카의 요정은 아예 눈을 감고 자신에게 끔찍한 벌이 내려지는 걸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때 루비카는 베르너 저택 앞에서 그가 자신을 때리리라 예감하고 몸을 움츠린 자신을 아연한 눈으로 쳐다보던 에드가의 심정을 이해했다.
“아이들이 아직 책도 제대로 외우지 못해 진도가 안 나가서 그랬습니다. 제대로 예법 책부터 외우게 시킨 다음에 자세를 교정할 예정이었습니다.”
루비카는 자꾸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드는 셰니에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잘못했다고 말했다면 루비카는 그녀를 용서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셰니에는 그러지 않았다.
“이 아이들이 몇 살이지?”
“네?”
반문하는 셰니에를 내버려 두고 루비카는 옆에 서 있는 아이들에게 다정히 질문했다.
“몇 살이니?”
아이들은 대답해도 괜찮을지 눈치를 보았다. 뭔지는 몰라도 자신들이 실수를 했고 그에 따른 처벌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겁먹은 모습에 루비카의 가슴속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다행히 노력이 통했는지 아이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올해 열여섯입니다.”
“열, 열다섯입니다.”
“열일곱입니다.”
하나 둘 아이들이 나이를 밝히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대답한 요정의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사교계에 데뷔를 해도 충분한 나이에 인사조차 제대로 못하다니!”
“아이들이 배움에 게으르고 버릇이 없습니다. 좀 더 강하게 가르치겠습니다.”
책으로 머리를 때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가르치겠다고? 이미 머리가 굵어 창피라는 단어를 알만한 아이들에게 얼마나 더 큰 모욕을 주겠다는 소리일까. 루비카의 인내심은 결국 바닥나고 말았다.
“셰니에 부인, 도저히 두고 못 보겠군.”
“마님, 아이들이 수준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 한 달만 주시면 이 아이들을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바꿔 놓겠습니다.”
셰니에는 두고 못 보겠다는 말이 자신을 가리키는 줄 몰랐다. 아이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게 오히려 기회였다. 그녀는 이 기회를 살려 자신의 능력을 선보이기로 했다.
“그럴 필요 없어. 당신은 해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