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51화
“네, 오히려 그런 큰 기회를 주셔서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그럼 앤의 호의도 받아 줘. 앤이 사탕을 챙겨 주려는 건 당신을 동정해서가 아니야. 앤은 정이 많아서 이것저것 챙겨 주는 걸 좋아해.”
앤은 원래 조심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루비카를 처음 만났을 때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 루비카야 워낙 다양한 사람을 만나 앤의 그런 행동이 어떤 계산 없이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것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자칫하면 오해를 사기 쉬운 성격이었다.
“제가 시녀장님의 호의를 오해해서…….”
“아, 저야말로 괜한 참견을 해서 마음을 상하게 했네요. 하지만 사탕은 챙겨 줘도 괜찮겠지요? 주방장이 만든 사탕은 무척 맛있어서 아이들이 좋아할 거예요.”
“네, 기꺼이 받겠습니다.”
다행히 오해가 풀렸다. 그때 딱 타이밍 좋게 로사가 나타났다. 앤이 부탁한 대로 로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자수 도안 모음집을 가지고 왔다. 로사는 주문할 드레스의 디자인과 천을 보자마자 살몬색 천에 잘 어울리는 복숭아 꽃문양을 찾아내었다.
“이왕 주문한 김에 다른 드레스들도 몇 벌 주문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마님의 옷은 선선대 마님의 것을 수선한 게 대부분이어서…… 좀 더 새 옷을 주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비단은 이게 전부인데 다른 색들은 마님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그럼 우리가 가진 천을 사용하면 돼요.”
로사의 명쾌한 말에 카나가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벌써 자수 도안까지 신세를 졌는데…….”
“어차피 마님께서 입으실 것인데요. 신세랄 게 뭐 있나요. 침방이 존재하고 또, 제가 일하는 이유가 마님이 입으실 옷에 그 어느 귀족집안보다 아름답고 뛰어난 자수를 놓기 위해서인데요.”
순식간에 하녀가 창고에서 좋은 비단을 가져왔다. 씁쓸하게도 모두 카나가 가지고 온 천보다 좋은 것이었다. 카나는 심지어 처음 정했던 드레스의 살몬색 비단을 자신이 가져온 것이 아닌 하녀가 가져온 살몬색 비단으로 바꾸기로 했다.
“이 연두색 천으로는 실내용 드레스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머뭇거렸던 카나의 목소리에도 어느새 자신감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서로 머리를 맞대어 산책용 드레스 두 벌과 실내용 드레스 세 벌의 디자인을 정했다. 모두 루비카의 마음에 쏙 들었다. 루비카는 벌써부터 완성된 옷이 무척 기대되었다. 무엇보다 카나가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준다는 게 좋았다.
“그리고 슬슬 그걸 주문할 때가 되었군요.”
“그거라니?”
로사가 주변 하녀들을 흘깃 보더니 세 사람에게 손짓했다. 루비카는 어떤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절로 긴장해 로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앤과 카나도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로사가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낮게 말했다.
“잠옷 말입니다.”
“아, 잠옷은 지금도 충분해.”
“아니, 아니. 그런 잠옷 말고요. 야한 잠옷이요.”
그때였다.
“여태까지 모여서 무슨 이야기 중인 거지?”
갑작스레 들린 에드가의 목소리에 네 여자가 혼비백산하였다.
딱히 숨길 것은 없었으나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더 의심을 사기 쉬웠다. 비록 로사의 목소리는 매우 가까운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기는 하였으나 루비카는 혹 그가 들었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별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각하.”
앤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대답했다. 에드가는 성큼성큼 걸어와 테이블에 널린 천과 종이를 흘낏 보았다. 오늘은 정오 이후부터 디자이너와 면담 일정이 잡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저녁이 되고 바깥이 어두워질 정도로 길어질 줄은 몰랐다.
“별 이야기 아닌데 그리 놀랄 이유가 있나.”
“노크하지 않고 갑작스레 들어왔으니 놀랄 수밖에.”
루비카가 새초롬하니 대답했다. 이럴 때는 지레 겁먹고 눈치 보는 것보다 당당하게 가는 게 좋다.
“남편이 부인이 있는 곳에 오는데 꼭 노크할 필요가 있나.”
예상대로 에드가의 관심사는 루비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가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로사와 앤, 그리고 카나마저도 에드가의 눈치를 살폈으나 루비카는 당당했다.
“해야지.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건 부부의 기본이야.”
에드가는 루비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그에게 선을 그었다.
‘당신이 올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 그 이상은 안 돼.’
분통 터지게도 에드가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그 선을 쉽게쉽게 넘을 수 있었다. 당장 오늘 루비카와 처음 만난 디자이너만 해도 그렇다. 이 디자이너마저도 그가 모르는 대화 속에 끼어 있었다.
“꼭 숨기는 게 있는 사람들이 프라이버시를 운운하더군.”
문제의 초점이 이상한 곳으로 옮겨졌다. 루비카는 조금 억울했다. 그저 잠옷 이야기가 좀 나오고, 그 사실을 에드가에게 밝히기 부끄러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뭔가 숨기는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프라이버시고 뭐고 야한 잠옷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쏘아붙여 주려 할 때였다.
“다음부턴 노크하지.”
에드가가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그러니 노려보지 마.”
루비카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에드가는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놓인 스케치 하나를 집었다.
“뭘 주문했지? 아까 낮만 해도 고작 장갑 하나 샀다고 들었는데.”
“네, 마님께서 평소에 입으실 실내 드레스와 산책용 드레스의 디자인을 정하는 중이었습니다.”
종이에 그려진 간략한 스케치를 에드가가 눈으로 훑었다. 지금까지 루비카가 입은 드레스들은 나름의 멋이 있긴 했으나 구식이었다. 새로운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게다가 거기에 쓰이는 돈은 모두 그의 돈이었다. 그는 습관처럼 일하고 연구했지만 오늘 처음으로 일에 보람을 느꼈다. 만족스러운 눈으로 드레스의 디자인을 음미하며 종이를 넘기던 그는 마지막 드레스에 가서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디자이너로 추정되는 여자에게 따지듯이 종이를 내밀었다.
“이건 무슨 디자인이지? 가슴을 왜 이렇게 팠나?”
“네? 아.”
카나는 에드가의 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루비카는 에드가가 말한 드레스를 흘낏 봤다. 종이의 스케치들은 아까 의논할 때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마 예비로 들고 온 것을 에드가가 본 것 같았다.
“이런 걸 내 아내에게 입히려 했단 건가?”
에드가가 친절히 손가락으로 짚기까지 한 드레스를 본 루비카도 그가 왜 그리 화를 내는지 이해했다.
‘에구머니, 진짜 심하게 파긴 했네.’
에드가는 당장이라도 카나를 쫓아낼 기세였다. 루비카가 그건 자신에게 보여 준 디자인이 아니라고 변호하기 전 카나가 먼저 용기를 냈다. 공작 부인의 옷을 짓는 건 그녀의 인생에 다시없을 기회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른다. 카나는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서둘러 변명했다.
“그건 잠옷 디자인입니다. 각하.”
에스가의 서슬 퍼런 기세가 멈추었다. 안심한 카나가 말을 덧붙였다.
“제가 어찌 감히 마님께 이런 옷을 권하겠습니까? 그냥 예비 디자인이었습니다. 마님께 권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었다. 로사가 운을 떼었을 때 카나는 속으로 좋아하며 그 드레스를 추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클레이모어 공작은 부인의 옷차림이 보수적인 걸 선호하는 편인 듯 했다.
“권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네.”
“그럼 왜 들고 왔지?”
카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며 흘깃 공작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공작은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드레스는 무슨 천으로 만들 예정이었지?”
카나는 황급히 쌓여 있는 천 맨 아래에 있는 천을 끄집어냈다. 하늘거리는 천은 속살이 거의 비칠 정도로 얇았다. 완성된 잠옷은 남사스러운 정도로 야할 예정이었다. 천까지 확인한 공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열 벌, 주문하겠네.”
“네? 네!”
카나는 당황하면서도 황급히 주문서에 잠옷 열 벌을 기입했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입은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는 눈앞의 천과 디자인에 대한 만족감에 취해 그만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잊고 말았다.
“당신.”
얼굴이 새빨개진 루비카가 분노에 부들부들 떨며 에드가에게 손가락질했다.
“당장 나가!”
그리고 잠옷 주문을 취소한 건 당연한 절차였다.
* * *
옷 주문을 하느라 스티븐을 만나는 걸 깜빡했다. 루비카는 만찬을 시작하기 전 황급히 주방에 들렀다. 머랭을 치고 있었던 스티븐은 루비카가 설득을 하기도 전에 이렇게 말했다.
“두 번째 날은 땅과 하늘이 탄생한 날이니 역시 기념할 만하겠지요? 그걸 테마로 부드러운 치즈 케이크를 만들려 하는데 어떤가요?”
만찬에서 에드가는 스티븐을 쫓아냈다. 하지만 그 후에 쏟아지는 하인과 하녀의 칭찬이 그를 무척 즐겁게 만들었다.
스티븐은 손이 차가운 편이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빵은 잘 부풀어 오르지 않아서 실력에 비해서 맛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케이크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크림은 차가운 손일수록 좋았다. 전에도 케이크를 만들 일이 있었으나 보통 큰 행사가 있는 날이라 그는 메인요리를 만들기에 바빴다. 뒤늦게 알게 된 차가운 손의 장점에 스티븐은 무척 신이 났다.
루비카는 싱글벙글 웃으며 분주히 움직이는 스티븐의 손을 보았다.
‘어쩐지 앞으로 세 번째, 다섯 번째 날도 스스로 핑계를 만들어 케이크를 만들 것 같은데?’
그럼 더 좋다. 루비카는 싱긋 웃으며 그에게 주문을 하나 덧붙였다.
“대신 이번에는 좀 작게 만들어 줘.”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매번 커다란 케이크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티븐은 루비카의 주문에 착실히 대답했다. 사실 그는 오늘 시녀장 앤에게 슬쩍 귀띔을 받았다. 마님이 당분간 단 음식을 많이 찾을 것 같으니 군소리 말고 찾는 음식을 만들라는 소리와 함께 비린내가 너무 심한 음식을 빼고, 율무는 제외할 것이며 커피도 슬슬 줄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보탰다. 또 신 과일을 확보하란 명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스티븐은 시녀장이 무엇을 염려해 확실히 말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금방 짐작했다.
“그 이외에 드시고 싶으신 건 있으십니까?”
“그 외? 딱히 생각나는 건 없어.”
“그럼, 생각나는 게 있을 때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귀족 집안의 주방장이란 원래 이렇게까지 안주인의 환심을 사려는 게 보통일까? 무늬만 귀족으로 살았던 루비카로서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