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55화
“장갑과 모자를 챙겨 줘.”
“네. 마님, 산책을 하시려는 건가요?”
“아니, 별채에 가려 해.”
앤은 갑작스럽게 별채에 가겠다는 루비카의 말에 당황했으나 군말 없이 준비를 도왔다. 클레이모어 공작저 내에 루비카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다.
간단히 차림새를 정비한 루비카는 본관 앞 정원을 가로질러 별채로 향했다. 클레이모어 공작은 귀족 중에서도 작은 공국에 준하는 힘을 가진 통치가문이었고, 공작의 저택은 말이 저택이지 일종의 궁정이었다.
본관은 공작 내외의 공간이라면 세 곳의 별채는 가신과 연구자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중 동쪽 별채는 클레이모어 공작가에 신세지는 친척들이 주로 기거하는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들은 한 명도 인사하러 오지 않았어.’
귀족가의 장자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는 대신 친척들의 생계를 어느 정도 책임질 의무가 있다. 특히 클레이모어 공작가 정도 되는 집안에는 생계가 어려운 친척이나 또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재능 있는 아이들의 후원자가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그 애들의 재능에 맞춰 교육을 시켜 주고, 여자아이들은 기본적인 교양 이외에 원하는 경우 시녀나 가정교사로 일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 주었다. 이는 공작가의 입장에서도 결코 손해 보는 일만은 아니었다. 그리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자라나서 철저히 클레이모어를 위해 일할 확률이 높았다.
“부인,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별채에 들어서자 현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루비카는 그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 최대한 무게감 있게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잠시 별채의 환경이 궁금해서 왔을 뿐이니 괘념치 말게.”
“하오나…….”
“내게 신경 쓰느라 일에 방해가 되는 걸 원하지 않네. 하던 이야기 계속하게.”
한숨 섞어 대답하자 사람들은 하나둘 눈치를 보더니 보고 있던 서류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루비카에게 문안을 온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변호사였고, 저 사람은 회계사, 그리고 저쪽은 장부를 기록을 도맡는다고 했었지.’
아마 공작가의 예산이나 재무 관련으로 이야기할 거리가 있는 듯했다. 루비카는 그들을 지나쳐 지하의 저장고와 하녀들의 숙소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별채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부, 부인.”
공작 부인이 직접 별채에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이들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굴었다.
“이 누추한 곳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질문하는 자도 있었다. 클레이모어 영지내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윌리엄 씨였다. 진지한 모습에 도저히 그냥 보러 왔다든가 피로연장에서 본 소녀를 찾으러 왔다는 대답 따위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후자로 대답하면 그녀가 떠난 이후 아마 친척들이 요정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고, 전자로 대답할 경우 친척들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원인을 밝혀내려 며칠을 난리를 칠 것이다. 그 와중에 괜히 죄 없는 심약한 사람이 원인 제공자로 몰려 공격을 당할 수 있다.
‘이거 원, 공작 부인이 되어도 제멋대로 할 수가 없네. 그렇게 사려면 공주라도 되어야 하나.’
루비카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사실, 제멋대로 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다만 루비카가 그럴 사람이 되지 못했다. 공주가 아니라 아무 책임질 필요 없는 졸부의 딸이 될지라도 루비카는 제멋대로 살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그 사실을 루비카만이 몰랐다.
“별채생활은 어떤지 둘러보고자 왔네.”
무엇하러 왔냐는 질문에 이보다 더 적절한 대답이 있을 수가 있을까? 시찰을 핑계로 대면 루비카는 마음 내키는 대로 속속들이 별채를 둘러볼 수 있다. 루비카는 스스로 생각해 낸 답변에 제법 뿌듯했다.
“저희들의 생활까지 염려하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이것 참,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루비카의 대답에 윌리엄이 크게 감명받은 표정을 지었다. 보지 않는 척 갑작스러운 마님의 행차를 주의 깊게 바라보던 다른 친척들과 사용인들이 수군거렸다. 속삭임은 호의 어린 것이었다. 심지어 옆에 있는 앤조차 크게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별것 아니지만 겨우내 수도가 한 번 동파되어 그런지 요즘 물이 나오는 게 영 시원치 않습니다. 딱히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만……. 세수를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나 목욕 같은 건 한참 기다려야 합니다.”
앤의 눈치를 보며 어렵사리 윌리엄이 꺼낸 말에 루비카는 잠시 당황했다.
‘아니, 둘러본다고 했지 뭐가 불편하냐고 묻지 않았는데?’
하지만 윌리엄을 비롯한 사람들의 눈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심지어 앤마저도 다음에 꺼낼 루비카의 대답이 고쳐 주겠다는 말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그래. 뭐, 고쳐 준다고 해서 내가 손해 보는 거 있어? 나야말로 돈 써서 좋지.’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개선을 핑계로 별채를 싹 뜯어고치면 돈 한번 거창하게 쓸 수 있을 듯 했다. 루비카는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고치라 이르겠네. 그 이외에 불편한 건 없는가?”
윌리엄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마님의 고운 마음에 뭐라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리 신경 써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니네.”
루비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윌리엄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불편한 게 없는가?”
“네? 네. 아…….”
갑작스레 호명된 이가 당황하면서 별채가 얼마나 잘 관리되고 있는지, 클레이모어에서의 생활이 다른 귀족가에 비해서 얼마나 많은 장점이 있는지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루비카의 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앤에게 말했다.
“물맛이 이상하다니 수원을 한번 조사해 봐.”
“네, 네. 마님.”
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녀는 루비카의 그런 행동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그건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루비카에게 들리지 않게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새로운 마님이 배려가 깊으시군.”
“집사나 하인을 시키지 않고 직접 온 것부터 달라.”
“준남작가 출신이라 길래 얼마나 잘할까 내심 걱정했는데…… 기우였나 보군.”
“역시 그 까다로운 각하가 반한 여자는 다르긴 하군.”
내심 루비카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있었던 이들은 편견을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색안경을 버린 게 아니라 새로운 색안경을 꼈다. 그리고 그들이 걱정을 버리고 진심으로 존경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루비카의 머릿속은 그들의 생각과는 딴판이었다.
‘오, 이것도 고치고 저것도 고치면 예산이 훅 나가겠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불도 싹 다 갈아 버릴까? 바꾼 지 오래되었다는데 이 기회에 바꾸는 것도 좋잖아.’
요정을 만날 생각과 예산을 탕진할 생각에 들뜬 루비카는 오늘의 이 행동이 자신에게 ‘사치스런’ 공작 부인의 오명을 덧대기는커녕 ‘현명하고’ ‘배려심 깊으며’ ‘자애로운’ 공작 부인이라는 찬사를 쏟아지게 하리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 * *
동쪽 별채의 1층과 2층은 대체로 공작가의 중요한 업무에 관여하는 가족이나 파견자가 살고 있어서 상태가 제법 괜찮았다. 지하는 하녀들의 공간이란 이유로 루비카가 들어오는 것을 극구 말렸다.
‘원래 윗사람이 아랫사람 쉬는 곳에 가는 건 민폐긴 하지.’
루비카도 수도원에서 일할 때 자기들이 쉬고 눕는 공간에 수도원장이 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골머리가 아팠다. 원장은 괜찮다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줘도 된다고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당장 꼭두새벽에 일어나 청소부터 하기 바빴다.
어차피 별채를 둘러보기로 한 건 정말 별채의 생활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적은 오직 요정, 요정이었다.
“불편하거나 어려운 게 있으면 하녀장이 진작 앤에게 이야기했겠지.”
하녀들의 숙소를 건너뛰며 루비카는 앤을 추켜세워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장 앤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시녀장인 앤은 온 지 얼마 안 된 클레이모어 저택에서 누구보다 루비카를 위하는 사람이었다.
‘가끔 지나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나를 제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야.’
아직 앤의 보호 아래 있는 루비카에게 발톱을 드러낸 사람은 없지만 루비카는 자신에게 적이 많으리란 사실을 알았다. 물론 가십에 굶주린 친척들에게 물어 뜯겨도 상관없다.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하지만 앤은 그리되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앤은 루비카를 공격하고자 마음먹은 사람들의 먹잇감이 되기 쉬웠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앤의 평판만은 좋게 만들어야 했다.
“3층은 클레이모어가에서 후원하고 있는 영식과 영애를 위한 공간입니다.”
3층에 다다른 루비카는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공작가에서 후원하고 있는 아이들이란 대부분 부모가 귀족이나 양육을 할 수 있는 재정 상태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그리 교육받은 아이들이 공작가의 재원이 될 것이 분명하나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확실히 당장 공작가에 도움이 될 사람들이 기거하는 1, 2층에 비해서 내장재부터 차이 났다.
“모두 불러서 마님께 인사하게 할까요?”
루비카는 열린 문 너머에서 열심히 공부 중인 소년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어. 앤.”
“네, 별채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있는지 체크할 필요도 있지요.”
앤이 미소 지었다. 루비카가 아이를 낳고 키우기 시작하면 붙여 줄 친구가 필요하다. 가정교사 같은 어른들에게 보호받으며 자란 아이는 당장에는 괜찮지만 자라나면서 문제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아이는 또래에 둘러싸여 가끔은 싸우기도 하고 경쟁하면서 우정을 다지고 함께 자라는 게 좋았다. 그리고 그 역할은 공작가에서 후원하는 아이들이 맡을 것이다. 물론 가신의 아이들도 친구가 될 수 있지만 매일 함께 공부할 아이들이 필요하다.
“마님, 여기는 어쩐 일로…….”
교육실에서 고대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던 교사 제임스가 루비카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책을 읽고 있던 소년들도 황급히 일어나 루비카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예법 교본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 듯한 포즈였다. 앉아 있는 아이들의 얼굴은 다 익다. 모두 문안인사 때 한 차례 다녀간 아이들이었다.
“수업을 계속하게.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온 것이니까.”
“이것 참, 휴.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일단 모두 자리에 앉도록 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