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49화
* * *
돈이 많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행복이 있지만 돈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행복도 있다. 루비카는 눈앞에 늘어진 고운 천과 옷 장식에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이 근방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찾는 분도 많은 월킨스 씨입니다.”
앤의 안내에 제대로 멋진 양복을 차려입은 월킨스 씨가 인사했다. 그는 근사한 금발 머리에 포마드를 아낌없이 발라 넘겼다. 적당한 크기에 아몬드 모양의 녹색 눈동자는 제법 소년 같은 느낌을 냈다. 월킨스 씨는 우아한 태도로 루비카에게 인사했다.
“마님처럼 아름다운 분의 부름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름답다니요.”
“아니,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특히 풍성한 갈색 머리가 마님의 미모는 돋보이게 하는군요. 여기 이 천 어떠신가요? 머리카락의 빛깔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줄 겁니다.”
루비카는 그가 왜 잘나가는지 알 것 같았다.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손님의 기분을 좋게 만들 줄 아는 사내였다. 그는 마치 도자기처럼 반짝이는 새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여심을 떨리게 하는 그 미소는 철저한 계산속에서 나온 거겠지.
‘에드가 옆에 서면 그냥 꼴뚜기로 보일 것 같아.’
그건 오랫동안 지나치게 아름다운 주인의 얼굴을 보고 지낸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무도 미소에 반응해 주지 않자 월킨스 씨는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곧 프로답게 다양한 천과 샘플 드레스를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는 잘 나가는 디자이너답게 고급 천을 다른 누구보다 다양하게 구비했으며 드레스의 디자인 또한 수도의 최신 유행을 잘 따르고 있었다.
“여기에 은 단추가 어울릴 것 같은데.”
“마님, 은 단추라니요. 고귀한 마님에게 은 단추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이아몬드 단추가 어떠신지요?”
하지만 루비카가 보기에 샘플 드레스에는 은 단추가 딱 맞았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그는 곧 제자에게 손짓해 다른 드레스를 가져오게 했다.
“아님, 이건 어떠신가요? 저 멀리 샤르망 왕국에서 수입한 천을 사용했습니다. 고블린들이 만들어서 무척 얇고 광택이 아름답습니다.”
“정말 예쁘네.”
“네, 여기에 루비를 달고 자수를 넣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천은 무척 얇아서 그냥 이대로가 좋을 것 같은데…….”
윌킨스 씨가 제자를 쿡 찌르자 제자는 진주와 에메랄드가 잔뜩 달린 드레스를 들고 왔다.
“하하, 마님은 눈이 정말 높으시군요. 제가 결국 이 드레스를 꺼내게 만드시다니!”
윌킨스 씨가 선보인 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잔뜩 달린 에메랄드가 햇빛을 받을 때마다 눈이 멀 정도로 반짝였다. 하지만 루비카의 얼굴에서 처음과 같은 미소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안 어울려. 나랑.’
곱씹어 생각하니 윌킨스 씨가 권했던 물건은 모두 비싼 것이었지만 루비카에게 정말 어울리는 건 없었다. 심지어 권유한 옷과 가장 어울리는 장신구를 달려 해도 들은 척하지 않으며 은근히 더 비싼 것을 권유할 뿐이었다.
그만 가라고 해야 하는 걸까? 루비카는 자기 앞에서 미소 지으면서 당당한 태도로 이것저것 보여 주는 윌킨스 씨의 태도에 압도되어 망설였다. 이렇게 잔뜩 준비를 해 왔는데 루비카는 도저히…… 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장사꾼이 물건을 팔 때 자신만만한 태도는 나쁜 것 아니었으나 그는 너무 지나쳤다.
“어떤가요? 마님, 결정하시기 힘드시면 모두 주문하시는 게!”
윌킨스 씨의 한마디에 루비카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코 베일 수는 없다.
“아니, 주문은 안 할 거야.”
순간 윌킨스 씨의 쾌활한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루비카는 시장 통에서 흥정했던 기억을 되살렸다. 아무리 고급품을 취급한다고 해도 인간의 본성이 달라질 리는 없다. 루비카는 윌킨스 씨와 그 사람들은 결국 같은 상인이라 사실을 떠올리며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 시장 통에서 비싸다는 이유로 사지 않았던 것들도 다들 먼 거리를 이동해서 가지고 온 것이었다. 다만, 이제는 공작 부인이라 그때처럼 ‘너무 비싸니, 사기니. 어디서 수작질이야.’ 같은 말을 쓸 수는 없다. 루비카는 에드가가 거드름을 피울 때의 태도를 흉내 내 말했다.
“다른 디자이너의 드레스도 좀 더 본 다음에 결정하겠네. 기회는 공평히 줘야지.”
“네, 마님. 언제든지 다시 불러 주십시오.”
윌킨스 씨는 루비카가 그래 봤자 자신을 또 부르리라고 생각하고 물러났다. 이 영지 내에서 그가 가장 값비싼 물건을 취급했으며 수도의 유행도 잘 알고 있었다. 귀족에게 옷이란 ‘부’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하지만 떠나는 그의 우아한 뒷모습을 보며 루비카는 다짐했다.
‘두 번 다시 안 불러.’
그다음에 온 디자이너는 부부였는데 남편의 태도가 좋지 못했다. 그는 루비카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잘 보이려고 하며 그녀의 말이 옳다고 했으나 부인을 너무할 정도로 무시했다.
‘저런 자는 지금이야 내가 옳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 신뢰를 보이면 바로 태도를 바꾸지.’
루비카는 부인이 권한 장갑 정도만 사고 그 부부도 보냈다. 다음에 온 사람은 중년의 디자이너 밀레 씨였다. 루비카는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디자이너로 활동했다는 말에 기대를 걸었다. 분명 무시 못할 내공이 있으리라.
“방금 그 천, 괜찮았는데 한 번 볼 수 있을까?”
“마님, 남쪽 지방의 양으로 만든 견직물을 흔히들 최고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뭐, 물론 광택은 좋습니다. 하지만 전 가격에 비해서 그 값어치를 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 동쪽에서 난 천은 가격도 싸고…….”
루비카는 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까 윌킨스 씨는 계속 비싼 것만 권유했다면 그는 루비카에게 싼 것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양심적인 디자이너인가 싶었다.
“마님께서 천에 대해 잘 모르셔서 그러시나 본데…….”
“마님께서 자수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이런 자수는…….”
“마님, 그건 마님께서 잘못 아시고 계신 겁니다. 사실은…….”
“좋은 단추의 기준에게 대해서 잘 모르시는군요.”
“그건 가격 대비 성능이…….”
루비카는 점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확실히 앞서 디자이너보다 낫긴 했다. 하지만 자꾸 아는 척하며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게 두고 못 들을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자꾸 가격 대비를 운운하며 최상급보다 살짝 낮은 품질의 물건을 권유하는 것도 은근 기분 나빴다. 물론, 보통의 다른 부인들이었다면 그의 그런 추천은 적절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가격을 따질 정도로 궁한 것도 아니라고! 오히려 열심히 펑펑 돈을 써야 한다고!’
루비카는 당장 밀레 씨 앞에서 아까 돌려보낸 윌킨스 씨를 도로 불러 가장 값비싼 드레스에 보석을 덕지덕지 단 자수를 추가하고 세트로 최고급 수입비단으로 만든 장갑과 모자까지 세트로 주문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이겨 냈다.
“그만, 머리가 아프네요.”
“밀레 씨, 마님께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하시네요. 오늘은 이만하시지요.”
“마님께서 두통이 있으신가 보군요. 제가 쓰는 약을 추천하겠습니다. 의사들이 쓰는 약보다 훨씬 좋답니다.”
심지어 밀레 씨는 약에 대해서까지 아는 척을 하며 가방에서 봉지를 찾아 동그란 알약을 꺼냈다. 거무튀튀한 환약은 어쩐지 수상쩍은 느낌마저 났다. 당장 앤이 기겁했다.
“마님께는 주치의가 있답니다.”
그러나 앤의 간곡한 거절을 밀레 씨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말았다. 그는 아주 자신감에 넘치는 미소를 선보였다.
“의사들이란 돈을 벌기 위해서 쓸데없이 비싼 약재를 선보이기 마련이지요. 간단한 두통이시면 값비싼 약을 드실 필요 없습니다. 이 약이면 충분합니다. 약효는 제가 보장합니다. 의사가 주는 약보다 이게 훨씬 더 효능이 좋다고, 추천받은 다른 귀부인들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루비카는 이번에는 진짜 머리가 아팠다. 저 사람은 정말 왜 저렇게까지 아는 척을 하는 걸까. 꼭 말만 들으면 아카데미에서 의학 박사라도 딴 것 같았다.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그렇게 효과가 좋다고 다들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거죠?”
반쯤은 정말 궁금했고 반쯤은 비꼬는 거였다. 그러나 밀레 씨는 그 물음에서 루비카가 자신을 믿기 시작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만 지나치게 솔직하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말똥을 잘 말려서…….”
“말똥이라고요?”
루비카 이전에 앤의 인내가 끊어졌다. 대경실색해서 소리를 지른 앤은 밀레 씨의 웅얼거리는 말을 일절 듣지 않고 문밖으로 그를 밀어내었다.
“감히 말똥을 마님께 먹이려 했다니!”
“효과가 무척 좋…….”
“말똥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꺼져요!”
“나는 마님을 생각해서 권유한 거요.”
밀레 씨는 도와달라는 듯 루비카를 바라봤다. 멍청한 건가, 뻔뻔한 건가. 루비카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장사는 텄다고 판단한 그는 이번에는 자신이 들고 온 드레스나 재료를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웅얼거렸다.
“모두 하인을 시켜서 당신 일터로 배달시켜 줄 테니 제발 말똥냄새 풍기지 말고 가요!”
앤은 밀레 씨가 가고 난 다음에도 한참 분노를 참지 못하고 씩씩 거렸다. 그리고 루비카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마님, 저런 분인지 모르고 불러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앤. 당신 잘못이 아닌 걸……. 또 평판은 좋았으니까.”
사실 밀레 씨의 센스는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윌킨스 씨에 비해서 양심적이기까지 했다. 문제는 입이었다. 어쩌면 다른 귀부인들도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물건을 구매했던 건지도 모른다.
“오늘 일정은 이것으로 끝낼까요?”
“아직 한 분 남아 있지 않아?”
“마님, 많이 피곤하신 것 같은데…….”
“하지만 먼 길을 온 사람이잖아. 내 기분 때문에 헛걸음하게 할 수는 없지.”
루비카가 마지막으로 남은 디자이너를 보기로 한 것은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앞서 디자이너에게 시달리기도 너무 시달렸고 실망도 많이 했다. 루비카는 일말의 기대 없이 마지막 디자이너를 기다렸다.
“마담 카나입니다.”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지막에 온 디자이너는 여태 온 디자이너들에 비해 준비한 샘플 드레스나 천이 현저히 적었다. 심지어 루비카 앞에 천을 늘어놓으며 손을 벌벌 떨기까지 했다. 루비카는 몸집이 작은 그녀가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카나의 긴장을 풀어 줄 겸 말을 걸었다.
“남편은 옷은 만들고 부인께서 손님을 만나는 거군요.”
카나의 파란 눈이 불안한 듯 흔들렸다. 잠시 고민하던 카나는 조심스러운 어투로 답했다.
“남편은……, 작년에 신의 곁으로 돌아갔답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