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48화
당연한 요구를 하는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루비카는 어쩐지 그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왜 이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가 자신에게 이런 걸 요구하는 걸까? 그가 마음만 먹으면 키스는 물론이요 그보다 더한 것도 해 줄 수 있는 여자가 널리고 널린 세상이다.
루비카는 문득 분수대 아래에 잠긴 석상을 바라보았던 에드가를 떠올렸다.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슬픔이 잠긴 얼굴이었다. 또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담아 뒀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분노가 떠올랐던 순간도…….
완벽하고 차가워 보이기만 하는 건 에드가의 가면일지도 모른다. 루비카는 그때 사람을 밀어내는 그의 외로움과 고통을 아주 조금이나마 엿봤다. 아마 그조차도 에드가로서는 용기를 낸 행동이었을 거다.
‘원수를 이웃처럼 사랑하라.’
루비카는 휴 신의 가르침을 되뇌었다. 에드가가 대체 왜 자신에게 청혼했는지, 이렇게 손해를 보면서까지 옆에 자신을 두려고 하는지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계약이든 합의든 뭐든 떠나서 지금 현재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 또한 그녀이고 그가 그나마 아픔이라도 보여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루비카였다.
신이 대체 무슨 연유로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내고 또 에드가를 만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비카는 이것이 신의 안배라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그래, 전통이라면 할 수 없지. 해도 돼.”
수도원에서 루비카는 아픈 사람을 기꺼이 치료하라고 배웠다. 아픔은 육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에드가는 마음이 아픈 사람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아파서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구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 안의 에드가에 대한 불호의 감정을 눌러 두고 이 원수 같은 남자를 이웃처럼 아끼며 아픔을 어루만져 줄 필요가 있다. 누가 뭐라 해도 루비카는 휴 신의 충실한 신도였다.
“정말…… 해도 되는 건가?”
갑작스레 허락이 떨어지자 믿어지지 않아 에드가가 반문했다. 간신히 용기를 내 허락했던 루비카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혔다.
“그럼 하지 말고.”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에드가는 자신도 모르게 치솟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 주변이 한겨울처럼 추웠는데 지금은 따뜻한 봄 햇살이 드리운 듯했다. 에드가는 그의 커다란 두 손을 뻗어 루비카의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피부는 어딜 만져도 항상 말랑말랑하지만 특히 볼이 기분 좋을 정도로 보드라웠다.
“저, 저기.”
에드가가 뺨을 감쌀 줄 몰랐던 루비카가 당황했다. 혹여나 루비카가 마음을 바꿀까 에드가는 황급히 그녀의 이마에게 입을 맞췄다. 루비카의 따스한 숨이 그의 목에 닿아 간질간질 간지럽혔다. 그저 이마에 입 맞췄을 뿐인데 너무 기분 좋아 이대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에드가는 어떤 흥분 같은 것이 몸을 감싸는 걸 느꼈다. 이건 그가 아카데미에서 일여 년 가까이 준비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가 수많은 교수와 학생의 시선을 받았을 때의 느낌이었다. 사실은 그것보다 좀 더 기분 좋았다.
“에드가?”
이마에 입술이 닿은 채로 에드가가 한참을 떨어지지 않아 루비카가 용기를 내어 그를 불렀다. 에드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이마에서 입을 떼고 루비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루비카의 물기 어린 눈과 마주치는 순간, 에드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빠른 속도로 방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뛰쳐나가는 그의 귀 끝은 타오르듯 붉었다.
“뭐야, 굿나잇 키스를 하자고 하더니 정작 인사도 없이 가 버리다니…….”
영문을 알 수 없어 루비카는 에드가가 닫고 나간 방문만 황망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굿나잇 키스를 하고 싶다고 하질 않나,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뛰쳐나가질 않나. 정말 그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 반응이 재미있는 걸까? 아냐, 저 사람 주변에는 이것보다 재미있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로 넘쳐 날 거야.’
루비카는 잠시 침대 위에서 턱을 바치고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에드가에게 루비카가 이상한 여자인 듯 그녀에게 에드가 또한 이상한 남자였다. 루비카는 평생 살면서 그녀에게 저런 식으로 종잡을 수 없이 반응하는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물어본다고 해서 제대로 대답해 줄 성격도 아니고…….’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에 대한 해결책을 루비카는 알고 있다.
‘일단 자자.’
한숨 자고 나면 해답이 나오거나 모두 잊고 마음이 한결 편해지겠지.
* * *
루비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전투 준비를 마치고 면담실로 향했다. 오늘은 전날보다 면담을 신청한 친척들의 수가 확 줄었다. 하룻밤 사이에 루비카가 호구는커녕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소문이 나 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정원을 꾸미기에 딱 알맞다며 이상한 암석이나 나무를 살 것을 권유하는 사람이 늘었다. 모두 예쁘지 않았다. 루비카는 열 마디 이상 나누지 않고 앤과 협동해 그들을 쫓아내버렸다.
“부인, 제 생각에 부인께서는 수도 사교계로 가시기 전 제게 상류층의 문화나 분위기에 대해서 좀 더 조언을 들으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안 사요’ 공격으로 쫓아낸 사람 중 클레이모어가의 예법 교육을 담당하는 셰니에 부인만은 지치지 않았는지 오늘도 끈질기게 루비카를 설득하러 왔다. 루비카는 색이 거의 다 빠진 금발에 허리가 구부정한 셰니에의 말을 일단 웃으며 들었다. 하지만 루비카는 매일 꾸준히 그녀를 만나 조언을 빙자한 예법 공부를 할 마음이 영 들지 않았다.
“셰니에 부인, 수도 사교계가 열리는 시기는 아직 한참 멀었어요. 저는 일단 공작가의 일에 집중할 계획이랍니다.”
셰니에는 루비카의 간곡한 거절을 못 들은 척하며 말을 이었다.
“피로연 때 부인께서 각하께 보이신 태도만 해도 보통의 귀족가에서는…….”
“부인, 각하께서 마님과 각하 사이에서 쓰는 말은 부부 사이의 일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마님께 이에 대해 함부로 말씀을 올린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말씀하셨고요.”
보다 못한 앤이 셰니에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셰니에는 앤을 힐끗 쳐다보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설사 그리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현명한 여인이라면…….”
루비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앤이 바로 루비카의 뜻을 읽고 셰니에 부인에게 공손히 말했다.
“부인, 마님께서 어제오늘 일이 많으셔서 피로가 쌓이셨답니다. 이제 그만 주치의를 만나기로 한 시각이에요.”
물론 주치의를 만날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둘러대기라도 하지 않으면 셰니에가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공작가의 예법 선생으로 오랫동안 일한 노부인이었다. 다른 친척처럼 문전박대했다가는 어떤 소문을 낼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마님의 귀한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그럼, 내일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셰니에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공손히 인사했다. 루비카는 예법에 맞게 그녀에게 대응하면서도 문이 닫히자마자 한숨이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앤은 루비카에게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쁜 분은 아니신데…… 좀, 별난 데가 있으시죠.”
루비카는 앤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셰니에 부인이 왜 자꾸 자신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좋은 의도는 아닐 것 같았다.
“내일도 또 온다니…….”
“많이 피곤하시면 오후 일정을 물릴까요?”
“아니,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오늘 오후에는 근방의 디자이너들을 만나기로 했다. 오전의 지루한 면담을 버틴 이유 중의 하나였다. 루비카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조금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네.”
앤이 바로 센스 좋게 다과와 함께 따뜻한 커피를 내왔다. 루비카는 표면에 설탕을 적당히 뿌린 마들렌과 커피를 마셨다.
‘아, 향기 좋다.’
어제 에드가가 준 정체를 모를 음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달콤한 마들렌을 먹은 뒤 씁쓸한 커피를 마시면 뒷맛이 딱 깔끔하게 떨어진다. 정신을 차리니 접시 위의 마들렌이 절반 가까이 사라졌고 커피 한 잔을 깔끔히 다 비웠다. 하지만 셰니에 부인이 준 스트레스 덕분인지 루비카는 여기서 그만둘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커피를 좀 더 마시기 위해 주전자를 들었다.
“마님, 커피는 한 잔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더 마시면 안 될까?”
“건강에 좋지 않아요.”
어지간해서는 앤을 설득해 한 잔 더 마실 생각이었던 루비카는 그녀가 자신을 무슨 환자 걱정하는 것처럼 바라보는데 당황해 주전자를 놓았다.
‘왜 이러는 거지?’
피로연에서 샴페인을 더 마시려고 했을 때 말린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앤은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편인 것 같았다. 루비카는 아직 자신은 젊고 커피 두 잔쯤은 무리가 없다고 말하려던 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오늘 면담은 셰니에 부인이 마지막이었는데?”
“제가 가 보겠습니다.”
문을 열자 들어온 것은 집사 칼이었다. 칼은 루비카를 보고 잠시 망설이더니 공작의 전언을 전했다.
“마님, 각하께서 건강을 생각해 잠시 정원을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뭐?”
이 집안사람은 건강에 집착하는 게 집안 내력이라도 되는 건가? 의아해하는 루비카 옆에서 앤이 반색하며 나섰다.
“어머,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산책은 산……!”
……모에게 무척 좋지요. 라는 뒷말을 앤이 간신히 삼켰다.
“산?”
되묻는 루비카의 말에 앤이 다 알면서 왜 이러냐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산뜻한 기분이 들게 하지요. 마님, 기분도 환기할 겸 나가요.”
어느새 앤이 모자와 장갑, 그리고 양산을 들고 왔다. 루비카는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섰다.
* * *
루비카는 산책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책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통감하는 편이었다. 실내에만 있어서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못한다. 또,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일이 많은 귀부인에게 산책은 유일한 운동이었다.
다만 그녀는 이 산책이 누군가의 권유를 빙자한 명령으로 이뤄졌다는 게 기분 나빴다. 루비카는 하녀들이 당황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정원을 가로질러 가다 휙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2층 창의 커튼 너머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떨어지는 실루엣이 보였다.
‘집무실이지. 저기.’
지금 누구보다 산책을 해야 하는 건 루비카가 아니라 집무실에 콕 처박혀 잠도 거기서 자고 밥도 거기서 먹는 에드가였다. 게다가 잠옷 너머로 느껴진 촉감에 의거하면 그 남자는…….
‘……운동할 필요가 없지.’
가슴이 퍽 단단했다. 벗은 모습은 본 적 없지만 분명 근육으로 꽉 짜여진 가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뺨에 닿았던 촉감이 모든 걸 분명히 말해 주었다.
루비카는 낯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공연히 길에 있던 돌멩이를 발로 찼다. 왜 그런 걸 기억하고 있는 걸까?
“마님, 길이 많이 불편하시죠? 정원사가 한참 정비하는 중이라 미처 길을 정리하지 못했나 봅니다.”
“정비?”
“네, 오늘 마영석상 하나가 빛이 꺼지는 바람에 배치를 바꾸는 준비를 하는 중이라 들었습니다. 급한 일은 아니라 내일 말씀드리려 했어요.”
아마 어젯밤 본 천사 모양의 석상을 말하는 듯했다. 루비카는 시간이 지나 본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석상에 어쩐지 안타까움을 느꼈다. 계속 땅속에 파묻혀 있었다면 그 석상은 빛을 잃을 일이 없었겠지.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땅속에 갇혀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게 정녕 가치가 있는 일일까?
그런 물음을 떠올릴 때면 루비카는 어쩐지 가슴이 아파 오고 세상살이가 모두 덧없이 느껴졌다. 아름다움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지만 가끔은 씁쓸함과 슬픔을 준다.