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54화
어찌 대응해야 할까 고민하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앤이 간식거리를 들고 들어왔다. 앤은 루비카가 좋아하는 사과주스를 한 잔을 따르고, 셰니에의 잔에는 포도주스를 따랐다. 접시의 간식 또한 각각 달랐다. 루비카뿐만 아니라 셰니에의 입맛을 배려한 것뿐이었다. 이만치나 사람 좋은 앤이 셰니에에게 뒷담이나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앤, 공작가의 전통적인 예법에 따르면 커피 잔의 숟가락은 접시 위에 올라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냅킨 옆에 두는 것은 최근에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방식이지요. 클레이모어처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이 이런 유행에 흔들려서야 되겠습니까? 쯧쯧쯧.”
“어머, 제가 실수했군요. 부인,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클레이모어의 예법 선생님이세요.”
셰니에의 지적에 앤이 사과를 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자 셰니에의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마치 이것 보라는 듯 과시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루비카를 보았다. 자신이야말로 공작가의 시녀장에 어울린다는 듯한 제스쳐였다. 루비카는 순식간에 입맛을 잃었다. 화가 나기도 했고, 앤이 안타까웠다. 셰니에에게 일분일초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 배가 아프네.”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공작 부인이라고 뒤에서 욕하려면 하라지. 루비카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던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주치의를 불러 줘.”
먹는 시늉도 안했다. 음식을 먹고 배탈 연기를 하는 것도 상대의 체면을 지켜 주고 싶을 때나 하는 것이다. 루비카는 제 앞에서 앤을 흉본 셰니에의 체면 따위 지켜 주고 싶지 않았다. 당장 그 뜻을 읽은 셰니에의 얼굴이 붉어졌다. 공작 부인은 대놓고 축객령을 내린 것이다.
“부인! 손님을 대할 때는 지켜야 할 예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부인은 평범한 여인이 아닌 클레이모어를 대표하는 공작 부인입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으셨다면 결코 이런 행동은…….”
루비카는 천연덕스럽게 배에 손을 올렸다.
“갑자기 배가 아픈 게 예의와 무슨 상관이지?”
상관없다. 배는 갑자기 아플 수도 있는 노릇이다. 셰니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루비카의 속셈은 뻔하다. 어제는 머리 아프다는 핑계로 주치의를 부르더니 오늘은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아프다고 주치의를 부른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
“어떻게 음식을 먹기도 전에 배가 아플 수가 있습니까?”
“배가 아프려면 음식을 먹고 아파야 하다니……. 내가 몰라서 그러는데 세리토스 왕국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의 안주인이 지켜야 할 법도 중에 그런 게 있었나? 앤.”
동의를 구하기 위해 앤을 부른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앤은 거의 사색이 된 상태였다. 루비카가 배에 손을 올린 순간부터 안절부절못하던 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셰니에에게 소리쳤다.
“그만! 그만하세요, 부인! 만약 마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
무슨 끔찍한 상상을 했는지 앤이 도리질을 했다.
“마님! 일단 소파에라도 좀 누우세요.”
루비카는 앤의 연기력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마치 루비카가 배에 칼이라도 맞은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앤의 서슬에 셰니에 부인이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사이 앤은 주변의 쿠션을 가져와 루비카의 등에 받쳤다. 루비카는 떨떠름한 기분을 감추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댔다. 그 사이 앤은 손발이 차가운지 체크하고 세상의 근심을 다 가진 것처럼 루비카의 배를 바라봤다.
“손이 차가운 것 같아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괜찮으신가요? 아…….”
아무래도 앤의 걱정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 같았다. 그 서슬에 방금까지 루비카를 연기자 취급했던 셰니에 부인마저도 사태가 심각하다 여겼는지 뒤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주치의! 어서 빨리 주치의를!”
“앤.”
루비카가 당황해서 앤의 팔을 잡았다. 이건 꾀병이다. 괜히 주치의까지 부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주치의가 오게 된다면 꾀병이라는 사실이 들키니 곤란하다.
“괜찮아. 잠시 아팠던 거야. 이제 괜찮아.”
루비카의 말에 앤이 안도의 한숨을 뱉어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수건을 찾아 꺼내더니 식은땀을 닦았다. 정말 걱정은 연기가 아니었다. 누가 연기로 저리 땀을 흘릴 수 있을까.
“그래도 주치의는 만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찮아. 그냥 잠깐 그랬던 거야.”
앤이 걱정스레 루비카의 배를 살폈다. 아직 배는 나오지 않았다. 이 시기가 오히려 가장 위험한 때이다. 자칫 잘못하면 유산을 할 수 있다. 갑작스레 찾아온 진통이라니……. 아기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냐는 가정만으로도 앤은 오싹했다.
“마님, 그동안 제가 너무 강행군을 하게 만들었군요. 무엇보다 건강을 챙겨야 할 때에…….”
앤은 며칠 피죽도 못 먹는 사람 보듯이 루비카를 보았다. 맛있고 영양 가득한 음식을 많이 먹고, 오후에는 한 시간 가까이 산책을 한 덕에 세상 그 어느 때보다 혈색이 좋은 루비카는 앤의 그런 시선에 당황했다.
“조금 쉬면 나아질 거야.”
“네, 제니를 부르겠습니다. 오늘 오후 일정은 모두 취소하겠으니 그만 침실에서 쉬시어요. 죄송하지만 커피는 드시지 마세요.”
“알았어. 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잠시 아팠던 것뿐이야.”
루비카가 달래듯 앤의 손을 토닥였다. 이렇게 마음씨 좋은 여인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앤은 자신을 걱정하는 루비카의 태도에 새삼 감명을 받았다. 한시름 놓은 그녀는 휙 고개를 돌려 여전히 서 있는 셰니에 부인을 보았다.
루비카는 아이를 가졌다. 이유 없이 배가 아플 수 있다. 셰니에가 그걸 몰랐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갓 결혼한 부인이 배가 아프다고 말한다면 아랫사람으로서 걱정부터 하는 게 먼저 아닌가. 감히 그 앞에서 예절을 운운해?
“셰니에 부인, 잠시 밖에 나가 저와 말씀을 나누시지요.”
한겨울의 삭풍 같은 목소리였다. 루비카는 언제나 다정히 웃던 앤이 저리 차갑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셰니에는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앤을 따라 나갔다.
그날 앤이 셰니에 부인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루비카는 모른다. 다만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셰니에 부인의 귀찮을 정도로 집요한 면담 요청은 사라졌다. 셰니에 부인은 아예 본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앤은 보기보다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지난 3년 간 앤은 안주인 없는 공작가의 살림을 운영했다. 아무리 에드가가 그녀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해도 실제 안주인과 시녀장은 그 무게가 다르다. 그럼에도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앤의 실제 모습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상당히 다를 수 있겠다고 루비카는 생각했다.
* * *
셰니에 부인의 귀찮고 집요한 면담 요청이 사라지 삼 일째,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루비카는 오전에는 아직 만나지 못한 친척을 소개받아 인사와 이야기를 나눴고, 오후에는 산책을 했다. 카나의 드레스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궁금해 침방에 들렀다 괜히 방해만 되는 것 같아 급히 나왔다.
‘아, 좀 심심하다.’
아침 식사를 들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는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에드가와의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아니, 요즘은 덜 싸우나?’
전보다 에드가와의 관계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요즘 들어 부쩍 에드가는 루비카에게 누가 그녀를 귀찮게 구는지, 불편한 게 없는지 떠보았다. 아무래도 셰니에 부인의 무례에 대해서 누가 그에게 귀띔한 것 같았다.
루비카는 그 일을 빌미로 에드가 앞에서 주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에드가는 자존심이 높았고 도발에 약해 쉽게 발끈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지금 이 분위기를 즐기는 게 나았다. 괜히 한마디 했다가는 오히려 그가 역으로 역정을 낼 수도 있다.
게다가 매섭게 잘생긴 남자가 슬금슬금 이쪽 눈치를 살피는 걸 모른 척하는 게 꽤 즐거웠다. 이럴 때 에드가는 제법 귀여워 보였다.
‘아냐, 그 남자가 귀엽다니. 말도 안 돼.’
루비카는 고개를 저었다. 조용한 나날은 고작 3일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너무 지루했나? 별별 잡생각이 다 든다.
“마님,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시종이 빈 잔에 주스를 따르며 물었다. 식탁에 앉은 지 시간이 꽤 지났건만 접시 위의 요리는 반절 이상 그대로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혼자서 많은 이의 시선을 받으며 하는 아침 식사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수도원에서 여럿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갓 구운 감자를 호호 불며 먹었던 때가 간절할 정도였다.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래.”
루비카의 대답에 사용인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공작 부인이 아침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지 벌써 열흘이 넘었다. 재료를 바꾸고, 요리법을 바꾸는 등 온갖 신경을 썼으나 매일매일 먹는 양이 오히려 줄어들었다. 사용인들은 그것이 단지 홀로 식사를 하느라 그렇다는 걸 알지 못했다.
“오늘 문안 오시는 분들은 어떤 분들이지?”
결국 루비카는 하는 둥 마는 둥한 식사를 마치며 이제 막 식당에 들어서 루비카에게 인사한 앤에게 질문했다. 어제는 앤이 쉬는 날이었다. 원래 시녀는 사흘에 하루 정도는 쉬어야만 했다. 하루 종일 부인의 곁에서 시중을 들고 보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통 귀부인은 시녀를 두셋 정도 두어 공백이 없도록 하였다. 아무나 시녀로 들일 수 없는 노릇이어서 앤은 그동안 쉬는 날도 반납하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가 있다. 어제 루비카는 앤에게 그만 쉬라고 명령했고 앤은 불안한 눈동자로 물러갔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자 확실히 일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당장 오늘 아침 문안 명단을 받지 못했다. 어젯밤 그녀가 질문하자 하녀와 시종 모두 당황해 따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땀을 뻘뻘 흘릴 뿐이었다.
자신이 없이 굴러가는 공작가의 상황이 걱정되는 건 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동안 고생했으니 푹 쉬고 정오 이후에 출근하라는 루비카의 당부에도 일찍 일어나 성장을 마쳤다. 마음 같아서야 아침 시중부터 참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루비카가 배려를 무시한다고 느낄 수도 있어 참고 또 참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아침 식사를 마칠 때에 맞춰 냉큼 식당으로 왔다.
“따로 보고받지 못하셨나요?”
당황한 앤의 말에 루비카는 더 당황했다.
“보고라니?”
역시 주변에서 제대로 챙기지 못한 모양이다. 앤은 괜히 쉬었다며 후회했다. 원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나기 마련이다.
“어제부로 가까운 친지 내외분들과 정식으로 인사하고 공작가에 대해 자세한 말씀을 나누는 문안은 끝났습니다. 연구소에서 각하와 함께 연구 중인 학자분들이나 연구생분들은 바쁘시니 마님께 문안 인사하러 오시는 것보다 나중에 연구소를 시찰할 겸 방문하셔서 말씀을 나누는 게 좋을 듯해 그리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더 인사 나눌 친척이 없다고?”
“네, 먼 거리에 계신 분들은 공작저까지 오시려면 긴 여행이 되시는지라 한창 농번기인 봄이 지나가고 한 차례 휴식기가 되면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루비카는 앤의 대답이 믿어지지 않았다. 요정은 분명 클레이모어 친척 일가의 테이블에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둘째 날쯤 다 루비카에게 인사하러 왔었다. 모두 별채에 기거하는 가신이거나 객식구들이었다. 결혼식이 급히 치러져 피로연장에는 멀리 살고 있는 친척이나 클레이모어 영지민은 일절 오지 않았다. 그날 본 요정이 환상이 아니라면 반드시 루비카에게 인사하러 왔어야만 했다.
‘설마…….’
요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문안도 못 올 정도로 아파서 끙끙 앓고 있는 게 아닐까?
루비카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그녀는 더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