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50화
루비카는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앞서 디자이너들이 모두 남자 아니면 부부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여자 디자이너를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다. 디자이너는 남편을 잃은 여자나 돈 없는 귀족의 딸이 체면을 잃지 않고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였다.
“내가 너무 생각 없이 말했네. 미안해라.”
“괜찮답니다. 종종,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셔서……. 숨길 일도 아니고요.”
카나가 지은 미소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결국에는 담담해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미소였다. 루비카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편안함을 느꼈다. 한편으로 카나의 삶이 궁금하기도 했다. 루비카도 에드가와 이혼한 후에는 혼자서 삶을 꾸려야 한다. 물론 그 전에도 쭉 홀로 살아왔으나 독신녀의 삶과 이혼녀의 삶에는 차이가 있으리라.
“이런 걸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저는 디자이너 이전에 클레이모어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는 영지민입니다. 마님께서 물어보지 못할 게 없으시지요.”
“……원래 남편과 함께 의상실을 운영했나?”
“아니요. 남편이 홀로 운영했어요. 그이는 무척 솜씨가 좋았답니다. 정말 많은 귀부인께서 남편의 옷을 입었지요.”
카나의 눈이 그리움에 젖었다. 루비카는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 괜히 남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낸 건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하지만 결혼 전에는 저도 의상실에서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남편의 일이 바쁠 때는 바느질이나 자수를 종종 도왔답니다.”
혹 루비카가 자신의 솜씨를 의심할지 걱정하는 어투였다. 루비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카나가 가지고 온 샘플들을 보았다. 확실히 세련미와 화려함은 떨어졌다. 그러나 소매의 마무리나 튼튼히 달린 장식을 보았을 때 솜씨는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넷이 있답니다. 다들 정말 귀여운 천사들이지요.”
루비카는 카나의 대답에 어쩐지 가슴 아래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과거에 재봉을 배웠다고 하나 카나는 오랫동안 옷 만드는 일에서 물러나 있었다. 아마 의상실 일을 돕는 것보다 가정을 꾸리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그랬으리라.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남편을 잃고 생계가 막막해지자 이렇게 생업의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손이 떨릴 수밖에 없다. 공작저택에 자신을 불러 달라는 팸플릿을 보낸 날, 그녀는 잠이라도 제대로 잤을까? 루비카는 카나의 실력에 상관없이 그녀에게서 적어도 드레스 한 벌과 잠옷 하나 정도는 주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앞서의 디자이너들에게 산 게 고작해야 장갑 하나이니 그럼 카나의 앞날에 적어도 몇 번의 기회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산책을 할 때 주로 입을 간편한 드레스가 필요한데…….”
“그럼 햇빛을 받아도 변색하지 않은 염료를 사용한 천으로 만드는 게 좋을 듯하네요.”
카나는 금방 여섯 종류 정도 되는 천을 꺼내었다. 루비카는 그중에서 옅은 살몬색 천을 골랐다. 가장 비싼 천이 아님에도 카나는 아무런 불만 없이 루비카의 선택에 동의했다.
“디자인은 어떤 게 좋을까요? 저는 산책용이니 치마를 많이 부풀리는 것보다 간단히 입을 수 있는 걸 추천드려요.”
카나는 가장 기본적인 실루엣이 그려진 그림을 루비카 앞에 놓았다. 그리고 루비카가 흥미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각각의 장단점을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루비카는 그런 카나의 태도에 점점 호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까 디자이너들과는 달라.’
지나치게 비싼 걸 권유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가격 대비 성능이 좋다며 싼 걸 권유하지도 않았다.
“스토마커는 좀 화려하게 가고 싶은데, 루비 같은 걸 다는 게 어떨까?”
루비카가 디자인을 보며 고민하는 옆에 어느새 앤이 와서 앉았다. 다른 디자이너들을 만나는 동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앤이다. 그런 앤조차도 편안히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에 이끌려 한마디 보탰다.
“햇빛을 받으면 루비가 반짝거려서 예쁠 것 같네요.”
여태까지는 루비카의 의견에 따랐던 카나가 이번에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루비는 예쁘지요. 하지만 저는 이 살몬색 천과 루비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봐요.”
그리고 카나는 살몬색 천 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은 루비를 대어 보여 주었다. 실제로 보석을 대자 정말 그녀의 말대로 썩 어울리지 않았다. 루비도 반짝거림이 덜하고 살몬색도 본래의 따뜻한 색이 죽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꼭 스토마커에 루비를 다시고 싶다면 다른 천을…….”
“아니야. 꼭 루비를 하고 싶었던 건. 그리고 나는 이 천이 마음에 들어.”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루비카의 의견에 반대할 때는 기분이 나빴는데 카나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루비카는 그녀의 그런 태도에서 신뢰를 느꼈다. 카나라면 중심을 잃지 않고 자신이 이상한 선택을 할 때 말려 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럼 루비를 하지 않는 대신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자수를 화려하게 하고 진주를 다는 걸 추천드려요.”
그리고 카나가 루비카에게 자수의 샘플과 디자인을 보여 주었는데 이번에는 썩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디자인 일을 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던 듯 그녀가 가져온 자수 샘플은 모두 유행에서 조금 뒤쳐진 것들이었다.
‘로사가 있으면 좋을 듯한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카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음에 드는 게 없으신가요?”
솔직히 대답해 줘야 하나, 실력에 상관없이 주문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일단 이 중에서 골라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앤이 말문을 열었다.
“저, 부인. 실례가 안 된다며 자수는 클레이모어 침방에서 해도 괜찮을까요?”
루비카는 앤의 말에 깜짝 놀라 카나의 눈치를 살폈다. 자존심 강한 몇몇 디자이너의 경우 그런 말을 꺼내면 매우 모욕당한 것처럼 굴었다. 침방이 디자이너의 일을 도울 때는 드레스를 지나치게 많이 주문해 일손이 딸리거나, 각 귀족가문의 침방에서만 수놓을 수 있는 가문의 문양을 넣어야 할 때에 한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카나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짓기는커녕 무척 기뻐했다.
“어머, 클레이모어 침방에서 해 주시면 저는 정말 감사하지요. 마침 자수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어요.”
카나가 덧붙인 말에 루비카는 새삼스레 그녀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센스 있게 입고 있어서 몰랐지만 카라에 단 레이스나 소매의 장식이 제법 오래된 티가 났다. 아무래도 재정적으로 넉넉한 상황이 아닌 듯 했다. 남편에게서 물려받았다는 의상실의 운영이 많이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카나, 자수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부족한가요?”
카나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님을 만나고 영업하는 일 자체에 서툴렀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해야 루비카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지 몰랐다. 카나는 루비카의 비위를 맞추는 대신에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어설프게 대답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고 이상하게 루비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일거리가 줄어들어서 일하던 장인과 재봉사들이 많이 떠났어요. 자수를 잘 놓으시던 분도 사 개월 전 다른 의상실로 일터를 옮기셨어요.”
“……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앤이 먼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쾌활한 목소리로 하녀에게 말했다.
“얘, 로사를 데리고 오렴. 오는 김에 자수 도안도 아끼지 말고 다양하게 들고 오라고 하렴. 베낄 수 있게 먹지 같은 것도 가지고 오면 좋고. 그리고 넌 주방에 가서 사탕이나 젤리 같은 게 없는지 물어보렴.”
루비카처럼 카나의 처지를 눈치챈 앤은 그녀를 챙겨 주기로 마음먹은 듯 했다. 사탕은 카나의 아이들에게 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카나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 루비카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님, 앞서 실력이 대단하신 분들을 물리치시고 제게 옷을 주문한다고 했을 때 무척 기뻤답니다. 하지만……, 저를 동정해서 옷을 주문하시는 거라면 마음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동정이라니, 그런…….”
앤은 카나가 그런 식으로 반응할 줄 예상하지 못해 당황했다. 루비카는 카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디자이너로서의 자긍심을 느꼈다. 비록 옷 만드는 일에서 멀어져 아이들을 키워 왔다고 하나 그녀 또한 의상실에서 옷 만드는 법을 배웠던 디자이너였다.
“처음에 당신 처지가 안 되었다고 느낀 건 사실이지만 결코 그것 때문에 주문을 결정한 것만은 아니야.”
루비카는 어두운 표정을 카나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역시 이럴 때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게 최고일 듯했다.
“앞서의 디자이너들은, 그래. 솔직히 말해서 당신보다 실력이 뛰어났어. 가지고 온 물건도 훨씬 더 좋았고.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하나도 들어 주지 않았어. 들어 주는 사람도 아첨하기에만 급급할 뿐 내게 뭐가 어울리는지에 대해서는 염두에도 없었지.”
자꾸 비싼 것만 팔려 했던 윌킨스 씨에서 루비카의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싼 물건을 권유했던 밀레 씨까지.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씁쓸해졌다.
“카나, 당신만 유일하게 내가 입고 싶은 것에 귀를 기울였어. 그리고 또 내게 뭐가 어울리는지 제대로 알아차리고 권했어.”
루비카는 말을 하는 와중 카나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를 확실히 깨달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안개 속에 있는 듯 아팠던 머리가 깔끔히 나았다. 삶에 있어 이렇게까지 명확한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의 확신이 들었다. 루비카는 카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선언했다.
“앞으로 내가 입을 옷은 모두 당신에게 주문할 거야. 카나, 내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 줘.”
이건 단순한 충동이 아니다. 매우 논리적인 추론에 뒤따른 결과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말에 얼떨떨한 카나의 손을 루비카가 다정히 잡았다.
“처음에 드레스 한 벌을 주문하려 했던 건 동정에서 시작한 게 맞아. 하지만 앞으로 내가 입을 드레스를 모두 당신에게 주문하겠다고 결정한 건 카나, 당신이 날 그렇게 만든 거야. 내 전속 디자이너에게 클레이모어 침방이 가진 소유한 자수 도안을 나누고 또 사람들을 빌려 주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카나는 눈물이 흐르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남편이 죽은 후 갑작스럽게 맡은 의상실, 십여 년 동안 옷 만드는 일과 떨어져 아이들을 키우는 데 매진한 그녀는 정말 막막했었다.
손재주는 자신 있었으나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이 무엇인지, 손님들의 기분을 맞추려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카나는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나둘 단골을 잃었고 솜씨 좋은 직공들은 월급을 제대로 줄 수 없는 카나를 떠나 다른 의상실로 갔다. 직공들이 떠나자 당장 만들 수 있는 드레스의 폭이 좁아져 가뜩이나 줄어든 손님들이 더욱 카나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일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배웠던 일이 옷 만드는 일이었고 그나마 아이들을 돌보며 어깨너머로 봤던 것이 옷 만드는 일이었다. 오늘 이렇게 공작 부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죽은 남편이 그동안 쌓은 명성 덕분이었다. 자신의 실력은 아니었다.
그래서 카나는 반쯤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가지고 있는 돈을 탈탈 털어 공작저에 왔다. 공작 부인에게 칭찬 한마디 들으면 그 소문을 듣고 떠났던 단골이 그녀를 찾지 않을까 하는…….
동정으로 자신의 옷을 주문하지 말아 달라 말하긴 하였으나 사실 카나는 간절히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랐다.
오늘,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은 그녀에게 엄청난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카나가 가진 실력 때문이라고 했다.
카나는 유행보다 손님에게 어울리는 옷을 권유하는 자신을 떠나간 많은 손님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머리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손님에게 어울리는 것과 상관없이 비싸고 좋은 것, 최신 유행하는 것을 권해야 한다고 명령했으나 입이 차마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아둔함에 대해 한탄하고 후회하였으나 루비카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카나를 자신의 전속 디자이너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루비카의 말을 마치 카나에게 지난 세월의 고생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마님, 마님께서 주신 기회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할게요.”
“정말? 그럼 앞으로 내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 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